다행이고 힘겨운 시대

이인호 시인 / 기사승인 : 2020-07-22 11: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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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세상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한 시대의 악이/ 한 계급에 집약되어 있던 시절의 투쟁은/ 얼마나 힘겹고 다행인 시대였던가(박노해 시대고독 중에서). 시를 무기로 삶을 무기로 가장 최전선에서 싸웠던 박노해 시인의 ‘시대고독’을 읊조려 본다. 


온 세상이 떠들썩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성추행 고발사건과 지인과의 카톡 대화를 그대로 작품에 옮겨 문단을 떠들썩하게 한 소설가 김봉곤 사건,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겐 더욱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온 부산의 한 독립서점 사건(소수자와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던 서점주가 아르바이트생에게 근로계약서 미작성, 주휴수당 및 퇴직금 미지급으로 기소 송치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등 최근 들어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들여다보며 난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혼란스럽기까지만 한 게 다다. 박노해가 이 시의 마지막에서 얘기했듯이 우리가 ‘혁명의 전위마저 씨가 말라가는/ 이 고독한 저항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이 또한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한 계급에 집중되던 시대를 지나 여성과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와 기준이 조금 더 확장되고 있으며, 그걸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조금 더 촘촘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부르디외가 “우리가 취향이라고 부르는 건 사회에서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이다”라고 얘기한 걸 조금 깊게 생각해본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며, 난 결국 그런 행동들이 바로 넓은 의미의 ‘구별짓기’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구별짓기’를 통해 지금은 좀 더 치열하게 대립해야 한다. 


고 박원순 시장에 대한 성추행 고발사건을 놓고 과거 민주화 세대와 젊은 세대의 논쟁구도를 바라보며, 내각 19명 중 여성이 12명인 30대 여성총리가 이끄는 핀란드를 떠올려봤다. 보수적 전통이 강한 아시아에서는 도무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핀란드를 보며, 왜 우리는 아직도 농경사회에 갇혀 있는가 애석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들이 결국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보여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봤다. 


얼마 전 아내와 육아와 가사노동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아내는 엄마와 자고 싶어하는 일곱 살 막내와 함께 자는 것까지 육아와 가사노동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고, 난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이와 함께 자는 것도 육아의 일부분이므로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싶기도 했다. 


우리는 여전한 계급사회를 구성해서 살고 있으며, 여성의 권리라는 것도 이제 막 논쟁이 붙을만한 위치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치열하게 대립하고 싸워야 한다. 지금은 고독한 저항의 시대가 아니라 삶의 곳곳이 전선인 상황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딱 하나로 귀결된다면 ‘얼마나 괴롭고 행복’하겠는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고, 어쩌면 더 벌어지게 될 모습은 지금 우리가 놓인 이 자리가 ‘얼마나 다행이고 힘겨운’ 시대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 자는 걸 육아로 인정하기엔 좀…. 


이인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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