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보도연맹

배문석 / 기사승인 : 2020-04-03 11:35:09
  • -
  • +
  • 인쇄
한국전쟁 발발 70년과 울산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1949년 12월 9일 보도연맹 울산지부가 결성됐다. 야산대에 대해 군경민관이 전면 공격을 확대해 나갈 때였다. 앞서 보도연맹 경남도연맹이 11월 20일 결성 선포대회를 연 후 그 즈음 경남 군 단위 보도연맹이 들어서는 과정이었다. 울산지부에 이어 방어진읍도 보도연맹 지부가 만들어졌다. 그때는 해를 넘겨 1950년 1월 26일이었다.

사상전향 주간

울산보도연맹 결성에 앞서 경남도보도연맹은 10월 26일부터 11월 30일까지 사상전환 주간을 만들어 자수자를 받았다. 울산은 최종 288명이었다. 이 기간에 울산에서 전향한 대표적인 인물은 민전위원장을 맡았던 김상헌, 농민조합군지부장 이동개, 부녀동맹에 참여했던 김영진, 인민위 교육부장을 역임했던 김병희 등이다. 


그 중 김영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였던 조형진의 부인이며, 울산읍의원 등을 지냈던 김활천의 여동생으로 해방공간에서 여성계에 영향을 끼쳤던 이다. 그리고 김병희는 일산동 보성학교 출신으로 대구사범을 졸업한 후 교육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렇게 전향한 이들은 보도연맹에 의무 참가 대상이 됐다. 그리고 보도연맹 안 직위 중 전향한 인사에게 배당되던 간사장은 김상헌이 맡았다. 이후 방어진읍을 포함해 모든 지역(2읍 15면)에 보도연맹 지부가 순차적으로 결성됐다. 

 

▲ 1949년 12월 13일자 <민주중보> 울산보도연맹 지부 선포대회 기사


사회주의계열이 강했던 방어진읍

보도연맹 울산지부가 결성된 후 방어진읍에 따로 지부가 결성된 것은 한 달 보름정도 지난 뒤였다. 방어진읍은 울산읍에 비해 사회주의계열이 강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방어진이 일본인 자본가들이 장악한 수탈창구였다면 해방 후에는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바로 설치될 만큼 변화가 컸다. 


대표적인 예로 미군정이 실시한 1946년 1월 초대읍장 선거에서 방어진 인민위원장 박학규가 무력행사와 압도적 추천으로 당선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미군정은 주민투표로 읍면장 추천위원회를 꾸리고 간접투표로 초대 지자체장을 뽑았는데 보성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이며 일제강점기 동면과 울산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박학규가 당선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관료가 읍장이 된 울산읍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 해방 후 방어진읍 초대 민선읍장 박학규. 맨 앞 열 중간 하얀 양복. 출처:동구문화원


1947년 9월 서북청년회 울산파견대 대장 이하 11명이 방어진 남선여관에 묵을 때 500여 명의 청년들이 기습한 사건도 발생했다. 우익단체 중 특히 서북청년회가 두드러졌는데 방어진에 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해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방어진읍의 좌우익 세력 관계가 1948년부터 완전히 역전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잇따라 벌어진다. 미군정을 등에 업고 우익단체들이 활개를 치게 되는 1948년이 되면 경찰과 협조해 백색테러가 연이어 벌어졌다. 


이미 경찰에게는 사회주의계열에 대한 체포권한이 백지수표로 위임된 상태였다. 그리고 우익단체가 주도한 백색테러는 방어진읍을 비롯해 사회주의계열이 강했던 곳에서 더 심각하게 자행됐다. 산으로 올라간 야산대가 마을로 내려오는 공세가 간헐적이었다면, 일상에서는 사회주의계열에 대한 지속적인 체포와 구속 그리고 테러로 진화한 셈이다.
 

▲ 해방 후 방어진 중심가(1954). 일제강점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출처:동구문화원


우익 백색테러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2010년 상반기 보고서 속 한국전쟁 이전 민간인 희생사건을 보면 보도연맹 이전 소위 ‘좌·우익 대립’ 속에서 빚어진 울산 동구의 백색테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1948년 8월 10일 일어난 방어진 수장 사건이다. 방어진에 거주했던 은행원 황학림은 경찰에 연행돼 방어진의용소방대 사무실에 구금된다. 참고인 김종만은 황학림의 친척 황병조가 남로당 가입을 권유하는 등 적극적으로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황씨들이 많이 희생당했다고 증언했다. 


급작스럽게 체포돼 함께 갇혔던 주민 10여 명은 방어진 어협 소속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사살됐다. 방어진 부근 큰 섬 근처에서 총을 쏴 죽인 뒤 가마니에 넣어 수장했는데 한참 뒤에 시체가 파도에 떠밀려 왔다고 한다.

 

▲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하반기조사보고서>

 

▲ 방어진읍지부 리별 세포 구성.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하반기조사보고서>


방어진 출신 사회운동가에 대한 백색테러는 1949년 3월 2일 장두길 사살로 이어진다. 지금의 제일중학교 근처인 당시 옥리 사무실에서 장두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시체가 발견됐는데 모두 총에 맞아 사망했다. 장두길의 사촌 장두용과 장두성도 희생됐는데 경찰이 장두길의 행방을 좇으며 추격할 때 몸을 숨겼던 곳에서 발각돼 사살됐다고 한다. 


장두길은 남로당 등 사회주의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백범 김구와 함께 북한에 다녀온 후 울산에서 사회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사회주의계열과는 정치적 입장과 활동이 달랐다. 결국 이승만 세력이 남한 단독선거를 추진할 때 반대했던 김구 쪽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보인다. 김구는 그 뒤 6월 26일 암살당했다. 결국 좌우 대립 뿐 아니라 이승만 정부 세력의 정치대결 속에서 백색테러가 자행된 것이다. 


장두길이 백색테러로 사살된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부친 장병준, 백부 장을준, 숙부 장기준, 동생 장두옥, 사촌 장두종, 장두일이 모두 보도연맹에 가입한다. 집안의 젊은 청년 3명이 사살된 상황에서 가족들이 대거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을 보면 결국 강요된 선택을 당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울산 동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에 나섰던 세력 대부분이 사회주의계열이었다. 일제 경찰은 사립 보성학교를 중심으로 일산하리와 일산상리(번덕)를 묶어 ‘제2의 모스크바’로 부르며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했다. 백색테러로 학살된 장두길의 부친과 숙부 역시 사립 보성학교 교사를 맡았고 울산청년동맹과 신간회울산지회 등에 참여하며 청년‧사회운동에 앞장섰던 경력이 있다. 


방어진읍에서 해방 후 자연스럽게 사회주의계열로 나섰던 이들이 많은 것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이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8년 5월 남한단독선거 이전까지 치열하게 좌우간의 대립이 계속됐지만 방어진읍은 보도연맹이 만들어질 때 결국 큰 역풍을 맞은 셈이다. 


보도연맹 가입을 종용하거나 겁박한 경찰은 대부분 친일전력이 있던 사찰계 형사였다. 미군정 아래서 친일청산이 되지 않은 결과다. 읍면 공무원 중 다수도 일제 때 임용됐던 이들이었다. 더구나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기 전 반민특위가 기능을 잃어 반민족행위자(친일파) 핵심들도 제대로 된 처벌을 못한 상태였다.

보도연맹 방어진읍지부 결성

1950년 1월 21일 보도연맹 방어진읍지부가 방어진국민학교 강당에서 결성식을 열 때 위원장은 방어진 경찰지서 주임 최근영이고 명예위원장은 방어진읍장 장영극이었다. 일제강점기 해산물거상으로 불리며 읍위원까지 지냈던 변동윤은 민간인으로 총무부장을 맡았다. 연맹원은 결성식 전후 140여 명에 이르렀다. 

 

 

▲ 보도연맹 방어진지부 연맹원 명부


진실화해위원회가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조사하면서 울산중부경찰서에서 입수한 ‘좌익출소자명부’와 ‘보도연맹원명부’를 분석한 자료는 15개 읍면 중 방어진읍을 비롯해 6개 면(농소면, 범서면, 삼남면, 온양면, 웅촌면, 청량면)에 대한 기록만 남아 있었다. 울산읍을 비롯한 나머지 면의 자료가 없는 대신 전체 일련번호 ‘1561’번이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울산지역의 보도연맹원은 최소 1561명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데 그 중 방어진읍이 최소 155명이다. 그런데 울산동구청이 발간한 <동구지>(1999)에서는 보도연맹원으로 등록된 숫자를 400~500명으로 적고 있다. 그 등록자들 중에는 좌익 인사들도 있었지만 진보적 민주 인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등록시키기도 했고, 명단을 작성했던 사람들의 개인감정으로 억울하게 이름이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과거사위원회가 확보할 수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가능한 지역과 인원만 정리해 놓은 보도연맹원 가입 시기는 표와 같다. 


보도연맹 방어진읍지부는 1950년 2월 136명이 가입했다. 울산에서 따져보면 가장 많은 수가 한꺼번에 가입한 경우에 해당된다. 그런데 다른 곳의 가입시기와 비교하면 두 달에서 한 달 가까이 늦게 숫자가 채워졌다. 이런 결과는 방어진읍에서 맹원을 모집할 때 자발적 참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이 확보한 숫자에 맞춰 머릿수를 채운 강압적인 가입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아울러 방어진읍지부 연맹원은 23개의 세포로 나눠 관리했으며 행정구역이 아닌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세포를 구성했다. 리별 맹원 수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부터 보성학교를 중심으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이 강했던 일산리가 51명으로 가장 많았다. 방어리 34명, 화정리 15명, 전하리 14명, 동부리 13명, 염포리·주전리 9명, 서부리 5명, 미포리 3명 순이었다. 


울산군 보도연맹 가입 이전 소속단체를 분류 해놓은 표에서 방어진읍지부만 살펴보면 연맹 이전 소속단체는 남로당이 54명으로 제일 많고, 사회주의계열 청년단체인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소속이 44명으로 두 가지만 합쳐도 3분의 2에 육박하는 약 63%다. 


이는 남아있는 연맹원 명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7개 지역 평균보다 높은 수치다. 그밖에 농민조합 24명, 여성동맹 3명, 인민위원회 2명이고 기타는 1명인데 소속은 없지만 물품과 급식 등을 협력한 경우다. 그리고 사회주의계열 단체와 상관없는 이는 27명으로 약 17%며 전체 평균 21.6%보다 낮다.


이 분류표만 보면 방어진읍지부가 울산의 다른 지역보다 사상적 성향이 더 높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 방어진만큼 사회주의계열이 강력했던 언양과 서생지역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비교하기 어렵지만 울산에서 제일 많았다는 것은 여러 증언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통해 남로당, 민애청 가입 경력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실시한 면담 조사에 응한 신청자 다수가 보도연맹원이 사실상 좌익단체와 무관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는 학살피해자 유족만의 주장이 아니라 보도연맹 중앙위원으로 창립에 관여하고 연맹을 관리했던 사상검사 오제도나 선우종원도 인정한 부분이다. 두 사람 모두 남로당 가입자 중에는 단순가담자나 의도치 않게 이름이 등록된 경우도 빈번했음을 확인한다. 


아예 단체 전력이 없는 이들은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땅을 준다거나 식량배급을 우선 해준다는 말에 혹해서 가입한 경우처럼 경제적 이익과 생활고에 따른 가입이 많았다. 진실화해위원회 울산조사 중에는 보도연맹원이 되면 버스비나 비료가 공짜라는 말을 믿었거나 군대와 부역을 면제해준다는 말에 가입한 사례도 확인됐다. 경찰과 읍 공무원들이 지역마다 할당된 모집숫자를 채우기 위해 임의로 명단을 작성한 사례도 확인됐다.


결국 보도연맹 참가자들 중 사회주의계열 정당과 단체 전력이 있는 경우가 다수지만 그 속엔 단순가담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경력이 있으며 친일파가 득세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와 거리를 뒀다. 방어진읍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서북청년단과 큰 마찰을 빚었던 것처럼 우익단체에 대한 불신이 컸다. 나머지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참여한 이들은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관에서 동원한 내용을 그대로 따라갔다고 볼 수 있다. 


배문석 시민기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울산 이슈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