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통도사에 육군병원 정양원이 있었다(2)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20-07-03 11: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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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70년

마을 주민과 통도사 스님의 증언

통도사 대광명전에서 육군병원 정양원의 낙서를 발견하기 전에 객관적 증거는 없었다.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있었다는 정부 기록은 없다. 하지만 동래와 범어사, 통도사에 부상병을 치료한 국군병원이 있었고, 환자는 대부분 낙동강 전투에서 다친 군인들이었다. 그래서 1차적으로 마을 주민과 통도사 스님의 증언을 통해 병원의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보광중학교에 병원이 들어서다

80대 가까운 마을 주민에 따르면, 보광중학교에 육군병원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현재의 성보박물관 자리에 있었던 통도중학교에서 1941년 김말복, 조용명, 배기철 교사 등은 항일 민족교육을 했다. 해방 후 1946년 9월 15일 개교한 보광중학교는 1948년 5학급이 돼 기존 3개 교실로는 운영이 어려워 성보박물관 자리에 신축 공사를 했다. 이때 학생들은 통도사 경내 전각에서 수업을 받았다. 1949년 3월부터 신축 건물에서 수업했다. 1951년 8월에 총 6학급 학생 정원은 300명이었다. 1951년 7월 7일 2회(4년제)와 3회(3년제) 졸업식이 있었다. 4회는 1952년 3월 23일 졸업식을 했다. 3회와 4회 학생의 재학시절 때 통도사에 병원이 있었다. 당시 학교 건물은 보통교실 4칸, 음악실・특활실・가사실 각 1칸, 교장실, 교무실로 총 9칸의 공간이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은 취운암을 기숙사로 해 생활했다. 당시 학교장은 박원찬 스님이었다. 


당시 보광중학교에 다녔던 학생들의 증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졌다. 현재 성보박물관 자리인 보광중학교와 취운암이 정양원이었다는 것과 통도사 경내에 정양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학생들의 시간적 기억 혼동과 입대에 따른 단절적 기억 때문인 것 같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통도사에서 학교로 병원이 확대됐음을 보여준다.
 

▲ 보광중학교 1953년 전경(졸업 앨범 5회)


보광중학교 졸업생의 증언들

전쟁 당시 중학교에 다녔던 졸업생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하북면 마을 역사에 관심이 많은 보광중학교 행정실장을 지내신 신충길(1944년생) 어른의 소개로 생존하신 몇 분을 만날 수 있었다. 80대 후반으로 90을 바라보는 분들의 기억은 분명했다. 70년이 흐른 뒤라 기억은 혼재됐지만 뚜렷하게 증언했다. 


성천마을에 사는 안정철 어른은 1932년생으로 보광중 2회 졸업생(4년제, 1947.9.1~1951.7.7)이다. 집 앞에서 농사일하는 어른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보광고등기술학교 잠업과(1년제, 개교 1951.10.1)를 다니다가 영장이 나와 8사단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동래에는 ‘31 육군병원 본원’이 있었고, 통도사에는 ‘31 육군병원 분원’이 있었다. 당시 상이군인 중환자들이 많았는데, 천왕문에서 불이문 사이(하로전) 영산전, 극락전, 약사전 전각마다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만세루에는 없었다. 학교 건물에는 환자들이 없었고 학생들만 있었다. 스님들은 군인들이 사용 안 하는 법당에 있었다. 환자들이 있는 곳에는 학생들을 애들 취급해 일절 출입을 금지했다. 50미터 근처에 오지 말라 했다. 애들은 도움 되는 것이 없어서. 밤 12시 사이에 등교해서 죽은 사람들을 들것에 실어 선자바위까지 갔다. 군인들은 M1 소총에 착검을 하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화장장에 가서 태우고 가족에게 보냈다. 취운암에는 군인이 없었다. 취운암은 당시 울산, 울주, 밀양 출신 학생들 기숙사였다.”


마을 주변 일을 가장 많이 기억하는 김학조(1933년, 입학 2회, 졸업 3회) 어른은 1950년 8월 학도병으로 경주 안강에 갔다가 돌아온 후 1951년 7월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징집돼 군대에 갔다. 


“통도사에 ‘31 육군 정양원’이 2년 동안 있었다. 취운암을 학생들 기숙사로 사용해서 방이 많아 환자를 그곳에 수용했다. 통도사는 병원과 사무실로 사용했다. 병원인 통도사 안에 학생들 출입을 금지했다. 위생병들이 시체만 들고 나가는 거만 안다. 시신을 들것으로 가져와 학교 앞에서 차에 실어 통도사 화장장에서 가서 나무로 태웠다. 땅에 뿌리고 물에 태웠다. 일반인은 병원에 일을 안 했다. 당시 학생들이 5명씩 돌아가면서 당번을 했었다. 학생은 300여 명이 있었다. 당시 하북면에 강릉, 묵호, 속초 등에서 온 피난민들이 있었다.”


성천마을에 사는 3회 졸업생(1948.7.1~1951.7.7)인 김두형(1934년생) 어른은 학교에 병원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1950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통도사에 ‘31 육군 정양원’이 있었다. 현재 성보박물관이 보광중학교였는데, 학교 교실을 환자들이 차지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환자들에게 교실을 빼앗긴 학생들은 통도사의 만세루, 명월료 등에서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법당에서 했기 때문에 절 안에서 환자들을 본 적이 없다. 취운암에는 기숙사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 한 반에 40~60명이 있었다. 그래서 법당마다 반이 달랐다. 그런데 상인 군인들 일부는 신평마을에 돌아다녔고, 그중에는 결혼한 사람도 있었다.” 


보광중학교 4회 출신(3년제, 1949.9.1~1952.3.23)으로 하북면장과 양산문화원 부원장을 지낸 류득원 어른과는 전화 통화를 했다. 


“통도사에 ‘31 육군병원 제2분동’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박물관 자리인 학교에 어느 날 갑자기 군인들이 와서 환자들이 꽉 차서 학생들은 보광전, 감로당 등에서 공부를 했다. 절 법당 안에는 전부 환자들이 있었다. 의사들 있었던 본부 자리는 기억이 안 난다. 취운암에는 안 가봐서 모르는데, 그곳에는 환자들이 없었을 것이다. 통도사에만 환자들이 있었다. 통도사에서 무풍교까지 함안에서 온 피난민들이 하천에 수천 명이 있었다.”


평산마을에 사는 박진혁 도예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던 할아버지가 팔을 다쳐 통도사 병원에서 치료했고, 당시 시집온 할머니로부터 통도사와 취운암에 병원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보광중학교 졸업생의 증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31 육군 정양원’, ‘31 육군병원 분원’ 또는 ‘31 육군병원 제2분동’이 있었다. 병원 건물은 학교 건물과 암자, 통도사 세 군데에 있었다. 아마도 전쟁 초기에는 통도사에만 있다가 환자가 많아져서 암자와 학교에까지 환자를 수용한 듯하다. 환자들의 시신은 들것으로 옮겨 선자바위에서 차량으로 싣고 가서 현재의 다비장에서 화장했다. 학생들은 환자와 접근하지 못 하도록 통제를 받았다. 스님들은 군인들이 사용 안 하는 법당에 있었다. 전쟁 중인 영축산에는 빨치산이 있어 학생들은 죽창을 들고 경비를 서고 토벌하러 가기도 했다. 일부 상이군인은 마을의 여자와 결혼했다.
 

▲ 보광중학교 졸업생 김두형(3회, 1934년생)과 안정철(2회, 1932년생)


통도사 노스님들의 증언

현재 통도사에 있는 스님 중에 한국전쟁 당시 출가했던 분은 비로암의 원명스님이 유일하다. 다른 분들은 그 후 출가해 당시 상황을 전해 들었다. 암자에 있는 스님들의 증언을 듣고 당시 통도사에서 있던 오어사 원효암 종원스님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원명 지종스님(1936년생)은 1952년 출가한 양산시 하북면 출신이다. 경봉스님의 맏상좌로 통도사 주지와 영축총림 방장을 지냈다. 출가 후 경봉스님을 모시고 밀양 무봉사에 있었기에 전쟁 당시의 통도사 상황은 전해들은 것이다. 


“내가 알기로 당시 육군병원은 암자에는 없었고, 통도사에만 있었다. 통도사에는 당시 원주실 근처 소 마구간의 머슴들이 자는 방에 일암스님과 만암스님 두 분이 계셨다. 다른 스님들은 절에서 군인들에 의해 쫓겨났었다. 군인들이 사망하면 한꺼번에 화장터에서 태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 (나중에) 불국사에 계셨던 종원스님이 통도사에 오니 법당 마룻바닥 밑에 머리 깎아 버린 것이 엄청 많았다. 그것을 치운다고 종원스님이 죽을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 비로암 원명스님


안양암의 무애스님과 금수암의 여산스님은 당시 통도사에 일암스님과 만암스님이 계셨으며, 육군병원은 통도사 경내에만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원명스님과 무애 스님, 여산스님은 공통적으로 오어사 원효암의 종원스님이 통도사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종원스님은 1936년생으로 1950년 7월 15세 때 부산 금정사에서 출가했고, 통도사에는 1951년 여름부터 1953년까지 있었다. 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있었던 유일한 생존자다. 스님과는 전화 통화를 두 번 했다. 


“출가할 때인 1950년 부산 온천장의 큰집들은 전부 병원으로 사용했다. 범어사에는 군인들 유골을 모아 위령제를 지내고, 금정사 군인 천막에는 유골함들을 넣어 뒀다. 통도사에 오니 군인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와서 보니 보광중학교와 통도사 전체가 병원이었다. 암자는 안양암과 취운암이 병원으로 사용됐다. 비구니가 있었던 보타암에는 환자가 없었다. 안양암에서는 정원스님과 겨울 한 철 보내기도 했다.

 

▲ 금수암 여산스님


통도사에는 노전(현 설법전)과 별당(현 보광전),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법당에 환자들이 있었다. 나한전에는 중환자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 군인들이 누워 자고 축담에는 오줌통을 뒀다. 겨울에 난로를 피우고 해서 명부전 앞쪽 끝이 그슬러 있었다. 군인들은 부처님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당시 병원장은 탑당(주지실)을 사용했다. 보광전에 폭탄(종)을 걸어놓고 신평마을에서 밤에 40여 명이 와서 빙 둘러 보초를 서고, 군인들은 남산(5층 사리탑)과 안양암 꼭대기에 보초를 서고 뭔가 움직이면 총을 쏘고 했다.


당시 노전에 구하스님이 자운스님을 초청해 지관, 보일, 종현, 대관, 종원스님 등 7~8명이 있었다. 스님들은 노전과 별당, 대웅전을 사용했다. 별당에는 구하스님이 계셨다. 경봉스님은 낮에는 극락암에 갔다가 저녁이 되면 신평마을로 내려오셨다.


군인 철수 후 다 정리되고 난 뒤에 다시 들어갔다. 내원사에 일암스님, 현칙스님, 월산스님이 있었다. 통도사 강원에 학인이 30여 명 있었다. 당시 김말복 스님이 양식을 대줄 테니 공부를 하거라 했다. 나중에 정화 운동한다고 20여 명이 서울로 떠났다. 내가 통도사에서 마지막으로 떠났는데, 1953년 운허스님을 모시고 연화사로 갔다.”


종원스님은 지금의 설법전에 텃밭이 있었고, 전나무가 두 그루 개울가에 있었으며, 화장실이 있었다고 한다. 탑광실을 비롯해 스님들은 주로 상로전에 있었기에 실상 군인들이 있었던 중로전과 하로전은 출입을 못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웅전이 상로전과 가까이 있었기에 명부전과 응진전에 환자들이 즐비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통도사에 있었거나 당시 소식을 들은 스님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시기에 통도사와 보광중학교에 육군병원이 있었다. 대웅전과 노전, 별당을 제외한 모든 전각에는 환자들이 있었다. 통도사 인근의 취운암과 사명암에 환자들이 있었지만, 비구니가 있었던 보타암에는 없었다. 당시 통도사와 학교, 암자는 상이군인 환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수행도량인 사찰의 기능은 사라지고 피비린내와 앓는 소리로 가득한 병원이 됐다. 하지만 일부 스님들은 통도사에서 정진 수행했고 탄허택성스님(1913~1983)은 백련암에 강원을 개설했다. 전쟁 중이었기에 통도사는 육군병원 업무에 협조했다.

통도사에 최소 1600여 명의 상이군인들이 있었다

1951년 10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31 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에 정양 중인 장병들에게 양말 1600족을 전달했다. 또 1951년 12월 통도사 31 육군병원의 환자와 군인 등 2000여 명을 원호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양산 부인회에서 했으며, 또 양산의 (보광)중학교 여학생이 2시간 동안 음악 위문 공연을 했다. 그리고 용화전 연기문에는 3000여 명이 있었다. 이런 기록을 감안한다면 통도사에 있었던 군인들은 800명에서 3000명이다. 엄청난 인원이 아닐 수 없다. 

 

▲ 통도사 상이군인 위문활동, 동아일보 195.12.29 보도


그런데 통도사 경내에 점점 환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수행도량이 사찰의 기능은 사라지고 피비린내와 앓는 소리로 가득한 병원이 됐다. 학생들도 수업을 점점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환자들이 돌아다니며 사찰의 많은 부분을 훼손시켰다. 이 무렵 통도사에 전해오던 다수의 불상, 경판, 문헌 등 성보문화재가 혼란 속에 유실되거나 훼손됐다. 현재 통도사 전각의 내외벽화 중에서 사람 키 높이의 벽화는 훼손돼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당시 상이군인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벽면에 낙서한 탓일 수 있다. 사찰을 떠난 스님도 있었지만, 부상병 치료를 도운 스님도 있었다. 


용화전 연기문에서 보듯이 3000여 명이 있었던 통도사 정양원이 “퇴거 후 사찰 각 법당, 각 요사(寮舍), 각 암자, 전부 퇴패(頹敗, 무너지고 깨짐)는 불가형언중(不可形言中,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의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 이는 “용화전 미륵불이 영위파손(永位破損, 영원히 파괴)되야 불가견여(不可見餘, 못 볼 지경)”라는 연기문 내용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1952년 10월 정부는 전국에 10개의 정양원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 시기 이전인 1952년 4월에 통도사에서 정양원이 철수했다.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은 “육군병원이 철수한 뒤에 운허, 자운, 영암, 무불, 대휘스님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스님이 피난을 와서 정진하며 지냈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통도사 복구에 나섰다. 용화전도 그래서 그때 불사했다. 또 사천왕문의 천왕상은 통도사를 육군병원으로 사용하면서 군인들이 함부로 해 보수해야 했다. 당시 불모로 유명한 석정스님은 수안스님 등 제자들과 함께 통도사 사천왕문을 함께 보수했다. 


용화전의 복장유물, 당시의 신문보도 그리고 대광명전의 그림과 문자 낙서, 마을 주민과 스님의 증언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육군병원 정양원이 있었음이 분명히 밝혀졌다. 2020년 통도사 개산 1375년과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이해 통도사가 호국사찰이었음이 밝혀진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이병길 시인, 양산 보광중학교 교사, 울산민예총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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