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투의 전초전 세성산 전투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3-27 11: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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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동학농민군의 배치 완료와 공주 진격

논산에서 전봉준과 손병희가 결집해 단일 대오를 형성한 후 전봉준과 손병희는 일본군과 관군에 대응하기 위해 호남과 호서의 동학농민군을 다시 배치했다. 먼저 북쪽으로 김복용(金福用)이 지휘하는 4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천안의 세성산(細城山)에 주둔시켰다. 김복용의 세성산 주둔은 일본군과 관군의 남하를 저지함과 동시에 서울로 향하는 전봉준・손병희 연합부대의 북상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박덕칠(朴德七)과 박인호(朴寅浩)가 지휘하는 7천 명의 동학농민군은 홍주・예산 방면에 주둔시켰다. 이들 동학농민군은 해안의 평야 지대를 따라 일본군과 관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최한주(崔漢柱)가 지휘하는 1만 명의 동학농민군을 순천・여수・하동의 화개에 배치했는데 이는 일본군의 남해안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손화중과 최경선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은 광주와 나주 일대에 배치해 일본군과 관군의 후방으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고 호남의 집강소 체제를 유지하면서 유생들이 조직한 민보군에 대항할 수 있도록 했다.


동학농민군의 주력인 전봉준 휘하의 2만 명과 손병희 휘하의 1만 명 등 총 3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최종 목표지인 서울로의 북상을 위해 우선 충청도의 수도인 공주(公州)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단 공주를 점령하면 서울까지는 높은 산이 없어 진격에 용이하기 때문에 공주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렇게 공주를 점령한 뒤 김개남이 지휘하는 8천여 동학농민군이 뒤이어 북상하면서 동학농민군의 후원을 맡는 것이 동학농민군의 작전이었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의 배치가 완료된 후 1894년 10월 21일 연합 동학농민군은 드디어 공주 공략을 위한 장도에 올랐다.

서울 진격을 위한 요충지 세성산성(細城山城)

세성산은 현재 천안시 목천면과 병천면⋅성남면 사이에 위치한 해발 180m의 그리 높지 않은 야산이다. 그러나 세성산은 주변 지역을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교통로 옆에 위치해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백제시대부터 중요시됐다. 특히 북쪽은 절벽을 이루고 남쪽은 원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데다, 산 정상에는 길이 144m, 높이 3m의 내성과 길이 350m, 높이 3m 외성, 그리고 길이 412m, 폭 5m의 보루가 있어 병력이 머무르기에도 적당했다.

 
세성산은 충청도 목천(木川) 동학도들이 관할하고 있었다. 목천은 일찍부터 동학이 전파됐던 곳으로 해월이 1883년 계미판 <동경대전>을 이곳 김은경(金殷卿)의 집에서 간행할 정도로 교세가 왕성했다. 1892년부터 1893년에 걸쳐 진행된 교조신원운동에서 목천대접주 김용희(金鏞熙)와 김성지(金成之), 천안대접주의 김화성(金化成) 등 ‘동학삼로(東學三老)’라 불리는 이 지역의 대접주들은 동학도들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894년 3월 동학혁명이 본격화되자 충청도의 동학도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내려가 합세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목천의 동학도들도 일부 포함될 정도였다. 충청도의 동학도들이 동학혁명에 본격 참여하게 되는 것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였다. 7월에 충청도 전역의 동학농민군이 기포할 때 목천에서도 기포했다. 7월 15일경에 해월은 충청도 일대의 집강을 임명했는데 이때 목천의 집강으로 김형식(金灐植)을 임명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호서선무사(湖西宣撫使) 정경원과 충청감사 이헌영에게 충청도에서도 전라도와 마찬가지로 선무책을 쓰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충청도의 동학농민군들도 집강소를 설치해 활동했고 목천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왕성했다. 이는 일본군의 기록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동학당(東學黨)이 다시 발동하여 극심하게 휘젓고 돌아다니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학도 중 두령이 되어 있는 사람 중에 김형식(金瀅植)⋅김용희(金鏞喜) 두 사람은 직산⋅평택⋅목천⋅천안 등 여러 곳을 활거하고 있습니다. 김용희⋅김구섭(金九燮)은 현재 목천에 살고, 안교서(安敎西)는 온양이라는 곳에 살고, 홍승업(洪承業)은 천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천안 군민 중 십중팔구는 동학당에 가맹하고 있고 더욱더 성대해 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1894년 8월 들어 목천과 천안에서는 김형식, 김용희, 김구섭, 안교서, 홍승업 등이 중심이 되어 동학농민군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며, 천안군민의 십중팔구가 동학당에 들어가 있을 정도로 이 지역의 동학 세력이 컸다고 일본군은 파악하고 있었다. 이처럼 천안군민들의 동학에 대한 큰 호응은 일본과 개화파 정부에 대한 극렬한 반감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의 목천 기포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김복용(金福用)과 이희인(李熙人)이었다. 이들은 9월 18일 해월의 명령으로 기포해 세성산을 점거했다.


김복용 등 목천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세성산에 진을 친 것은 장차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북상할 계획이었을 뿐 아니라,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의 동학농민군 역시 일본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세성산은 지정학적 위치상 동학농민군 진영의 최북단에 있었고 서울과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관군과 일본군에는 위협이 되었다.  

 

▲ 세성산성. 김복용이 이끌던 4천 명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10월 21일 이두황의 장위영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끝내 패배했다. 이 전투로 동학농민군 370여 명이 전사했고 서울 진격의 교두보를 상실해 동학농민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출처: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우금치 전투의 전초전인 세성산 전투

세성산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인 부대는 이두황의 장위영군이었다. 이두황의 부대는 9월 20일 서울을 출발해 경기도 죽산(竹山)에 머물면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다. 10월 1일 양호순무영으로부터 청주성이 위험하니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두황은 동학농민군이 괴산과 보은 쪽으로 이동한 후인 10월 12일 청주에 도착했다. 청주에서 합류한 이두황 부대와 성하영의 경리청군은 충청도 동학의 근거지인 보은 장내리를 초토화시켰다. 이두황은 보은 장내리로 들어가면서 동학접주와 동학문서를 소지한 12명의 목을 자르고 장내리로 들어와 초막 400여 채와 민가 수백 호를 모두 불태웠다.

 
장내리를 쑥대밭으로 만든 이두황과 성하영의 부대는 10월 16일 회인(懷仁)에 도착했다. 공주의 충청감영과 청주병영에서는 이두황에게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해 오니 공주로 급히 오라는 급보를 각각 보냈다. 전보를 받고 공주로 가기 위해 출발한 이두황은 문의(文義)와 부강(芙江)을 거쳐 18일 연기(燕岐) 봉암동에 도착했다. 이두황의 부대는 충청감영의 지시에 따라 청주병영군과 합세해 유성(儒城)에 집결해 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10월 20일 이두황의 부대는 공주 충청감영을 지원하기 위해 연기 봉암동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청주병영으로부터 목천의 세성산으로 이동하라는 전령이 왔다. 청주병영군이 세성산을 점거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이튿날인 21일 출정해 목천 북면의 양지리(陽地里)에 주둔할 것이니 속히 합세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두황은 충청감사의 지원 요청을 무시하고 청주병영의 제안을 수용해 공주로의 행군을 멈추고 10월 20일 아침 목천 세성산으로 진로를 바꿨다.

 

▲ 이두황.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공로로 공훈을 받고 승승장구한 이두황은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등 반민족행위의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라북도장관을 맡아 친일에 앞장섰다.(출처: 고 설악 이두황옹 추회록)


이두황이 양호순무영과 충청감영의 사전 허락도 받지 않고 청주병영의 지시에 따라 목천 세성산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이유는 목천 동학농민군이 공주와 청주 사이에 집결해 있어 앞으로 큰 우려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는 세성산의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통하는 길을 막고 있어 선봉진의 앞길에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선 서울과 가까운 적을 격파해 협공을 피하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논산, 동쪽으로는 유구, 서쪽으로는 홍주, 북쪽으로는 목천 세성산 등지에 대규모로 진을 치고 있었다.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 1개 중대 병력은 10월 20일 저녁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의 송정리(松亭里)에 있었던 정지완(鄭志完)의 집에 진을 쳤다. 다음날 21일 아침 7시경 이두황의 부대는 현 천안시 수신면 장명동(長明洞)에 있는 홍가유(洪嘉裕)의 집으로 이동해 동학농민군의 동태와 세성산의 지형을 정탐했다.


이두황은 장위영군만으로 세성산 전투에 임했다. 동학농민군의 상황을 파악한 이두황은 오전 9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두황의 부대는 먼저 동북쪽 토산(土山) 위에 주둔한 뒤 대오를 정비한 후 본격적인 공격을 전개했다. 1개 소대는 계속 토산 위에 주둔시키고, 1개 소대는 세성산 동남쪽 산기슭으로 총을 쏘면서 정상으로 공격하게 하고, 2개 소대는 세성산 북쪽 산기슭 밑에 매복시켜 놓았다.


동학농민군 4천여 명은 둘레가 10리 정도 되는 세성산 정상부 토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들은 깃발을 숲처럼 꽂아 놓고 성 주변에 둘러서서 총을 쏘며 무력시위를 하면서 장위영군에 대항했다. 동남쪽의 산기슭으로 올라오는 이두황의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동학농민군은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끝내 장위영군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오후 5시를 넘기자 대항하던 동학농민군들은 이두황 부대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성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후퇴했다. 동남쪽 산기슭으로 올라간 이두황 부대는 결국 성을 차지했다. 동학농민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세상산성이 이렇게 관군에게 무너져버렸다.

 

▲ 이두황의 세성산 전투 보고서


세성산성을 차지한 이두황 부대는 동학농민군들이 버리고 간 깃발을 비롯해 총, 창, 징, 북, 나팔, 곤장, 전립, 바라, 칼, 가마솥, 세발, 쌀, 조, 땔나무 등을 거두어 모았는데, 쌓인 것이 산더미 같았다. 또 풀 움막 50군데가 있었다. 이렇게 세성산 정상을 차지한 이두황은 북쪽에 매복해 있던 부대로 하여금 퇴각한 동학농민군을 10리 정도 추격해 사살하거나 생포하도록 했다. 이때 사로잡은 동학농민군 중 이복길(李福吉) 등 10명은 그 자리에서 처형했고, 세성산의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대접주 김복용은 생포해 진영으로 압송했다.


이두황의 전투보고서에는 세성산에서 조총 140정과 화살촉 2000개 등 많은 무기와 백미 266섬 등의 군량을 획득했다고 했다. 동학농민군이 이처럼 많은 무기와 식량을 세성산에 쌓았던 것은 그만큼 세성산이 중요했고, 이곳을 꼭 사수하겠다는 결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동학농민군은 정규부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세성산 전투의 패배는 동학농민군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들이 세성산에 쌓아두었던 무기와 식량은 통위영군과 청주병영 등지로 보내져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용도로 다시 사용됐다.

 

▲ 세성산의 동학농민군 위령비. 마을 주민들과 농민단체가 주관해 매년 이곳에서 세성산 전투 합동 위령제가 거행된다.

세성산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은 많게는 전사 370명, 중상자 770명, 포로가 17명에 이르렀다. 이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의 시신은 세성산에 버려졌고 북쪽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 동학농민군 또한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동경대전을 간행한 김은경의 집을 포함한 접주들의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이두황은 10월 26일 공주로 출발하기 전에 체포한 동학농민군 지도부 14명을 제외하고 모두 목을 잘라 처형했다. 세성산에서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공주 유구의 동학농민군에 합세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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