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여성이 주도하는 세상 될 것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8-30 11: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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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에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나올 것

해월이 치악산 아래 수레너미에서 김연국・손천민・손병희의 ‘삼암(三菴)’에게 교단의 사무를 관장하게 했던 1896년 초에 호남의 도인인 박치경(朴致景), 허진(許鎭), 장경화(張景化), 조동현(趙東賢), 양기용(梁琦容) 등이 수레너미까지 해월을 찾아왔다. 동학혁명이 실패한 후 해월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불안했던 도인들이 해월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천 리 길을 달려왔다. 이 가운데 박치경은 호남 동학의 핵심인물인 박치경(朴致卿)과는 다른 사람으로 해월이 체포당해 경무청에 수감돼 있을 때 재산을 팔아 해월의 식비를 조달했던 인물이다. 장경화와 허진은 옥구 동학도를 이끌고 동학혁명에 참전했다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장경화는 옥구대접주로 교조신원운동에도 참여했다. 동학혁명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도인들은 해월의 소식을 접하고 강원도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스승을 찾아뵙고 동학혁명 이후 어려운 상황에 놓인 동학을 중흥시킬 방안을 논의했다. 이때부터 수레너미로 각지의 도인들이 찾아 왕래가 이루어졌다. 


해월은 이 시기 수레너미를 찾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 운수(運數)를 아느냐? 이 무극(無極)의 운수에 요순공맹(堯舜孔孟)과 같은 인재가 많이 날 것이니 누구든지 요순공맹을 마음속으로 기대하며 지성껏 수도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이 당부 속에는 동학혁명 이후 힘든 상황에 놓여있는 제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는 해월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동학혁명을 천운(天運)이라고 말하며 동학혁명의 공과(功過)에 대해 시시비비하지 말고 도인들이 마음을 하나로 합하라고 강조했던 해월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제자들에게 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며 독려했다.

충주 마르택・상주 높은터 등지로 전전

2월로 접어들어 날이 풀려 눈이 녹자 해월은 수레너미를 떠나 충주 외서촌 마르택(충북 음성군 금왕읍 구계리)으로 거처를 옮겼다. 강원도의 심한 추위도 힘들었지만, 제자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관의 주목을 받게 되자 몸을 숨기기로 결정했다. 당시 마르택에는 이용구가 살고 있어 해월의 이사를 이용구가 주선했다. 손병희는 해월에게 이용구의 선행을 칭찬했다. 그러자 해월은 “사람의 한때 믿음을 과찬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마르택은 이미 동학의 근거지라는 것이 알려져서 해월은 그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한 달 만인 3월 초에 해월은 마르택을 떠나 경북 상주군 높은터로 숨어들었다. 상주 높은터는 하송리 청계사에서 계곡을 따라 약 1.2km쯤 올라간 후 오른쪽으로 꺾어 다시 1km 올라가 산봉골 골짜기에서 동쪽으로 올라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집터만 남아 있고 사람 살았던 흔적을 알 수 있는 감나무와 밤나무가 남아 있다. 높은터는 임진왜란 때부터 피난처로 알려진 곳으로 당시 화전민 몇 집이 있었다. 

 

▲ 상주 높은터. 상주 화서의 청계사에서 임도를 따라 약 2.3km 산길을 올라가면 몇 곳의 집터와 밤나무와 감나무가 있어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3월에 호남(湖南)의 도인 이병춘(李炳春)이 해월이 상주 높은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와서 일대 사방을 찾아다녔으나 실패하고 청계사(淸溪寺)에 들어가 하룻밤을 잤는데 해월이 “내 이 근처에 있노라”고 말하는 꿈을 꾸고 그 근방(近傍) 산과 계곡을 찾아 헤매다 화전민(火田民)들이 모여 사는 높은터를 찾아 해월을 만났다. 해월이 이병춘을 반가이 맞아 자초지종을 묻자 이병춘은 꿈 이야기를 했다. 이병춘의 꿈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해월은 이병춘의 도심이 깊음을 칭찬하며 “네 힘써 호남(湖南) 일을 보라”고 당부하며 동학혁명 이후 무너진 호남의 동학을 일으켜 세우는 데 앞장설 것을 부탁했다.

여성이 중심인 세상을 준비하기 위해 부인 수도를 장려

이렇게 숨어다니면서도 해월은 동학의 이념을 생활화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무렵 해월은 도인(道人) 가운데 상변(喪變)을 당했을 때 초하루와 보름마다 치성(致誠)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것은 우리 도의 전해오는 법이 아니니 앞으로는 영영 시행하지 말고 다만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하는 식고(食告)의 예(禮)에 지극한 정성으로 한울님을 봉양(奉養)하라”며 교인들이 허례를 없애고 생활 속에서 도를 실행하라고 강조했다. 동학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한울님의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한울님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곧 조상을 지극히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교의를 갖고 있어서 해월은 동학 도인들이 전통의 풍습에서 벗어나 동학의 도법을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강조했다.


해월은 또 가정에서의 수도는 부부가 화순하는 것이 으뜸인데 이를 힘쓰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부부화순(夫婦和順)을 강조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온다고 하면서 부인들의 수도를 장려했다. 그 내용은 “도인 집 부인이 혹(或) 경외지심(敬畏之心)이 있어 청수(淸水)를 받들려거든 3・7일(21일)이나 7・7일(49일) 또는 100일 등 기일을 정해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정성과 공경으로 한울님의 감응(感應)을 받도록 하라”고 부인들의 수도를 장려했다.

시천주(侍天主)의 교의에 충실해야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극심하던 지목도 조금 누그러졌다. 당시 국정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격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에서도 동학에 대한 탄압에 몰두할 수 없어 지목이 다소 느슨해졌다. 동학혁명 이후 교단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해월은 ‘삼암’으로 하여금 동학도인들이 읽어야 할 규칙을 ‘입의근통(立議謹通)’이라는 제목으로 각 지방에 보내게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선사(先師, 최제우)께서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 가서 너를 만나 성공(成功)’이라는 한울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처음으로 ‘시천여부 사인여천(侍天如父 事人如天, 한울님 모심을 부모님 모심과 같이 하고 사람을 한울님으로 섬겨라)’의 도(道)를 창명(創明) 하시니 이는 앞선 성인이 밝히지 못한 이치를 가르치심이라. 선사(先師)가 아니면 어찌 천덕(天德)을 알며, 천덕(天德)이 아니면 어찌 선사(先師)에게 강화(降話)되어 우리에게 이 법(法)을 가르쳤으리오. 대개 사람의 행주좌와(行住坐臥) 의복음식(衣服飮食)이 천덕사은(天德師恩) 아님이 없나니 우리 도인(道人)은 이 뜻을 체(體)하여 자포자기(自暴自棄)와 자긍자존(自矜自尊) 하는 마음을 일절 끊어버리고 시천봉사(侍天奉師)의 대의(大義)를 밝히라.

해월은 동학혁명 이후 교단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우선 수운이 가르친 동학의 교의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월은 교도들이 한울님의 덕과 수운 최제우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게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시천주를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신앙심을 키우기 위해서 자기만이 최고라고 하는 자긍심을 버리고, 또 중간에 도를 버리는 것도 일절 끊고 포덕광제의 대의를 위해 매진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동학의 입교 전통인 스승과 제자가 서로 도를 주고받는 사사상수(師師相受)를 중요시하고 서로 뜻이 맞는 교도들끼리 따로 조직을 만드는 것을 삼가라고 타일렀다. 이는 동학교도들이 많아지면서 30년간 유지되어 오던 동학의 전통을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해월(海月) 인장으로 도첩 수여

해월은 상주 높은터가 너무 외진 산골이라서 가족들이 생활하기 힘들어하자 다시 충주 외서촌(外西村)으로 옮겼다. 이 시기부터 해월은 각지의 두령(頭領)을 임명할 때 첩장(帖狀)에 해월(海月)이라는 인장을 사용했다. 그러나 외서촌에 오래 있을 수 없어 해월은 4월 들어 외서촌에서 음성군(陰城郡) 창곡(倉谷, 음성군 원남면 동음리)으로 집을 옮겼다. 창곡으로 옮긴 해월은 ‘삼암(三菴)’의 이름으로 성(誠)・경(敬)・신(信)으로서 수련(修煉)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고 경통(敬通)을 각지에 보냈다. 경통에서 해월은 “우리 도(道)의 종지(宗旨)는 많은 말이 필요(必要) 없는지라 모두 성경신(誠敬信) 삼단(三端)에 있다는 뜻은 전후(前後) 통시(通示)하였을 뿐 아니라 거듭 반복(反復)하였으되 다만 입으로만 성경신(誠敬信)을 말하고 마음으로는 성경신(誠敬信)을 어기면 이것을 가(可)히 성경신(誠敬信)이라고 이르겠는가”라고 하면서 성경신에 충실한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 해월(海月) 인장. 해월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는 이 인장은 동학혁명 이후 해월이 직접 만들어 1896년부터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성경신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특히 주문 수행을 강조했는데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은 근본(根本)이오,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는 단련(鍛鍊)이니 먼저 근본(根本)을 힘쓰고 다음에 단련(鍛鍊)을 힘쓸 것”이라고 하면서 열세자 주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공부할 수 있도록 수행법을 일러주었다. 또한, 도인들에게 “어육주초(魚肉酒草)는 도시(都是) 기운을 상(傷)하는 것이라 그러나 물고기와 담배는 아직 권도(權道)로 행(行)하고 술과 고기는 일절 엄금(嚴禁)할 것”이라고 해 수행할 때 술과 고기를 일절 금하라고 했다.

 

▲ 음성군 창곡마을. 해월이 충주 외서촌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이곳 음성군 창곡에 와서 은거했다. 충추 외서촌 보뜰이 있는 도청리와는 약 10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 해월은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느니라. 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그 생성을 돕고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造化)를 나타내는 것이니라. 사람의 호흡(呼吸)과 동정(動靜)과 굴신(屈伸)과 의식(衣食)은 다 한울님 조화의 힘이니, 한울님과 사람이 서로 화하는 기틀은 잠깐이라도 떨어지지 못할 것이니라”라는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내렸다. 통상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으로 잘 알려진 이 글은 해월의 동학 이해를 가장 잘 보여준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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