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국가보안법과 보도연맹, 이관술의 고향 입암마을도 비켜 가지 못해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8)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4-06 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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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제14연대부터 시작된 집단항명과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구성된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는 10월 25일 기점으로 여수와 순천을 차례로 점령했다. 이미 봉기에 참여한 14연대 부대원 뿐 아니라 동조한 좌익세력들은 진압군을 피해 산악 지역으로 후퇴한 상황이었다.


진압군은 후퇴한 병력을 추격하는 동시에 여수 순천 지역에 남아있는 전 시민을 학교 운동장 등에 집결시켰다. 이유는 ‘반란군’에 협력한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색출기준은 모호하거나 억지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 무고한 인민들이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심지어 검사와 학교 교장 등 우익인사들도 사살되거나 실종된다.
 

▲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 당시 <라이프> 특파원 칼 마이던스가 찍은 사진. 사진 속 미군은 군사고문단원인 랠프 블리스 소령이다.

여‧순사건 직후, 제주는 계엄령 아래 ‘초토화’ 학상

10월 25일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이 발효된 이후 진압군의 부역자 색출은 12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계엄령에 따라 군법재판이 열렸고 체포된 민간인들도 재판에 회부됐다. 이승만 정부 조사에 따르면 1949년 1월 10일까지 인명피해는 총 5,500 여명이었는데 그중 사망과 실종을 합하면 4,474명에 이르렀다. 실제 사망한 숫자는 정부 발표의 두 배를 넘을 것이란 연구결과도 있다.


더 큰 피해는 제주로 이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2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주로 유격대와 국군간의 격돌과정에서 젊은 남성들이었지만, 계엄령 이후에는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았다. 여순 지역 계엄령과 마찬가지로 제주도 계엄령은 무차별 살상을 정당화시키는 장치로 사용됐다.


제주도는 계엄령에 앞서 이미 주둔한 9연대 송요찬 연대장 이름의 포고문(1948.10.2.)으로 해안선에서 5km 내륙으로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로 간주해 총살에 처할 것을 경고한 바 있었다. 거기에 계엄령이 발효된 이후에는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빌미로 대량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명분은 중산간 지대에 남아있는 민간인은 모두 유격대에 편의를 제공하고 협조하고 있기 때문에 ‘초토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초토화 작전은 1949년 3월까지 집중적으로 진행됐다. 제주 4.3평화재단의 아카이브 자료를 보면 1948~9년에 학살된 희생자 숫자는 2만 5천명에서 3만 여 명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1948년 9월까지 희생된 이들의 수가 약 1천 여 명인 것을 감안하면, 초토화 작전 때 자행된 학살이 얼마나 잔혹한 참상이었는지 보여준다.
 

▲ 1948년 11월 30일 <조선일보>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

이승만 정부의 군대숙청과 친일파 활개

제주도에서 계엄령 아래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이승만 정부는 군대 내에 남로당계를 비롯해 사회주의 계열이 다수 포진해 있다고 판단하고 ‘좌익색출’에 나섰다. 이는 여‧순 지역을 점령 한 뒤 국군 최상부에서 나온 계획의 일환이었다.


군대 내부의 좌익 숙청은 정부 수립 이전부터 진행됐지만, 대규모로 벌어진 것은 여‧순사건이 그 크기를 키우고 속도를 빠르게 진행하게 만든 것이다. 먼저 여‧순사건 관련 숙군으로 재판을 받은 군인은 2,817명이었고 이 중 41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무기징역은 563명이었다.


계속된 숙군은 1949년 7월까지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그 기간에 파면된 장료는 242명이었고, 불명예 제대한 사병 숫자는 4,133명이었다. 이는 미군정에서 이승만정부로 넘어갈 때 국군 규모를 10만 명 미만으로 한계를 그었기 때문에 약 5%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숙군으로 빚어진 또 다른 현상으로 미군정 시기 친일파와 부역자가 장악한 경찰에 이어, 군대마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모든 요직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경찰은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을 때 습격사건을 일으킬 만큼 친일파의 온상이었다. 그리고 반민특위에 체포되고 기소됐던 친일경찰 출신들은 이승만 정부의 비호아래 석방된 후 국군으로 옮기는 일도 벌어졌다.
 

▲ 1948년 10월 29일 <경향신문> 숙군 필요성 통감

반민주 악법 논란에도 국가보안법 제정

이승만 정부의 ‘좌익척결’은 당연히 군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 “국가보안법”의 제정으로 이어지면서 전 방위로 확대된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11월 9일 정부에서 만든 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제출됐다. 여‧순사건 이전에 발의됐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을 수정해서 만든 안이었다.


국회 본회의에서 많은 의원들이 이 법안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법조들 중에서도 이 법이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에 버금가는 반민주악법이 될 수 있다며 경계와 우려 섞인 비판을 했다. 11월 20일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비판의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당시 국회에서 나온 반대의견을 보면 중도와 우익을 가리지 않고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회의원 김옥주는 “우리는 그 (여순) 사건에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민중이 다수 뇌동되었다는 것을 간과 할 수 없다. 이 사실의 원인은 과거 사십년간의 억압정책과 그 뒤를 잇는 군정 삼년의 경찰탄압의 원성이 민중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태를 빚어내게 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위정자는 민중으로 하여금 모략에 빠지지 않도록 선도 계몽하여야 할 것이오. 민주주의에 벗어나는 강압정책으로 독재국가의 전철을 밟으려는 이런 법안을 최고입법기관에서 논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노일환은 “위정자는 위대한 정치력과 덕망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할 것인데 강압적인 법률로써 민중을 탄압하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공산당에지지 않는 위대한 민주주의 이론을 가지고 좌익에 대항하여야 한다. 만약 법이 통과된다면 수많은 애국자가 불순한 도배의 손에 쓸어질 것을 알아야 한다.”


신성균은 “우리는 이 법을 제정하지 않아도 헌법과 현행법으로서 얼마든지 좌익과 폭동을 탄압할 수 있다. 이 법을 만드는 것은 헌법정신에 비추어 모순이다.”


서용길은 “아직까지 법이 없어서 통일이 안 되고 반란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옛날 진시황은 만권의 가법을 가지고도 이세에 망하고, 한고조는 약법 삼장으로 중원을 수습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회의원 중 50여명의 동의로 국가보안법 폐기제안에 제출됐지만 부결된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의 압박과 여당 의원들의 강행으로 각 조 별로 표결에 붙여 결국 11월 19일 사실상 통과로 의결되고 12월 1일에 대통령 서명과 함께 즉시 공포됐다.

국가보안법은 많은 사람들의 우려대로 좌익은 물론이고 이승만 정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잡아들이거나 탄압하는 무기가 됐다. 교육부분은 1948년 12월 겨울 방학을 앞두고 문교부장관 이름으로 전국 교원의 자격 심사를 진행한다. 자격심사를 하는 이유는 ‘무자격교사’를 가려내겠다는 것도 있지만, 특별히 중점사항으로 “고원의 정치적 배경” 유무에 관한 사항을 신중히 고려해 심사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문교부는 예술계에 대한 사상검열도 시작한다. 문교부 예술과는 1948년 12월 15일부터 극장 흥행허가를 주관하면서 연극 각본의 검열을 시작했고, 영화정책의 방향도 새롭게 제시한다. 이른바 ‘문화인의 진정한 여론 환기와 민족정신의 앙양’이란 말로 통제에 들어갔다.


이런 점은 국가보안법의 해석과 운용의 핵심이 사상범과 그 용의자에 대한 사전 사찰제도의 확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초를 만든 사상검사 오제도는 1948년 12월 27일에 열린 전국검찰감독관 회의에 제출한 자료에 “공산주의에 대한 감염을 예방하고 반국가분자를 뿌리 뽑기 위해 엄벌주의”와 동시에 “사상의 시정으로 공산당이 공산당을 때려잡는 반공전위대로 내세울 수 있는 교화전향운동”을 강조했다.


급기야 1949년 5월에는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에 이른다. 먼저 국회 소장파에 속한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가 체포됐고 이어 6월에는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해 노일환, 김옥주를 포함해 12명이 추가로 체포된다. 이중 13명이 ‘남로당 프락치’라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체포된 국회의원들은 모두 국가보안법이 헌법과 충돌하고 위법하기 때문에 법안의 폐기를 주장한바 있었다.
 

▲ 1948년 11월 20일 <대동신문> 국가보안법 전문

 

▲ 1948년 11월 24일 <독립신문> 국가보안법이란 무엇?

 

▲ 1949년 6월 23일 <경향신문> 국회의원에 검거선풍,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헌병에 피체

형무소에 넘쳐나는 사상범, 국민보도연맹 결성으로 해소

국가보안법은 그렇게 일제강점기 보안법이나 치안유지법과 마찬가지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체포와 검거 그리고 투옥으로 이어졌다. 1949년 4월 30일까지 사상범으로 체포된 숫자는 약 9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중 6만 여명이 기소되거나 헌병대에 송치됐는데 80% 이상이 유죄선고를 받는다. 1948년 12월 말만 따져 봐도 전국 형무소의 수용 능력( 15,000명)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 4만 명이 이른바 좌익혐의자인 사상범으로 채워진 것이다.


“국가보안법실무제요”를 마련했던 사상검사 오제도는 남로당을 비롯해 “해방 직후 좌익단체인 조선노동종합전국평의회,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조선교육자동맹, 조선민주학생연맹, 전국농민연맹,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조선협동조합중앙연맹 등의 결사 기타 상기 결상에 가입한 산하단체 또는 단체의 재건 준비와 지원단체”를 모두 국가보안법 1조에 따른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사실상 우익단체를 빼놓고 보면 모두 국가보안법의 처벌대상이 되었고, 이 단체를 탈퇴하지 않은 자는 사전 검열과 체포의 대상이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늘어나면서 검찰과 경찰은 모든 이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전향자 조직을 설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1949년 4월 20일 창립한 국민보도연맹이다.


국가보안법도 1949년 12월 19일 개정을 통해 전향자에 대해 ‘선고유예’와 ‘보도구금’을 할 수 있다는 항목을 추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은 일제강점기 “사상보국연맹”이나 “대화숙”과 같은 사상전향단체와 유사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와 다를 바 없는 사상탄압과 전향단체가 “국가보안법”과 “국민보도연맹”으로 완성된 이후 남한의 사회주의 계열은 합법적으로 발 디딜 곳이 사라지게 된다. 어이없는 사실은 이 틀을 설계한 이들 중 다수가 일제강점기 법원과 검찰에 뿌리를 둔 친일 부역자라는 점이다. 미군정에서 이승만정부로 넘어오는 과정에 친일, 부역자들은 활개 칠 공간을 확보할 뿐 아니라, 반대세력을 제거할 무기를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칼끝은 이관술의 고향 범서면(입암마을)을 비롯해 울산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이제 굵은 올가미가 씌워졌고 점점 단단히 조여들게 된다. 이관술의 동생 이학술과 맏사위 박동철이 국민보도연맹 가입의 1차 대상이 됐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관술과 월북한 이순금과 한 집안이라는 이유였다. 사상전향 이전에 먼저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바로 처벌과 체포를 감수해야 했다. 이런 경우는 전국에 만연했던 일이었다. 마치 집안에서 인질을 뽑아 보내듯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 1949년 4월 22일 <경향신문> 보도연맹 결성, 좌익전향자들이 준비중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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