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행하는 동학농민군 영동 용산(龍山)에서 관군 격퇴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6-28 11:5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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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해월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 충청도로 도피

무주의 설천과 월전 전투는 북행하는 해월의 호서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면서 싸운 마지막 전투였다. 호서의 동학농민군이 충청도로 넘어오자 충청도 군현에서는 이들을 저지하는 것이 가장 큰 현안으로 떠올랐다. 12월 7일 수많은 호서 동학농민군이 무주에서 옥천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양호도순무영으로 올라왔다. 가장 적극적인 옥천의 민보군은 총기포 이후 동학농민군을 주시하고 있어 충청도 진입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동학농민군의 수가 많아서 독자적으로 대적하지는 못했다. 동학농민군의 충청도 월경을 보고 받은 충청병사(忠淸兵使) 이장회(李長會)는 충청병영의 병력을 보내서 상황 파악을 지시했다. 당시 양호도순무영은 공주공방전에 참여했던 경리청 병대의 일대를 파견해 연산과 진잠 등지로 순회시키고 있었는데 이들이 북행하는 동학농민군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부대였다. 양호도순무영은 즉각 이 경리병에게 명해 호서 동학군의 북상길을 차단하도록 했다. 


영동에 들어온 동학농민군은 먼저 황간 읍내에 들어가 관아를 점령하고 보관된 물자를 탈취했다. 충청감사 박제순이 황간현감 송창노(宋昌老)의 급보를 받고 양호도순무영에 올린 보고에 황간 관아를 점령한 북행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달(12월) 초 10일에 비도 5, 6백 명이 영동에서 각자 총과 칼을 지니고 소리를 지르면서 쳐들어와서 관아의 창고를 부수고 무기와 화약과 탄환 및 계사조(癸巳條, 1893년)의 대동목(大同木) 12동 40필, 세작목(稅作木) 1동, 그리고 궁관방(宮官房)에 저장해 놓은 공전(公錢) 869냥을 의복과 함께 전부 빼앗아 갔습니다. 또한, 이방 김진률(金振律) 형제의 집에서는 매입한 계사조의 전세목(田稅木) 14동 27필, 삼수목(三手木) 3동 20필 및 공전 7백여 냥을 빼앗아 갔으며, 신흥역(新興驛)의 말 2필, 관마(官馬) 2필을 한꺼번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적도들은 다시 영동으로 갔습니다.

위의 보고를 살펴보면, 동학농민군은 대동목과 전세목 그리고 삼수목 등 면포와 의복을 주로 가져갔음을 알 수 있다. 의복과 옷감은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도피하고 있는 동학농민군에게는 꼭 필요한 물자였다. 옷감으로 몸을 두르거나 발을 감싸서 추위를 이기고 동상을 면할 수 있었다. 호서 동학농민군은 힘들게 추위를 견디며 관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있었다.

호서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경상감영군과 일본군도 가세

호서 동학농민군이 영동으로 들어오자 경상감영에서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상감영의 영관 최처규(崔處圭)가 지휘하는 165명의 남영병이 충청도로 출발했다. 김산소모영의 김응두가 지휘하는 선산포군 150명, 개령포군 95명, 인동포군 100명, 성주포군 10명이 여기에 합세했다. 이들 관군은 추풍령을 차단해서 경상도로 호서 동학농민군이 오지 못하도록 김산을 지키던 병력으로 충청도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영동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경상도 병력은 상주소모영 유격장 김석중(金奭中)이 인솔한 상주 유격병이었다. 이 부대는 상주 민보군에 용궁병과 함창병이 가세해 200명 정도로 구성돼 있었다. 김석중은 호서 동학농민군을 최법헌(崔法憲) 즉, 해월이 지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후 해월을 잡기 위한 관의 추격은 더욱 심해졌다. 


영동으로 들어온 호서 동학농민군의 토벌을 위해 경상감영과 상주소모영에서는 일본군의 출병도 요청했다. 일본군 낙동병참부의 1개 분대가 김산을 거쳐서 영동으로 접근했고, 대구병참부에서 온 미야케(三宅) 대위의 1개 분대도 영동으로 올라왔다. 충청도 황간과 영동 일대에는 구와하라 에이지로(桑原榮次郞) 소위가 지휘하던 철로실측대 호위병도 있었는데, 철로실측대는 경부철도를 부설할 노선을 측량하던 조사단으로 군로실측대라고도 불렸다. 이 호위병도 동학군 토멸을 위해 파견된 후비보병 제19대대 소속으로 11월 12일 청주성에서 김개남 부대를 공격해 패주 시킨 부대였다.
 

▲ 1872년 지방지도의 황간현 지도. 사진 위쪽 중앙 부분에 황간현 관아가 있다. 해월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은 영동에서 황간으로 들어와 관아를 점령하고 세금으로 거두어놓은 옷감과 의복을 탈취했다. 옷감과 의복은 추운 겨울에 도피하는 동학농민군에게 가장 필요한 물품이었다.
호서 동학농민군 1만 명으로 증가

영동의 민보군이 가장 먼저 호서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호서 동학농민군이 영동으로 돌아오자 그동안 활동하던 민보군 500명을 동원해서 12월 11일에 기습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사전에 제보자가 동학농민군에게 정보를 알려 대비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에 의해 쉽게 제압됐다.


전라도에서 연합 동학농민군의 주력이 무너지자 후비보병 제19대대의 미나미 소좌는 부대를 나누어 여러 지역으로 파견해 동학농민군을 토멸하라고 지시했다. 미나미는 대부분의 부대를 전라도 남단으로 내려보내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제압하도록 지침을 내렸으나, 일부 병력은 충청도로 보내 남아 있는 동학농민군을 제거하려 했다. 


호서 동학농민군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경리병 일대는 순무영 참모관 이윤철(李潤徹)이 지휘해 연산과 진잠을 순회하고 있었다. 경리병이 옥천에 이르렀을 때 호서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에서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를 수집해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고했다.

(12월) 초 10일에 옥천에 이르러 호남의 비류(匪類, 동학농민군을 낮추어 부르는 말)들이 영동에 와서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11일에는 병영의 군사 180명과 함께 행군하여 청산에서 만나 부대를 합하였으며, 12일에는 영동으로 향하였는데, 적의 무리들은 1만 명을 헤아렸습니다.

호서 동학농민군은 처음에는 1천여 명에 불과하였지만 도주하면서 흩어졌던 동학농민군이 합세해 부대의 규모가 1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커졌다. 대규모의 동학농민군이 큰 전투 없이 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지방관들의 비호와 동학 조직의 정보망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청병사 이장회는 청산과 회덕의 동학도들이 지방관과 사사롭게 통교하면서 비호를 받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지방관의 비호는 동학농민군이 항일 투쟁을 전개하자 반일감정을 가지고 호응했기 때문이다.

관리들의 도움과 정보력으로 용산에서 휴식과 전투 준비

황간 읍내에서 관아를 점령해 옷감 등을 탈취한 동학농민군은 용산으로 향했다. 황간 읍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용산에 이른다. 영동 읍내보다 황간 읍내가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호서 동학농민군은 전투를 예상하고 영동 용산으로 들어갔다. 싸울 장소로 선정한 곳이었다. 용산은 1만 명 이상의 대군이 숙영할 장소로는 좁았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지리적 이점이 많은 유리한 지형이었다. 해월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이 용산에 들어올 때까지 공주?논산?연산?전주?원평?태인?정읍?장성?임실?장수?무주?영동의 긴 거리를 이동했다. 전라도 지역은 평지였지만 우금치 패전 이후에는 험한 산길을 타야 했다. 이렇게 행군을 하고 용산에 도착한 호서 동학농민군은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기간으로 보면 10월 20일부터 12월 10일까지 약 80일의 긴 피난길이었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던 동학농민군은 먼 길을 행군하면서 전투를 벌이고 도피를 이어왔다. 


동학농민군에게는 감내하기 어려운 도피 일정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94년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고 추운 날이 이어졌다.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인 야외에서 지내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추위에도 대부분 노숙을 해야 했다. 큰 마을을 찾아 들어가 민가를 빌려 숙박한다고 해도 일부만 집안에 들어갈 수 있을 뿐이었다. 또 1만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에게 일시에 식사를 마련할만한 시설도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도 불가능했다. 영동 용산장은 동학농민군이 추위를 이기고 피로를 풀 수 있으면서 관군의 공격에도 대비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동학농민군은 용산에서 휴식과 정비를 취한 후 용산의 높은 고지를 선점하는 전술을 택했다. 고지전이 전투 경험상 가장 유용한 전술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1872년 지방지도의 영동현 지도, 지도의 오른쪽 윗부분에 용산장지(龍山場址)가 표시돼 있다. 황간읍에 들어가 옷감을 탈취한 호서 동학농민군은 용산시장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 후 용산에서 관군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용산에서 동학농민군 관군 격퇴

12월 12일의 용산전투는 호서 동학농민군과 진압군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됐다. 하나는 중앙의 경리병 등과 벌인 전투였고, 다른 하나는 상주 유격병과 벌인 전투였다. 이날 새벽에 겨울 안개가 용산 일대에 짙게 퍼진 가운데 경리병과 진남병은 정면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옥천 민보군이 측면으로 들어가 공격했다. 여러 전투를 경험한 동학농민군은 이에 대항해 웅크린 채 관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골짜기로 들어온 경리병과 진남병 그리고 옥천 민보군은 사방으로 둘러싸 포위했다. 옥천 민보군과 함께 참전한 옥천 관아의 군관 육상필이 양호도순무영에 올린 보고서에 용산 전투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 영동 용산장터. 사진 가운데 학교가 용산 장터에 세운 용문중학교다. 그리고 사진 뒤의 산이 용산의 능선이다. 동학농민군은 용산을 선점해 공격하는 관군을 격퇴시켰다.


청주 군사 200명, 경병 70명과 함께 그곳 지역으로 달려가서 우선 적진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적진은 산 위에 진을 치고 있고, 관군은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산에 있는 적들은 개미처럼 총을 사방에다 아래로 퍼부어 관군이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박정빈이 의병들에게 지시하여 서북쪽 모퉁이로 군사를 펼쳐 진을 쳐서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고 자신은 전면에 나서서 교대로 적들에게 총을 쏘게 하였더니 적들 가운데 죽은 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한쪽 길이 열려서 풀리면 관군이 한 번에 에워싸서 서로 종일토록 전투를 벌여 화약과 탄환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또한, 고립된 병사들을 가지고 끝까지 쫓아갈 수도 없어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퇴군했습니다.

용산의 서북쪽 모퉁이는 천작리와 부릉리 사이다. 관군은 평지에서 산 위에 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곳을 택했는데, 길게 늘어선 능선에 방어선이 구축돼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용산은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구불구불 돌아간 산줄기의 곳곳에 숨은 동학농민군이 대적해 공세를 펴기가 쉽지 않았다. 이 능선 뒤에는 300m 고지가 솟아있는데 관군은 이곳까지는 올라왔다. 그러나 산등성이를 차지했다고 해도 반격을 받으면 피할 곳이 없었다. “적진은 산 위에 진을 치고 있고, 관군은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산에 있는 적들은 개미처럼 총을 사방에다 아래로 퍼부어 관군이 어려운 지경”이라고 할 정도로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공격에 잘 대처했다. 경리병과 진남병이 평지에서 사격하면서 공세를 취하는 동안 박정빈이 이끄는 옥천 민보군이 서북쪽 모퉁이로 공격해 전선을 확장해 동학농민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동 동학농민군의 시선을 분산하는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진압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고지의 대병력을 맞서다가 탄환만 소비하고 후퇴했다. 

 

▲ 영동의 동학농민군 총살터. 영동의 동학농민군 총살터는 ‘영동천 건너 축령탑 자리 말채나무 거리’로 현재의 더웰 아파트 자리다. 아파트 앞 하천이 영동천이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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