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정치 상황과 울산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0-04-03 12: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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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4.19혁명 60주년을 기억하다

▲ 1958년 6월 30일자 <동아일보> 3면은 ‘울산 을구 선거무효 될 형세’, ‘속속 드러난 부정’이라는 제목으로 울산 을구 부정 투표 의혹을 크게 다뤘다. 위조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무더기로 넣은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26개 투표구 중 14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되고, 재투표가 결정됐다. 1959년 6월 23일 울산 을구 14개 투표구에서 재투표가 실시됐지만 폭력이 난무하는 부정선거가 다시 반복됐고 당락엔 변화가 없었다. ⓒ원영미 시민기자


4.19혁명의 성공과 굴절

1960년 3월 15일,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전국에서 치러졌다. 조병옥이 사망해 야당 대통령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자유당 이승만의 승리가 점쳐졌지만 장면이라는 유력한 야당 부통령 후보가 있어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민주당 대구지역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 등교를 강요하자 학생들이 거리 시위로 나서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과 공무원이 동원된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이뤄질 것이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고, 3월 15일 선거에서 예상은 현실로 드러났다. 마산 지역 민주당은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리 시위에 나섰다. 노동자와 시민이 시위에 참여했고 경찰은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것이 한국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민주화운동인 4.19혁명의 시작이었다. 


마산 시위에 나섰던 고등학생 김주열이 얼굴 정면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국민들의 분노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4월 18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끝내고 돌아가는 고려대 학생들에 대한 테러가 발생했다. 다음 날 부정선거와 테러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시위대에 시민들이 참여하며 시위 규모는 점점 커졌다. 늘어난 시위대는 대통령 직무실이 있는 경무대로 몰려갔다. 시위대가 경찰이 세워둔 바리케이드를 넘어서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쐈다. 경무대 앞에서 수십 명이 죽고 다쳤다. ‘피의 화요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부패한 권력에 대한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을 이승만 정부는 ‘빨갱이들의 배후조종’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몰아가는 동시에 부통령 선거 재투표를 시사했다. 4월 25일, ‘학생들의 피의 값에 보답하라’라는 대학교수들의 성명서 발표와 거리 시위는 잠잠해지던 시위에 다시 불을 지폈다. 다음 날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곳곳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의 동상이 시민들의 손에 파괴되기도 했다. 


과도정부가 세워지고 헌법이 개정됐으며 새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이 새로 뽑혔다. 내각책임제의 민주당 정부가 구성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국정운영은 국민들의 기대에 못 미쳤고 구체적인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저항은 다시 시작됐다. ‘데모로 하루가 시작되고, 데모로 하루가 끝나는’ 날들이 계속됐다. 1년 뒤 이를 사회적 혼란으로 인식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 군사 쿠데타의 성공으로 4.19는 ‘미완의 혁명’으로 끝이 났다.

이어지는 혁명들

일반적으로 혁명은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에서처럼 ‘사회체제의 전반적인 변화’로 이어진 역사적 사건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역사가 변화하듯 역사적 개념도 시간이 흐르면서 재해석되기도 한다. 혁명의 개념도 예외는 아니다. 4.19혁명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혁명과는 다를 수 있다. 급격한 사회체제의 변화는 없었으며 오히려 5.16 군사쿠데타의 성공과 뒤이은 군사정부의 수립, 유신체제라는 억압적인 정권, 12.12 군사쿠데타와 5공화국의 탄생과 같은 굴절을 겪었다. 하지만 억압과 부조리에 맞선 저항정신은 유신헌법철폐투쟁, 부마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그런 의미에서 4.19혁명의 정신은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4.19혁명은 대구, 마산 그리고 서울 같은 특정한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일까? 당시 울산은 어땠을까? 우리는 4.19혁명을 국가적 사건으로 인식해 울산과는 무관한 사건으로 기억해 오지는 않았나? 4.19혁명이 3.15선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건이라면 울산도 4.19혁명 상황과 무관할 수가 없다. 4.19혁명 60주년을 기념하며 울산 지역의 4.19혁명을 재구성해 본다.

1950년대 울산의 선거 정치

울산의 4.19혁명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관련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관련 언론 보도 기사를 제외하면 강석헌의 ‘1950년대 울산 지역의 선거 정치와 4.19’(울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가 거의 유일한 연구다. 그는 4.19혁명의 원인을 해방 이후 울산 지역의 국회의원 선거를 둘러싼 선거 정치에서 찾으며, 이러한 성격이 4.19혁명 이후 울산지역사회의 사회정치적 발전에 장애로 작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강석헌의 연구를 바탕으로 1950년대 울산 지역의 정치적 상황을 재구성해 보자.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활발하고 다양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삼상회의 이후 찬탁과 반탁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미군정의 사회주의 탄압정책이 강화되면서 국가건설 운동은 우익계열이 주도했다.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터가 되지는 않았지만 울산은 전쟁 배후지역으로 전선에 투입되기를 기다리는 군인들의 주둔지이자 피난민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휴전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는 강화됐고 강압적인 국가권력의 통제 아래 대중들의 정치참여는 점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않은 사회에서 대중의 정치참여는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제한되며 이는 사회구성원들의 거의 유일한 정치적 권리 행사이기도 했다. 4.19혁명 이전 국회의원 선거는 네 차례 있었다. 1948년의 제헌의원 선거와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산의 두 개 선거구에서 모두 무소속 의원이 당선됐다.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갑구에서 무소속 김수선이, 을구에서는 자유당 정해영이 당선됐다. 김수선이 다음 해에 자유당에 입당했다가 제명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산 지역 선거구는 자유당 계열의 인물이 당선됐다고 할 수 있다.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과반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승만 정권은 과반 의석을 바탕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 사건이 ‘사사오입개헌’이다.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울산은 자유당이 강세를 보였다. 자유당 소속이었던 정해영 의원은 자유당 경남도당 내부의 세력 갈등으로 제명을 당해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김성탁은 자유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자유당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제명돼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정해영은 자유당과 밀접히 관련된 인물이었다.

4대 국회의원 선거와 울산 을구 재투표

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자유당 경남도당은 이용범을 중심으로 하는 계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용범계는 울산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했다. 3대 국회의원인 정해영이 자유당에서 제명되는 이유도 이용범계가 경남도당을 사당화하고 여러 이권 사업에 관여해 이익을 독점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중앙당은 자유당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정해영을 제명했다. 이용범과 정해영의 갈등은 경남도당 내부 계파의 갈등이기도 했다. 정해영의 제명으로 끝난 듯하던 갈등은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표출됐다.


1958년 4대 국회의원 울산 을구 선거는 자유당의 김성탁, 민주당의 김택천, 무소속의 정해영 3파전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김성탁과 정해영의 대결이었다. 이용범은 울산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김성탁이 이용범계로 편입됐다. 갈등 관계에 있던 정해영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정해영이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인지도가 높았을 것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용범 측은 김성탁의 선거운동을 지원했고, 영천에서 무투표당선이 확정된 김상도 역시 김성탁을 지원했다. 김상도는 울산경찰서장과 사찰계장에게 김성탁의 당선 지원을 지시하고 폭력배를 동원해 선거를 지원했다. 선거 당일 김상도 쪽에서 동원한 폭력배들이 정해영을 비롯해 민주당의 선거운동원, 참관인, 선거위원 등을 폭행, 협박, 감금하는 일이 벌어졌다. 폭력배들은 울산 을구 지역 유권자들을 협박하고 투표용지를 강탈했다. 


선거 결과 자유당의 김성탁이 당선됐지만 선거 개표 중에 정해영 측에서 부정 개표 의혹을 제기하며 투표함 증거보전을 신청했다. 김상도는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경남도당 내부의 갈등 상황과 정해영과 이용범의 대립이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보도됐다. 정해영은 ‘당선 및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김성탁 측이 위조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무더기로 넣은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울산 을구의 26개 투표구 중 14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되고, 재투표가 결정됐다.

되풀이되는 금권·폭력 선거

4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이용범계가 자신들의 계파를 지원하면서 비이용범계와 갈등을 빚으며 경남도당 내부의 분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어부지리로 민주당이 당선되는 경우도 생겼다. 경상남도 지역의 선거가 파행으로 진행되자 자유당 중앙당에서 이용범의 입지는 축소됐다. 결국 이용범은 경상남도 도당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 중앙당의 이기붕은 이용범 후임으로 이용범계 인물을 지명했다. 내부 반발이 있었지만 선거를 통해 비이용범계 인물이 당선됐다. 이는 자유당 경남도당 내부에 비이용범계와 이용범계가 여전히 지역의 정치권력을 두고 경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59년 6월 23일 울산 을구 14개 투표구에서 재투표가 실시됐다. 재투표에서도 김성탁에 대한 경찰의 지원 활동은 여전했다. 부산·경남의 경찰 500여 명이 울산으로 파견됐다. 경찰은 면장에게 압력을 넣어 김성탁 선거운동원을 구장으로 교체할 것을 지시하고, 선거 전날 구장에게 배포된 번호표를 가로채기도 했다. 이에 대응해 경남도당의 비이용범계 당원들로 구성된 응원부대가 파견돼 정해영을 지원했다. 재투표 과정에서 김성탁을 지원하는 경찰과 정해영을 지원하는 자유당 응원부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4대 선거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재투표에도 당락에는 변화가 없었다. 울산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돈 봉투와 폭력이 난무한 선거로 알려져 있다.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된 선거 과정의 갈등은 선거 이후에도 봉합되지 않았다. 선거 후 정치보복이 두려워서 울산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한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됐다는 증언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4대 국회의원 선거와 재투표 과정의 노골적인 부정행위는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보도됐다. 울산 지역민들은 선거운동 기간 외부에서 유입된 폭력배들의 세 과시와 폭력행위, 경찰과 응원부대 사이의 충돌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더욱 노골적인 모습으로 확대 재생산돼 1960년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 재현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해 4월은 달랐다. 학생과 시민들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울산 지역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영미 시민기자,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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