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1950년 봄, 김상룡 이주하가 체포되면서 남로당이 붕괴되다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9)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4-20 00: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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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은 미군정 시기 이미 불법단체로 탄압을 받아 지하정당을 선택한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정치세력 중 가장 강력한 저항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1948년 국가보안법 제정,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전 방위 체포 그리고 1949년 4월부터 결성한 국민보도연맹은 남로당의 존립 기반을 흔들었다.


더구나 1948년 2월 7일 이른바 ‘구국투쟁’으로 일어난 제주와 여수 순천의 무장 투쟁은 군대와 우익청년단이 투입되면서 진압에 그치지 않고 대규모 민간인 학살로 확산됐다. 호남과 영남 그리고 강원 산악지역에 거점을 둔 야산대도 대규모 토벌 작전이 벌어지자 점점 고립 상태에 빠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국군 병력은 약 5만4000명이었다. 그중 90% 이상이 육군으로 5만여 명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38선을 따라 북한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후방지역 좌익세력을 소탕하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군대와 경찰을 보조할 수 있는 준 무력 기구를 만들기 위해 먼저 우익 청년조직부터 통합을 시작했다.
 

▲ 1948년 12월 21일 <경향신문> 대한청년단 결성식 성황

대한청년단과 호국군, 민보단, 학도호국단 창설

우익 청년조직 중 사회주의 계열에 대해 백색 테러를 비롯해 가장 날을 세운 조직은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이다. 서북청년단은 해방과 함께 분단되자 월남한 청년단체(대한혁신청년회·함북청년회·황해회청년부·북선청년회·평안청년회)가 모여 1946년 11월 30일 결성했다. 이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밀려 내려왔다는 피해의식이 강했고, ‘복수’라는 이름으로 무력 행사를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주도에서 4.3 항쟁이 일어나자 미군정의 적극 권유로 서북청년단이 ‘임시경찰’이란 명분으로 투입된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첫 투입 이전 수도경찰청에서 훈련을 받고 제주도로 배치됐다. 1948년 말 최소 1000여 명이 ‘초토화 작전’에 투입됐는데, 군인들보다 더 악랄하게 학살을 자행했다.


이승만 정부는 서북청년단 외에도 반공을 내건 전국 20여 개 청년단체를 통합해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결성식을 열었다. 이범석이 이끈 조선민족청년단은 1949년 1월 20일 합류를 결정한다. 정부의 직접적인 압박과 여론 동원에 떠밀려 실제로는 흡수되는 모양이었다. 대한청년단의 총재는 이승만이고, 단장은 내무부장관 신성모가 맡았다.


육군 정규군을 보조할 목적의 ‘호국군’은 1949년 1월 11일, 서울을 비롯해 4개 지역에 여단 병력으로 창설했다. 직업군인은 아니기 때문에 예비군 형태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본인 거주지 주둔 연대에 모여 훈련을 받았다. 해산 직전 총 5개 여단, 10개 연대 규모까지 늘어났고, 1949년 11월에 이르면 ‘청년방위대’로 개편된다.


학생들은 50만 명 규모에 이르는 ‘학도호국단’에 속해 사상통제와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4월 22일 학도호국단을 결성하면서 지방과 서울에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전원이 참여하도록 강제했다. 결성식 선서문을 보면 “우리는 화랑도의 기백과 숭고한 3.1 정신을 계승 발휘하여 반민족적인 행동과 반국가적 상을 철저히 부셔 국토통일과 조국방위에 결사 헌신하겠다”는 내용으로 그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경찰협조 조직으로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결성한 향보단은 1년 만에 ‘민보단’으로 재편했다. 우익 인사들의 비리와 횡포로 여러 문제가 발생한 조직으로, 1949년 10월에 이르면 약 4만 명 규모까지 늘어났다.
 

▲ 1948년 4월 23일 <경향신문> 사만 학도 참집 중앙학도호국단 결성식

이승만의 국회 장악과 정치 라이벌 김구 암살

1948년 8월 이승만 초대 정부의 내각 구성에서 친일파와 부역자들이 뭉쳐 미군정에 적극 협조했던 한민당이 홀대당한다. 한민당은 남한 단독 총선거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전체 200석 중 15%도 안 되는 29명만 당선됐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 좌우합작과 남북연석회의에 반대하면서 이승만과 행보를 함께 했으나 내각에서 배제되자 갈등이 빚어졌다.


이승만 진영은 한민당과 거리를 두면서 독촉국민회의 출신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대한국민당을 여당으로 두었다. 그러자 한민당은 해체하고 다른 우익 세력과 통합해 1949년 2월 민국당을 출범시켜 제1야당이 됐다. 하지만 이런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반민특위 활동이 본격화되자 다시 한배를 탔다. 국회에서 소장 개혁파 의원들이 남북협상과 농지개혁 등 강력한 요구를 들고나오자 이승만 정부의 필요에 따라 대한당과 한민당은 손을 잡았다.


이들은 한 몸통이 돼 1949년 6월, 이승만이 배후가 되어준 친일 경찰들이 주도한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옹호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 때도 한목소리를 내며 개혁파 의원들을 찍어냈다. 야합은 1949년 6월 26일 벌어진 김구 암살에 이르면서 정점을 찍는다.


김구는 1948년 4월 말 평양에서 열린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참석하고, 5월 초 서울로 돌아온 뒤 남한 단독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단독정부를 막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보이콧’으로 분명히 의사를 표했다.


이승만 정부는 그런 김구가 거슬렸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음해했다. 가장 큰 음해공작은 여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헛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이어 군대 내 숙군을 감행하면서 사회주의 계열뿐 아니라 김구를 따르는 장교들까지 처형했다. 오동기 소령을 비롯해 김종석, 오일균, 최남근 등 중도 성향 장교들을 좌익으로 몰아세운 뒤 총살했다. 미군 철수와 남북협상을 내건 개혁파 국회의원들 뒤에도 김구가 있다고 주장했다.


암살범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출신의 극우성향을 지닌 육군 장교였다. 안두희는 이승만의 직접 지시 또는 묵인 아래 김창룡 특무대장의 명령에 따랐다. 암살 한 달 전 한독당에 가입했다. 그 후 경교장을 출입하면서 계속 암살의 기회를 엿보다 실행한 것이다. 사후 처리는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현병 부사령관 등이 도왔는데 훗날 조사에 따르면 미군 특임부대 CIC와도 연관이 있었다.


김구 사망 이후 정부와 군 당국은 안두희가 한독당에 가입한 자로서 당내 갈등으로 벌어진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은 특별성명에서 한독당 내분이라고 규정(7월 2일)했고, 같은 달 20일 국방부는 최종 수사 결과를 ‘대한민국 수립 부인, 공산당과 제휴 기도, 북한 찬양과 미국 반대 등에 맞선 행동’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일부 단체를 배후에서 조종해 ‘애국청년 안두희를 무죄 석방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재판이 끝난 지 1년도 안 돼 안두희는 한국전쟁이 벌어졌다는 이유로 7월 10일 육군 소위로 복직한다. 다시 두 달 뒤 중위로 진급했으며, 1951년 2월이 되면 남은 형기를 면제받는다. 같은 해 12월에는 대위, 1953년에는 육군 소령으로 진급해서 예편할 정도로 정권과 군부의 비호를 받았다.
 

▲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암살범 안두희의 총에 맞은 김구

이현상이 이끈 지리산 유격대는 70명으로 쪼그라들어

1948년 봄, 자생적으로 산에 오른 이들로 만들어진 야산대는 제주와 호남의 지리산 그리고 영남지역의 여러 산에 흩어져 있었다. 1948년 말부터 북조선은 강동정치학원에서 양성한 유격대원들을 남파하고 야산대와 결합해 지휘했다.


대표적인 부대가 이현상이 이끈 지리산 유격대다. 이현상은 여순 사건 때 무장 봉기한 군인을 규합해 800여 명 규모의 제2병단을 꾸린 뒤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제1병단은 오대산 지구에 있었고, 제3병단은 하준수(남도부)와 김달삼이 영남지역 야산대와 결합했다.


야산대는 민가로 내려가 식량 보급을 했고, 근처 경찰서와 관공서를 기습 공격하는 게릴라 전투를 펼쳤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모한 병력을 충원할 수 없어 곤란을 겪었다. 게다가 야산대를 돕는 민간인에 대한 군경의 보복이 심해지면서 민심도 멀어졌다.


가장 큰 규모였던 이현상 부대 역시 1949년 가을을 정점으로 토벌군(지리산 전투사령부,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의 공세에 밀리면서 패퇴한다. 이현상 부대는 800명 부대원 중 10%도 되지 않는 70명 정도가 남았다. 결국 토벌대를 피해 지리산을 떠나 전북 덕유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은둔했다.


같은 기간 38선으로 그어진 국경에서는 남북 정규군 사이에 공방이 계속됐다. 1949년 1월부터 벌어진 교전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공식 기록만 874회에 이른다. 매일 빠짐없이 38선 중 어딘가에선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북한군의 이런 도발은 38선에서 전투를 벌여 국경에 정규군을 잡아둠으로써 야산대 토벌의 힘을 빼려는 목적도 있었다.
 

▲ 지리산역사관(하동), 이현상 부대가 위치했던 ‘빨치산 루트’

김태준 총살, 김삼룡과 이주하 검거, 남로당의 괴멸

남로당은 공식적으로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이 출범하면서 북로당과 통합됐다. 하지만 남로당 조직은 지하 정당으로 여전히 남아있었다. 남로당 총책은 박헌영에 이어 이승엽마저 월북한 뒤 김삼룡이 맡았다.


김삼룡은 1939년 경성콤그룹을 결성하면서 박헌영과 만난 이후 최측근으로 함께했다. 이관술이 소위 정판사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체포된 후 김삼룡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이주하는 김삼룡과 함께 지도부로서 활약하면서 무장 투쟁을 담당했다.


김태준은 부인 박진홍이 월북한 상태에서 남로당에서 문화선전 담당을 맡아 활동하다 1949년 7월 체포됐다. 이현상이 지리산 야산대를 이끌 때 지원했던 김태준은 서울로 돌아와 특수정보를 모으는 일을 병행하다 덜미를 잡혔다.


김태준 체포 이후에도 남로당원에 대한 검거는 계속됐다. 군법회의에 함께 회부돼 재판을 받은 이 중 9명이 1949년 9월 총살형을 언도받았고 같은 해 11월 비공개로 집행됐다. 김태준이 처형당한 이후 김삼룡과 이주하는 남로당 서울시당 조직 재건에 나섰다.


김삼룡과 이주하는 서울 충신동에 마려한 안가를 비롯해 비밀 아지트를 마련하고 신분을 감춘 채 조직 정비를 시작했다. 이때 함께한 이들은 정태식, 박두복, 이규선, 이병철 등이다. 그중 정태식은 일제강점기 경성콤그룹 조직원으로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을 책임진 이론가였다. 박두복은 울산 일산동 출신으로 이관술의 동덕여고보 제자인 이효정의 남편이다. 박두복은 일제강점기 경남적색교원노조사건으로 2년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울산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조직책임자를 맡다가 1946년에 서울로 상경했다. 박두복은 남로당 지하당에서도 조직(오르그)을 맡았다. 이규선은 시당 책임자, 이병철은 군사 부책임자였다.


조심스럽게 조직 재건에 나선 상황에서 암초가 발생했다. 서울시당 부위원장을 맡았던 홍민표가 경찰에 체포된 후 변절한 것이다. 홍민표는 서울시경 사찰과 경위로 특채돼 정보경찰이 됐다. 경찰이 회유에 공을 들인 이유는 남로당 총책임자 김삼룡의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이에 속했기 때문이다.


홍민표는 김삼룡의 비서였던 김형육 부부를 3월 중순 검거하는 데 일조했고, 핵심 당원들이 연이어 체포됐다. 3월 27일 김삼룡이 은신 중인 안가를 둘러싸고 형사대가 급습한다. 남로당의 역사에 실질적인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 1949년 10월 2일 <경향신문> 김태준 증 9명 총살 언도

 

▲ 1950년 4월 1일 <동아일보> 남로당 드디어 붕괴, 총책 김삼룡 체포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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