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성읍에는 꽃이 날리지 않는 곳이 없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8-16 12: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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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텐진의 봄은 가는 곳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꽃가루가 휘날렸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명월이 정이 있으면 나를 초대하니, 봄의 성읍에는 꽃이 날리지 않는 곳이 없다’(明月有情递约我, 春城无处不飞花)고 했던 말이 비로소 체감이 된다. 온종일 꽃가루가 마치 황사처럼 날린다. ‘봄은 꽃을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정이 있는 사람과 마음이 있는 사람이 나를 초대할 수 있다’는 뜻으로 내 나름대로 의역을 해본다.
‘월계꽃’은 천진의 시화다. 텐진시 곳곳에 월계꽃이 화들짝 피었는데 꽃의 수종이 여러 가지인 듯했다. 어떤 꽃은 향기가 없었고 근처에만 다가서도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꽃의 향기에 취해 몸이 아찔해지는 수종도 있었다. 

 


텐진의 봄은 자전거를 타고 공원과 유적지, 건축 탐방을 하기에 제격이다. 눈길이 닿는 모든 곳, 사방천지 어디를 둘러봐도 낮은 구릉 하나 찾아볼 수 없이 밋밋한 평원이 이어진다. 가파른 길이 없기에 전혀 힘들거나 어렵지 않다. 텐진시 최고의 번화가인 ‘빙장루’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근대 서양인들의 조차지였던 ‘밍원’을 다시 찾아갔다. 중학교 때 타다가 몇 차례 넘어지고 난 이래 처음 타는 자전거였다.


‘밍원’의 초입에 ‘내진기념비’(抗震纪念碑)가 세워져 있다. 1974년 텐진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때는 문화대혁명기였다. 비록 ‘배는 곯아도 사회주의적 협동심’이 지배하는 시기였고 사행심이나 이기주의는 발붙일 곳이 없는 사회였다. 수많은 미담 속에 텐진 시민들은 합심해서 역경을 이겨낸다. ‘내진기념비’는 텐진의 랜드마크가 됐다.

 


4시간 동안 찻집도 들르고 커피도 마시면서 ‘밍원’의 골목 골목을 누비고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서안사변’, 제2차 국·공합작의 주역 장쉐량(장학량)이 거주하던 고택 ‘소군부’(叫做少帅府)에 들렸다. 장쉐량은 장제스(장개석)가 1926년부터 북벌을 통해 천하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하북성의 ‘직예군벌’, 안휘성 ‘환계군벌’과 함께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3대 군벌 중 하나인 만주 ‘봉천군벌’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장쭤린’(장작림)은 만주 마적떼 출신의 괴수로 그의 휘하에만 30만 명의 장졸들이 있었다. 장쭤린은 5척 단구에 변발을 한 머리, 한 손에는 늘 아편대를 들고 다니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장쉐량은 아버지 장쭤린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 당한 이후 봉천군벌 세력을 고스란히 승계했다. 

 


한편 장제스는 북벌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재정과 외교권까지 행사하며 여전히 독립국가처럼 행동하는 지방 군벌들의 할거를 뿌리채 뽑아내고자 1930년 4월, 마침내 '중원대전'을 일으킨다. 장제스의 국민국과 군벌 연합군 간의 전쟁인 이 ‘중원대전’은, 총 150만 명이 참전했고 그중 사상자 수는 무려 30만 명을 넘었다. ‘중원대전’이 막상막하 우열을 가리지 못한 채 전개되고 있을 당시, 멀리 산해관 밖에 있던 장쉐량이 이끄는 동북군, 봉천군벌은 이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나 섣불리 군벌 연합군 측에 붙지 않았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간파하지 못하는 인감 됨됨이를 파악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 장제스는 정치적 수완이 좋고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장쉐량에게 접근해 닭피를 나눠 마시며 의형제를 맺었고 동맹을 결성한다. 결국 장제스는 ‘중원대전’에서 최종 승리하게 됐다. 


장쉐량은 도박, 골프, 승마, 댄스파티, 아편, 여자 등 고급스런 유희를 즐겼지만 또 한편으로는 애국심도 갖고 있는 모순된 인물이었다. 그는 장제스가 벌이는 국공내전에 반대했고 장제스에게 여러 차례 “형제는 집안에서 싸우다가도 밖으로부터 오는 위협에는 같이 대응해야 한다”며 내전 종식과 ‘중일전쟁’에 나설 것을 권유했지만 번번이 묵살 당한다. 결국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이 일어나고 장제스는 장쉐량에 의해 감금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날 도도히 흐르는 역사는 그 물줄기를 바꾸게 된다.

 


‘시안사변’은 전개 과정도 흥미롭지만 후일담을 통해 전설이 됐다. 영어의 몸에서 풀려난 장제스는 국민정부가 있는 남경으로 떠나면서 장쉐량에게 자신의 전용기편으로 남경으로 가서 처벌을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장쉐량은 군말 없이 장제스를 따라 나선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기 위해 각하를 뒤따라 수도로 왔습니다.” 남경에 도착한 장제스에게 장쉐량이 남긴 말이다.


그 자리에서 장쉐량은 구금됐고 그 후 오랜 세월의 가택연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가택연금 상태로 지낸 세월은 무려 53년 6개월이었다. ‘은혜와 원수는 대를 이어 갚는다’는 중국인의 속담처럼 가슴에 한을 품은 장제스는 대만으로 쫓겨 가면서도 장쉐량을 데리고 갔다. 장쉐량이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것은 장제스가 죽고 나서도 2년이 지난 1977년이었다. 그는 39살에 구금돼 77세가 돼서야 오랜 가택연금 생활에서 풀려났다. 그 후 1993년 주거 이전의 자유가 주어지자 그는 하와이로 이주해 살다가 2001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104살이었다.

 


장쉐량의 고택 ‘소군부’에서는 중국인 가이드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한 마디 중국어를 할 줄 모르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가이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들었다. 신기하게도 귀가 열리며 내용 설명이 들려온다. “이 테이블은 ‘마장’이라고 합니다. 장쉐량이 이 곳에서 마작을 했습니다.” “이것은 장쉐량의 침실입니다. 못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두 번째 부인 조씨와~~~” 3층에 올라가자 댄스홀이 나왔다. 설명을 마친 가이드와 관광객이 모두 떠나가고 나만 텅 빈 댄스홀에 홀로 남아 있었다. 갑자기 1930년대 무드 있는 음악이 깔리며 댄스홀을 가득 메운 남녀가 서로 부등켜 안고 빙글빙글 무대를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설핏 아직 30대의 젊은 장쉐량이 내 어깨를 치며 지나간 것 같았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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