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동학농민군의 논산・원평・태인 전투 패배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4-24 12: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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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충청감사 박제순, 일본군에 동학농민군 토벌 독촉

연산(連山)은 논산(論山)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연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으로 돌아와 본진에 합류했다. 논산으로 후퇴한 동학농민군을 추격한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서로분진대와 통위영 그리고 장위영 부대는 연산 전투 직후 논산의 동학농민군 집결지를 기습하기 위해 추격했다. 이 추격전은 충청감사 박제순이 11월 14일 정탐원이 탐지해 온 정보를 일본군 모리오 대위에게 알려주고 독촉하면서 이루어졌다. 정탐원의 보고에 따르면 “전봉준의 군사가 노성(魯城) 부근에 주둔해 있는데, 공주를 기습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라고 했다. 이 정보를 받은 모리오 대위는 11월 15일 일본군 1개 소대와 통위영 병대(兵隊) 200명을 앞세우고 추격해 노성에 당도했으나 이미 동학농민군은 논산으로 이동한 직후였다.


일본군과 통위영 병대는 노성으로 가면서 동학농민군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陳謄錄)>에는 “사방으로 흩어져 추격해 체포하였는데 각 부대에서 체포하는 대로 대개 총살하였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본군과 통위영 병대의 주력은 연산에서 논산으로 직행해 동학농민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소토산으로 향했다. 뒤이어 이두황(李斗璜)이 거느린 장위영 병대도 합류했다.

피로 물든 황화대(皇華臺) 

 

▲ 황화대가 있는 황화산성. 우금티에서 밀린 동학농민군은 이곳 봉화산의 황화대까지 밀려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여산을 거쳐 전주로 퇴각했다.


소토산에 유진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기습을 받았다. 통위영 병대는 소토산의 오른쪽을, 일본군은 정면과 왼쪽으로 공격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기습에 동학농민군은 1시간 반 동안 맞서다 물러나 은진의 황화대로 밀려갔다. 그리고 황화대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황화대는 광대한 뜰 가운데 우뚝하고 홀로 서 있어 사방의 산기슭이 조밀하게 둘러 있고 가운데 봉오리는 평평하고 넓었으며 사방으로 낭떠러지에 에워싸여 있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성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형적인 이로움에도 동학농민군은 모리오 대위가 주도하는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모리오는 남쪽을 제외한 3면으로 부대를 나누어 협공해 동학농민군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정면으로 주력부대가 공격해 황화대로 올라갔다. 일본군의 전면 공격에 끈질기게 대항하던 동학농민군은 2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사기가 꺾였다. 전봉준은 후퇴 명령을 내렸고 동학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져 전주 방향으로 퇴각했다. 일부는 강경으로 도주했다가 민보군의 꼬임에 빠져 몰살당할 위기에 빠졌는데 그곳 동학농민군의 도움으로 구출돼 전주로 합류했다.


선봉에 섰던 이규태는 “3로(路)로 진격하여 노성 봉수봉 아래에서 동학군을 포살(捕殺)하고 논산 대촌(大村)까지 추격하여 동학군을 분주(奔走)시켰으며 또 은진 황화대 둔적(屯賊)에게 대관 윤선영(尹善永)을 보내어 300여 명을 격살했다.”라고 장계를 올렸다. 황화대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300명이 전사할 정도로 많은 희생을 냈다. 연산 전투에서 패한 후 논산의 소토산과 황화대 전투에서 연이어 패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우세한 무기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금구 원평(院坪)에서도 대패

11월 18일 전주로 후퇴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근거로 저항해보려고 했으나 군량이 여의치 않자 11월 22일 밤에 전주성을 빠져나와 금구 원평으로 이동했다. 원평은 대접주 김덕명(金德明)의 근거지로 호남 동학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다. 원평은 보은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될 때 전라도의 동학도들은 모여 집회를 열었을 정도로 호남 동학의 거점이었다.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은 원평에 대도소를 설치해 머물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은 23일부터 군열을 재정비했다. 동학농민군이 머물던 구미란 마을 앞으로는 원평천이 흐르고 있었고, 원평장은 인근의 물산이 집중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논산에서 합류한 전봉준과 손병희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원평까지 함께했다. 호남과 호서의 동학농민군이 합세해 3만 명에 달하던 동학농민군은 거듭된 패배로 전주에 들어왔을 때 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원평으로 집결한 이후 호남 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이 모여들어 수천 명에서 1만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연이은 패배로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그리 높지 않았다.

 

▲ 원평 전투의 중심 무대였던 구미란 전적지. 원평의 구미란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37명이 전사했고 원평 장터 일대가 초토화됐다.


원평에서 군진을 정비하던 동학농민군은 11월 25일 새벽에 일본군과 관군의 기습을 받았다. 원평에서 동학농민군을 공격한 부대는 서로분진대가 아닌 대대본부가 있던 중로분진대였다. 이들은 청주를 거쳐 문의와 증약에서 전투를 하고 금산을 지나 연산 고산 전투를 치르고 원평으로 들어왔다. 당시 일본군에 배속되어 있었던 교도중대장 이진호(李軫鎬)의 보고에 전투 상황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이날 24일 미시(未時, 오후 1~3시) 경에 파송한 대관 최영학이 교도병 1대 및 일본군 1대와 진군하여 금구읍에 이르러 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25일 묘시(卯時, 오전 5~7시) 경에 행군하여 나아가서 곧 원평에 도착하니 적도(賊徒) 수만 명이 한 번 나팔 소리가 나자 진을 삼면으로 벌리고 품(品)자 모양을 형성했습니다. 천보(千步)의 거리를 두고 손시(巽時, 오전 9시경)부터 신시(申時, 오후 4시)에 이르기까지 서로 총을 쏘며 싸웠는데 포성이 우레 같고, 탄환이 비 오듯 날아 오갔습니다. 적은 산 위에 있었고 우리 군대는 들에 있었으며 사방 주위에서 함성이 진동하고 불꽃과 연기가 안개를 이루어 원근 구별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대관 최영학이 칼을 뽑아 적을 향해 앞장서서 산에 올라가 지휘하였고, 호령 하나로 대를 동서로 나누어 한꺼번에 힘을 써서 다투어 먼저 올라가 찌르거나 목을 베어서 죽인 적이 37명이었습니다. 남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각자 도망하였는데 산세가 가파르고 험하였으며 해는 이미 저물어 가고, 게다가 적들의 행색이 모여 있으면 동학인지 알 수 있지만, 흩어져 있으면 농민과 비슷하기 때문에 일일이 추격하여 죽일 수 없었습니다.

원평 전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약 7시간에 걸친 전투였다. 동학농민군은 원평천 건너 구미란 뒷산을 가득 메우고 반격을 가했다. 일본군과 교도대병이 동서로 진을 나누어 돌격해오자 필사적으로 대응하던 동학농민군 37명이 전사했다. 이렇게 많은 전사자가 발행하자 동학농민군은 후퇴를 결정했다.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으로부터 취한 노획품은 회룡총 10자루, 조총 60자루, 납탄 7석, 화약 5궤짝, 자포 10좌, 도창 200자루, 쌀 500석, 돈 3천 냥, 면포 10동, 소 2마리, 말 11필, 쇠가죽 10장, 호피 1령 등이었다. 노획물 중 특이한 것이 쇠가죽이다. 쇠가죽은 동학농민군이 야외에서 밥을 해 먹는 장비로 알려진 물품인데 원평 전투의 노획물에 포함돼 있어 동학농민군이 실제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원평 장터. 금구 집회와 동학농민혁명의 장소라는 안내판 뒤로 원평 장터의 모습이 보인다. 원평은 김덕명 대접주가 관장하던 곳으로 1893년 보은 교조신원운동 당시 전라도 동학도 1만 명이 집결했던 곳이었고, 동학혁명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맞서 치열한 항쟁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선봉 이규태의 보고문서에는 “원평 장터의 가게와 여염집이 잇달아 40여 집이 불에 탔고, 비류(匪類, 동학농민군)가 저장해둔 곡식 몇백 섬과 민가의 물건이 모조리 불에 타서 보기에 극히 근심스럽고 참담하다.”라고 원평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관군은 민가들이 동학농민군을 도와주고 있다고 보아 전투 중에 민가들을 많이 불태워 버렸다.

태인(泰仁)에서 전봉준 부대 마지막 결전

원평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바로 태인으로 후퇴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농민군과 합류했다. 원평 전투 이후 손병희의 호서 동학군은 전봉준의 부대와 헤어졌다.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연패하는 상황에서 의암은 동학 교단의 존립을 위해 전봉준과 합의해 호남과 호서의 동학농민군을 분리시켰고 의암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은 9월의 재기포 이후 전라도 임실에서 동학혁명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해월과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태인 전투는 11월 27일 11시경부터 시작됐다.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에 관군은 230명, 일본군은 60명이었다고 했고 동학농민군은 약 5천 정도라고 했다. 동학농민군은 성황산(城隍山), 한가산(閒加山), 도리산(道理山) 세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두 갈래로 나눠 한가산과 도리산을 목표로 공격했다. 대관 윤희영이 이끄는 관군 90명과 일본군 30명은 서쪽 길로 공격했고, 대관 이규식이 이끄는 관군 140명과 일본군 30명은 동쪽 길로 공격했다.


수 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일본군과 관군은 두 산을 정복했고 동학농민군은 성황산에 집결해 맹렬히 저항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다시 하산해 두 갈래로 나누어 성황산을 공격했다. 몇 시간을 두고 동학농민군은 유리한 지형에서 교전했지만 일본군과 관군이 정면에서 치고 올라오자 이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40명이 전사했고 50명이 생포돼 살해당했다. 생포된 동학농민군의 거괴(巨魁)는 전봉준이고 그 밑에 김문행, 유공만, 문행민 등이 지휘했다고 했다.


태인 전투는 새벽부터 저녁 8시까지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회룡총 15정, 조총 200여 정, 많은 양의 탄약과 말 6필을 빼앗겼다. 태인 전투가 전개되면서 민가 700~800호가 불타 버렸다. 태인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많은 희생자와 포로를 남기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태인 전투에 패배하면서 고부 기포부터 시작해 전국을 진동시킨 동학혁명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의 조직적인 항전은 11월 25일의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끝나고 말았다.

 

▲ 동학혁명 태인 전적지. 1894년 11월 27일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태인 전투에서 패전해 동학농민군을 해산했다. 1월 10일부터 시작된 동학혁명은 이 태인 전투 패배로 끝이 났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해산됐고 각지의 동학농민군은 산발적으로 이듬해 1월까지 저항을 이어갔다.


동학농민군은 태인 전투 이후 계속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대부분 해산돼 더 이상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제지할 만한 병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나미 소좌가 이끄는 후비보병 제19대대는 끝까지 동학농민군을 추격해 수색, 살육 작전을 벌였다. 일본군과 함께 좌선봉장 이규태와 우선봉장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과 이진호의 교도중대 등은 일방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이에 대항해 장흥・함평・강진・무안・해남 등지에서 분산적인 저항이 이듬해 정월까지 지속됐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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