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다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10-25 12: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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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해월을 쫓는 끊임없는 발길

해월에 대한 체포령은 1862년부터 시작됐다. <천도교창건사>에 따르면 1862년 여름, 해월이 수운이 기거하던 박대여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의 종교 체험을 말하면서 수운으로부터 포덕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월은 연고가 있었던 영해, 영덕, 상주 등 경상도 북부를 다니며 동학을 전파하는 포덕 활동을 하면서 이름이 알려지자 경주관아 포졸 30여 명이 해월이 살고 있던 신광의 검곡에 들이닥쳤다는 기사가 해월에 관한 최초의 체포령이었다. 그러나 해월은 기지를 발휘해 이를 벗어났다. 1863년 12월 수운이 체포된 직후 해월이 수운으로부터 동학 교단의 후계자가 됐다는 사실을 인지한 조정에서는 동학의 뿌리를 뽑기 위해 본격적으로 해월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수운 사후 해월은 태백산중으로 은거해 관의 지목을 피했다. 영양 일월산 윗대치에서 교세를 키운 해월은 1871년의 영해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으나 이필제가 본래의 목적과 달리 자신의 야욕을 위해 영해부사를 살해고 민란화했다. 이로 인해 해월과 동학에 대한 지목은 더욱 심해졌다. 영해 교조신원운동 이후 해월은 태백산중으로 숨어들어 경상도・강원도・충청도 3도의 험준한 준령을 넘나들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때로 꿈속에서 수운으로부터 위험하니 빨리 도망치라는 현몽으로 위기를 벗어난 적도 많았다. 이렇게 수많은 위기를 뚫고 해월은 3남 일대로 교세를 확장시켰다. 해월은 1892~3년의 교조신원운동으로 동학을 조정으로부터 공인받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동학 교단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해월에 대한 체포령은 더욱 강화됐다. 이러한 조정의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일어난 1894년의 동학혁명의 수괴(殊怪)로 지목돼 해월의 목에는 많은 현상금과 군수의 벼슬이 준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동학혁명 당시 관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전라도 임실에서 강원도 홍천으로 도피하는 데 성공한 해월은 강원도와 경기도의 산간 지역을 은거하면서 흩어진 제자들을 수습해 동학혁명으로 와해한 동학 교단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해월을 향한 지목은 멈춰지지 않았다. 해월에게 걸린 현상금과 관직으로 인해 해월에 대한 지목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해월을 잡아 팔자를 고치겠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1898년 1월에 이천관아 소속의 관병들이 해월이 은거하고 있던 전거론에 들이닥치는 큰 위기가 있었으나 손병희가 기지를 발휘해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월에 대한 지목은 늘상 있었다.
 

▲ 원주 송골 원진여의 집터. 1978년 5월 27일 표영삼이 여러 자료를 보고 송골의 위치를 확인해 해월의 피체지를 확인했다. 해월이 체포된 원진여의 집터는 사진 가운데 양철집 앞의 짚더미가 있는 곳이다. 이 사진은 <신인간> 통권 제359호(1978.7)에 실려 있다.

흉년에 무슨 생신상

3월 21일은 해월의 생신이었다. 제자들이 72세를 맞는 자신의 생신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을 알아차린 해월은 “특히 금년 생신은 음식을 전폐(全廢)할 터인즉 제군은 그리 알라”고 당부했다. 해월이 생신상을 차리지 말라고 한 것은 당시 크게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음식을 차린 생일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해월을 모셨던 임순호(林淳顥)는 <천도교회월보> 통권 제246호(1931. 6)에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무술년(1898년)에 강원도가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음으로 칡뿌리를 캐서 겨우 목숨을 이어나간 때가 있었다. 칡뿌리를 캐다가 높은 산 위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때 해월신사께서는 “내가 어찌 밥을 먹겠는가” 하시고 콩죽과 나물죽을 잡수셨다. 콩죽이래야 콩을 간 것을 거르지도 못하게 하시고 그대로 쑤게 하셔서 잡수셨다. 이만치 선생은 사람을 생각하시었다. 실로 선생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민중의 동무이시었다. 신발도 메투리(=미투리)를 신으시지 않으시고 큰 짚신을 신으시며 “이게 발이 편하고 제일 좋다.”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실로 검박(儉朴) 그대로의 선생이시었다.

임순호의 글에 해월의 품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해월과 같이 붙잡혔다가 함께 죽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는 임순호는 해월이 생일상을 차리지 말라는 이유가 흉년이 든 백성들이 어렵게 생활하는데 그들과 같이 하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생신예식은 행하지 못할지라도 제자 된 도리에 그냥 보낼 수 없다고 도인 몇 사람이 서로 의논하고 임학선(林學善)을 여주시장에 보내 잉어 등 반찬거리를 사게 했다. 이때 임학선은 큰 잉어가 든 찬수(饌需)를 안백석에게 지워 원주의 송골까지 함께 왔다. 이것이 해월이 체포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4월 4일 송경인은 여주로 되돌아와 안백석을 체포해 해월이 원주 송골에 은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특채된 송경인(宋敬仁) 해월의 송골 은신 감지

조정에서는 동학혁명 이후 해월이 잠적하자 체포를 위해 송경인을 특채했다. 충청도 출신인 송경인은 동학에 가입해 활동했던 인물로 동학혁명 당시 접주로 활약했다가 관군에 항복한 인물이다. 관군에 항복한 그는 해월을 체포할 것을 약속하고 조정으로부터 시찰사(視察使)로 특채됐다. 송경인은 동학접주로 활동할 때의 자신의 수하로 있던 교도들을 회유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해월의 은신처를 수색하고 다녔다. 송경인은 옥천 지방에 사는 박 씨로부터 해월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옥천으로 내려와 해월이 이천에 은거했을 때 동행했던 김치구(金致九, 일명 김만여)의 처남인 송일회(宋一會)와 동학교도 박윤경(朴允景, 일명 박윤대)을 체포한 후 심문해 해월이 여주 전거론에 있다는 자백을 받았다. 


송경인이 송일회와 박윤경 두 명을 앞세워 여주 전거론 임순호의 집을 급습했지만 이미 해월이 전거론을 떠난 후였다. 송경인은 전거론에서 해월의 집안일을 돌보던 이치경(李致敬) 형제를 체포해 심문했다. 송경인은 이치경으로부터 3월 20일 염창순(廉昌淳)과 안백석(安伯石)이 해월의 생일 찬수를 지고 간 짐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안백석은 3월 20일에 임학선이 여주시장에서 산 생일 찬수를 원주 송골로 가져다준 짐꾼이었다.
 

▲ 해월 추모비와 송골 마을. 해월 최시형이 마지막으로 은거했던 송골마을의 입구에 1990년 치악고미술동우회에서 추모비를 세웠다.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와 해월의 “천지즉부모(天地卽父母)요 부모즉천지(父母卽天地)니 천지부모(天地父母)는 일체야(一體也)니라”는 추모비의 글씨는 무위당 장일순이 썼다. 추모비 뒤로 보이는 마을이 송골마을이다.

이번 창도 기념은 각자 집에서 봉행하라

4월 5일은 동학의 창도일이라 제자들이 창도일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4월 3일 해월의 아들 동희가 아이들과 놀면서 “병정이 우리 집에 들어온다”라고 말했으나 모두 등한시했다. 그러나 해월은 이 말을 듣고 “이것은 천어(天語)라 가히 심상히 듣지 못할 소리라”라고 했다. 4월 4일 창도일 준비로 분주한 원주 송골에는 손병희를 비롯해서 임순호, 김연국, 손병흠, 신현경, 임도여 등이 해월을 시봉(侍奉)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월은 뜻밖에도 “너희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 창도 향례를 지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손병희가 “문도(門徒) 된 자 비록 먼 곳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한곳에 모여 예식을 거행함이 가하거늘 어찌하여 돌아가라고 명하시나이까?”하고 반문했다. 그러자 해월은 “내 생각한 바 있으니 명을 어기지 말라”고 힘줘 말하며 더는 자신의 명교를 거역하지 말라고 못을 밖았다. 


해월의 강권에 교단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창도 기념식을 여러 도인들과 함께 봉행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컸지만 손병희 등 제자들은 스승인 해월의 명교를 따르지 않을 수 없어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의암은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으나 해월의 호통을 듣고 마지막으로 집으로 향했다. 여러 도인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원진여의 집에는 다만 임순호와 임도여 두 명만 남아 있었다. 4월 4일 밤 해월은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적연히 홀로 앉아있었다. 해월이 창도 기념일을 각자의 집에서 하라고 한 것은 자신의 체포를 미리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학 창도일에 체포된 해월

해월이 송골에 있다는 것을 감지한 송경인은 경병(京兵)을 데리고 5일 새벽에 여주에서 원주 송골로 출발했다. 낮 12시경에 원주 송골로 들어온 송경인은 이미 체포한 이치경 형제와 함께 경병 40~50명을 이끌고 해월이 은거하고 있는 원진여의 집을 급습했다. 이때 임순호도 함께 체포됐다. <균암장 임동호씨 약력(均菴丈林東豪氏略歷)>에는 그날의 긴박했던 상황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동월(同月, 4월) 5일 천일기념(天日紀念) …… 기념식에 성사(聖師, 손병희)와 기타 여러 사람은 다 보내고, 임순호 한 사람만 데리고 식을 행하다. 그 뒤 임순호가 곧 떠나오다가 10리쯤 되는 지역에서 여주 순교가 안백석(安伯石)을 앞세우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깐 피신하려 하였는데 전기 순교가 먼저 알고 임순호를 체포하여 앞세우고 하는 말이 “너는 해월신사 주소를 잘 알 터이니 가자.” 하였다. 형세상 어쩔 수 없어 가다가 남모르게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신사댁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려는 중, 신사댁 들어가는 동구 실개천 강(江)을 마주하여 순교가 별안간 안백석(安伯石)을 쇠몽둥이로 때리며 하는 말이 “이 강을 건너느냐, 아니 건너느냐?” 하고 고성을 치니 안백석이 답하기를 “네.” 하고 이 강을 건넌다 하였다. 이에 순교의 말이 “임순호는 뒤세우고 안(安)을 앞세우라.” 하고 곧 신사댁으로 가서 신사를 포박하였다.

1862년 여름 경상도 포항의 검곡에서부터 시작된 해월에 대한 체포령은 1898년 4월 5일 강원도 원주 송골에서 해월이 붙잡힘으로써 막을 내렸다. 약 37년간의 도바리 생활에 끝이 났다. 보따리 하나를 메고 전국을 다니며 시천주(侍天主)와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설파하며 후천 개벽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헌신한 최보따리가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 원주 송골 원진여의 집 표지석. 해월의 집터에 1990년 치악고미술동우회에서 세웠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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