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지도사는 고인과 산 사람 둘 다 살리는 직업” 울산 고인돌 최지수 장례지도사

김선유 기자 / 기사승인 : 2020-07-08 14: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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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고인돌 최지수 장례지도사 ⓒ김선유 기자

[울산저널]김선유 기자= 울산 고인돌 최지수 대표는 지난해 아버지가 간암으로 투병 중 별세하자 33세의 나이로 가업을 이어받았다. 울산에서는 2019년 후반기에 장례지도사 국가공인자격증시험이 생겼고 최 대표는 자격증 취득 후 울산 국가장례지도사 1기로 활동하고 있다. 최 대표는 장례지도사가 고인을 좋은 곳으로 보내드리고 산 사람들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두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라며 장례지도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Q1. ‘고인돌’의 장례 서비스에 대해 설명해 달라.
처음에는 가족 납골묘 시공 사업으로 시작했다. 5년 정도는 사업이 잘 됐지만 정부의 지침이 바뀌면서 허가도 힘들어졌고 납골묘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납골묘사업을 접고 이장·개장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지금도 납골묘 의뢰가 들어오면 시공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에는 납골묘가 더 좋다고 해서 사람들이 선호했지만 지금은 흉물스럽다며 꺼려한다. ‘고인돌’은 원래 서울에 본사를 둔 납골묘 관련 장례업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본사가 다른 사업을 하고 있고 우리는 우리대로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장례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납골묘는 시공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허가를 받기 어려워 사업이 힘들었다. 이장·개장 관련 사업으로 업종변경을 하고 처음에는 아버지가 일을 많이 꺼려했지만 경제적 난관에 부딪혀 이것저것 따질 수가 없게 됐다. 또 봉안당 안치나 수목장 등 화장 장례의식이 많이 진행되면서 이에 따른 묘지 개장과 이장 일도 늘어났다. 이런 이유로 장례와 관련한 사업을 확장해 온 것이 지금의 울산 ‘고인돌’이다.
처음에는 상조업과 함께 장례 토탈업을 하려고 했다. 상조와 관련해 영업사원이 필요했지만 영업사원 모집에 어려움이 많았다. 또 상조업을 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상조회사들이 ‘치고 빠지기’ 형태로 부도를 내고 없어지는 일이 많아서 상조업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원래 장례업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면세사업이다. 하지만 기업체를 상대로 일을 하면서 세금계산서를 끊어달라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로 개인사업자로 전환했다. 2000년 4월부터 아버지가 먼저 시작한 사업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노하우가 생겼고, 사람들에게 좋은 인식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역사를 덮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Q2. 장례업을 시작한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울산 서생 출신으로 정직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강직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공무원이 되기 위해 6개월 동안 밥만 먹고 공부만 했다고 들었다. 시험을 치러 가니 남들은 다 어렵다는 문제들이 너무 쉬웠다며 “다들 어렵다는데, 나 혼자 쉬웠으니 떨어진 것 같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부산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5년 정도 근무하다 퇴직하고 다시 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당시에는 공무원시험에도 나이제한이 있었는데, 그 나이제한에 걸려서 더 이상 시험을 보지 못했다.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데리고 외할머니가 살고 있던 울산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동물사료·영양제 납품, 미역공장, 통닭집 등 여러 사업을 시작하고 문 닫고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사업이 잘 됐지만 아버지가 워낙 정직하고 사람을 좋아해서 싫은 얘기를 못해 수금에 어려움이 많았다. 사실 사업이나 장사를 하려면 뻔뻔한 면도 있어야 했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우연히 신문을 보다 고인돌 사업자 모집 공고를 봤다. 무일푼이었지만 1999년 고인돌 울산지점 사업권을 받으려고 본사 사장에게 찾아가 포부를 밝히고 최소금액으로 사업권을 따왔다. 남의 조상도 자신의 조상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고인을 모셨다. 일에 있어서 대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Q3. 가업을 이어 받게 된 계기는?
일반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보세 옷 관련 물류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가 간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5년 동안 하게 됐다. 일은 계속 들어오고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일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그때부터 전적으로 일에 뛰어 들게 됐다. 중학교 때부터 주말에 일이 있으면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해왔기 때문에 장례업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또 20년 동안 아버지가 해왔던 사업이기도 하고 외동아들이다 보니 가업을 이어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다. 또 사업의 특성상 개인 고객들이 많기는 하지만 한 번씩 도시개발사업이나 기업들이 확장하면서 큰 규모의 공사가 들어올 때가 있다. 이런 전망을 보고 사업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명감도 사명감이지만 고인돌이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라고 생각해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의 장례지도사들은 나이가 많고 젊은 세대들은 장례업을 꺼려한다. 아직 젊은 나이에 후발주자이지만 나중에는 고참이 될 것이고 그 때가 오면 후배양성에도 힘쓸 생각이다.

Q4. 주변의 반응은?
반응은 양쪽으로 나뉜다. “억만금을 줘도 못 하겠다”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의미 있고 좋은 일 하는 것 같다”라는 사람도 있다. 또래보다는 연배가 좀 있는 분들이 좋은 일 한다고 응원을 많이 해준다. 아직까지는 인식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인을 편안하게 모신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장례지도사들의 처우도 조금 개선돼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 바뀌었으면 한다.

Q5. 앞으로의 목표는?
울산에서 주로 일을 하지만 앞으로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울산에는 하늘공원 말고 제대로 된, 무연고자를 모실 수 있는 사설 봉안당이 없다. 연고자가 없는 분은 울산출신임에도 타 지역에 봉안이 되고 있어 그 부분을 바로잡고자 추모관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명당이라고 땅을 사서 묘를 크게 만들어 모셔도 자식들이나 가족들이 자주 찾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삶이 팍팍하다보니까 자주 못 찾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만약 기회가 된다면 울산에 크게 추모관을 만들어 그리워하는 고인을 시내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고 싶다. 이장·개장과 관련해서는 고인을 다시 모시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뼛조각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Q6. 일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작업을 할 때 생각보다 포크레인이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 많다. 깊은 산이나 상석이 너무 크고 무거울 경우 작업하기가 어렵다. 산소가 돌밭이면 삽이 잘 들어가지 않아 개장하기도 어렵고 더군다나 겨울에는 땅이 얼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다.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생장이 나왔을 때나 고인의 몸이 분리돼 내장이 나와 있을 때는 몇 십 년을 일했던 사람도 정신적으로 힘들다. 정신적인 어려움은 “무섭고 두렵다”가 아니라 “이렇게 안 좋은 상황과 힘들게 계셨던 분도 좋은 곳으로 옮겨드리고 좋은 곳으로 모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극복하고 있다. 또한 좋은 일로 복이 쌓인다고 생각하며 이겨내고 있다. 항상 가족을 모신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오다보니 고인을 모시고 난 뒤에는 마음이 더 편하다.

Q7. 보람을 느꼈던 적은?
일을 하면서 항상 보람을 느끼는 편인데, 누구나 일생에 몇 번 없는 일이다보니 진실한 마음으로 고인을 모셨을 때 고인의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장례지도사는 안 좋은 상황에 힘들게 있던 고인을 좋은 곳으로 보내드리고, 또한 산 사람들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두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주로 이장·개장을 원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무거워서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계속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경우와 후손들이 조상묘를 찾아다니기 힘들다는 경우다. 거기에 더해서 아직 나이가 젊다보니 더 격려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개장 사진을 전·중·후로 나눠 한 컷 한 컷 찍을 때도 정성들여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편집도 해서 전달하면 더 믿음이 가고 안심된다며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 또한 아버지가 해왔던 그대로 고인을 화장터나 다른 묫자리로 옮겨 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을 모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족들 곁에서 안심할 수 있도록 좋은 얘기를 전하고 있다. 고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도 보람을 느끼지만 “덕분에 마음이 편하다”, “그날 저녁에 정말 편하게 잤다” 등의 얘기를 들으면 더 큰 보람을 느낀다.

Q8. 고인돌이 타 장례업체와 다른 점은?
무엇보다 일반 인부들을 따로 쓰지 않고 현직 장례지도사들이 직접 현장에 나가 일을 한다는 점이다. 또 그냥 찍어서 보낼 수 있는 사진도 보기 쉽게 편집해서 전달하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어떤 일에든 실수는 없어야 하지만 장례와 관련된 일은 더욱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고 베테랑 장례지도사와 함께 협력해 정성을 다해 고인을 모시고 있다.

Q9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장례업이 일도 힘들지만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이다. 인식개선이 하루아침에 바로 되지는 않겠지만 나부터라도 인식개선을 위해 더 노력하고 더 진심을 담아 일할 것이다. 유족들에게는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되고 힘들겠지만 “내 가족을 모신다”는 생각으로 더 안심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갖고 정성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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