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19 (1)

이기암 기자 / 기사승인 : 2019-07-17 15: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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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정책수다 울산저널 시민포럼
▲ 왼쪽부터 이현호 역사교사,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이현미 시민기자. ⓒ이종호 기자

 

박현미 시민기자(이하 ‘박’)=시간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지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르지 않고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 의미 있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는 흐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가 외쳐졌다.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태어난 순간,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을 부르는 함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번 시민들의 정책수다 시민 포럼의 여덟 번째 이야기는 ‘울산의 3.1운동과 그 이후’ 이야기다. 이에 관한 얘기를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연구회’를 진행하는 이현호 역사 선생님과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1987 사무국장과 함께 풀어보려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 11월부터 패전국에 대한 독립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국제연맹 창설 논의 등 시대적 흐름이 있었다. 우리 민족 역시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열망으로 독립선언서가 나오게 됐다. 3.1운동 시위 횟수는 전국과 해외를 합산해 1692회에 달하며 참여자도 연인원 100만 명이 넘지만 대부분의 시위가 평화롭고 질서 있게 진행됐다. 울산에서 3.1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나?

고종 인산일에 20~30만 명 경성으로 올라와
병영 무반.잔반가문 결속력으로 만세운동 공유

이현호 역사 교사(이하 ‘이’)=울산에서 3.1운동은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3월 1일 이후 한 달쯤 지났을 때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3월 1일은 실제로 전국적으로 만세를 부른 건 아니고 서울, 평양, 부산에서만 만세를 불렀다. 대도시가 아닌 군 단위 정도의 일반지역에는 당시 농촌사회다 보니 운동의 전파 과정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전파되더라도 사람을 모으는 등 준비작업을 해야 했다. 또한 모이는 시간도 같아야 다 같이 만세를 부를 수 있었는데 옛날에는 5일장이 아니면 사람이 모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5일장 때 만세 부를 준비를 하고 태극기 준비하고 이런 과정들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됐다. 대체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했던 시기가 4월 초가 된다. 울산도 4월 초에 세 군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2일 언양, 4월 4일 병영, 4월 8일 남창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있었겠지만 사람들이 모이게 된 더 구체적 계기는 고종의 사망이라고 볼 수 있다. 고종이 1919년 초에 사망하고 3월 3일이 인산일이었는데, 이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유림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있는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당시 경성 인구가 대략 25~30만 정도 됐는데 인산일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 20~30만 명이나 됐다. 갑자기 서울 인구가 2배로 늘어나게 된 거다. 그 사람들이 인산일을 참석하고 난 뒤 고향에 내려가게 됐는데 그때 각 지방에 독립운동을 퍼트리는 기회가 된 것이다.

  

배문석 사무국장(이하 ‘배’)=실제 울산에서 벌어진 만세운동도 각각의 준비 주체가 달랐다. 언양 같은 경우 손병희 선생이 민족지도자 33인 중에 맨 앞에 서 있었기에 천도교에서는 3월 1일에 맞춰서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내부에서 공유됐다. 독립선언서나 천도교 회보 등을 지역으로 보내는 과정으로 전개된 것이다. 병영의 경우, 서울지역으로 유학 가 있는 병영 출신 학생들이 있었는데 병영은 지역 자체가 한 성안에 모여 있었고, 무반이나 잔반의 가문들끼리 결속력이 있었던 과정에서 만세운동이 공유되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남창은 유림의 이재락 선생이 인산일에 올라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크게 놀라 이 내용을 가져와 석계, 웅촌, 덕신 등에 퍼져있는 학성이씨 가문의 젊은이들과 웃어른들에게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렸다. 실제 남창은 유림들의 근거지는 아니었다. 남창이 장이 열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장날을 이용했던 것이다. 4월 2일은 언양 장날이었는데, 이날 장날에 만세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일본경찰과 헌병들은 각 지역의 장날을 막았던 것이다. 그래서 병영은 장날 다음날과 또 그 다음날에 만세운동을 했던 것이다.
 

이=울산의 중심지인 울산 읍내에서는 만세를 못 불렀다. 대신 주변 지역인 언양, 병영, 남창에서만 만세가 불려진 거다. 왜 울산 읍내 사람들은 가만 있었을까 의문을 가져야 하는데 언양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일본경찰이 알고 울산 전체에 경계령을 낸 거다(장날을 열지 마라고). 원래 울산읍내에서도 준비를 했던 거 같은데 일본경찰이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니까 만세를 못 불렀던 거다. 옆의 병영에서도 장날을 못 열었는데, 장날 다음인 4월 4일에 만세를 부르게 됐다. 병영에서는 장날이 아니라 사람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모였을까? 바로 병영초등학교에서 축구경기를 하는 것처럼 위장해 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여시켰던 거다. 청년들이 아무 목적 없이 학교로 가게 되면 일본경찰들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었다. 그런 의심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바로 축구였고, 그래서 병영초등학교를 가면 교정안에 병영 3.1운동을 묘사한 조각이 있는데 중간에 동그란 원이 바로 축구공을 상징하는 거다.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에는 나이가 장성한 학생들이 있었을 텐데?

1920년초 문화운동의 핵심은 민중계몽운동
울산에서의 가장 역동적인 조직은 청년조직

이=실제 3.1운동 관련해 울산시교육청 사업을 하면서 그 당시 학적부를 볼 수 있었다. 학적부를 보니 나이가 많은 학생들이 의외로 많았는데, 당시에는 10~12살까지 한문을 서당에서 먼저 배우고, 학습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1학년이 아닌 2학년으로 시험 쳐서 학교를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3.1운동 때 나이 많은 학생들은 15~17세이기도 했는데, 당시 15~17살은 결혼도 할 수 있는 연령대였으니 거의 어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3.1운동 직후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일본통치세력이 봤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강렬한 인식을 보여주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통치방식을 바꾸게 됐다. 1919년 말이나 1920년 초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 문화운동이라 불리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된다. 문화운동의 핵심은 민중계몽이다. 3.1운동이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됐지만, 결국 ‘깨우치지 못하면 힘을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민중계몽을 핵심으로 삼고 계몽을 끌고 나갈 수 있는 주체는 젊은 청년이라고 해서 지역과 청년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단체가 마구 생기게 된다. 청년단체는 주로 야학을 만들게 되는데, 야학뿐 아니라 주학(낮에)도 생겨나게 된다. 당시에는 주로 이것을 학교나 학원으로 표현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유명인사를 초빙해 강연회를 듣는 등 다양한 형태로 민중계몽운동을 하게 된다. 이를 문화운동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게 좀 더 지나서 의식적인 깨우침을 주는 운동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 약간의 이념이 들어오게 된다.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면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나’ 생각했던 거다. 주로 폭탄을 던져 독립운동을 했던 의열단도 5년 정도 지난 후에는 방법을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24년쯤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로 들어가게 되며 조직적으로 배우고 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1923년 이후가 되면 의식적이고 목적적인 형태로 운동이 바뀌게 되며,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 등 다양한 형태의 이념이 들어오게 된다. 그런 것이 각 지역에도 영향을 주게 되는데 처음엔 서울, 부산, 평양 등 큰 도시에서 진행됐다가 점차 지역에 파급되기 시작한다. 1925년쯤엔 지역에서도 그런 이념들 때문에 경쟁하고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래선 안 되겠다고 깨달아 1927년에 신간회가 나타나게 되는데, 과연 3.1운동이 없었다면 이렇게 쭉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3.1운동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라고 본다. 총칼의 위협을 느껴가면서 거기에 뛰어들었다는 경험과 각오, 의지가 있었기에 후에 독립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배=울산지역에서는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것이 청년조직이었다. 당시 울산에 만들어진 청년조직이 35개라고 기록돼 있다. 이 수치로 볼 때 청년조직은 울산 각지에 다 있었다고 보면 된다. 울산읍내 중심으로 묶였던 단위들이 울산청년연맹이란 이름으로 모임을 가져나갔고, 병영이나 언양 청년회들이 묶인 게 울산군청년연맹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흐름을 가져갔다. 그런데 성향이 약간 차이가 있었다고 본다. 1925년 넘어가면 대부분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흐름에 같이한다. 1923년에 관동대지진이 터졌을 때 조선인 학살 등 사건 때문에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유학생들이 국내에 잠시 귀환하게 되는데, 유학 시 접했던 사회주의운동, 일본의 노동조합운동 등을 지역 청년들과 교류하고 알리는 소통이 있게 된다. 1924~25년을 거쳤을 때,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사회주의 계열 흐름이 만들어졌던 것이고 이 차이를 해소하자는 차원에서 신간회 운동이 될 때는 울산청년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이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에 이 청년운동이 최소 10년 길게는 15년 이상 흐름을 끌고 왔고, 일제강점기 후반에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문화통치 기간이 깨지고 군사통치로 바뀌는 과정이 되기 전까지는 청년조직의 힘으로 운동들이 전개됐다고 생각한다.
 

이=청년들이 집회를 하려면 안건을 제출해 얘기할 때 반드시 순사가 와 있었다. 순사가 맨 앞자리에 앉아있고, 집회를 ‘무엇 때문에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다. 허락받은 대로 진행이 안 되면 순사가 ‘주의’를 주게 되는데 ‘주의’를 세 번 하게 되면 그날 집회는 끝나는 것이다. 그걸 어긴 사람은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거나 구류를 먹는다. 그렇게 통제하는데도 그것을 뚫고 청년운동이든 독립운동이든 진행이 됐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이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배=1920년을 거치면서 일본이 통치전략을 바꾼다. 반인권적이고 봉건적인 방식인 태형을 없애고 치안유지법이나 출판법 등 다른 형태의 관리가 철저히 이뤄지게 된다. 1927~28년 넘어가는 사이에 울산에서 전국적으로 신간회가 만들어질 때 일본경찰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간회 결성 자체를 막으려고 했다. 그 속에는 울산청년동맹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있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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