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형무소 수감 중 ‘반곡초등학교’ 건립에 땅을 기부한 이관술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2-23 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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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3)

1947년 4월 24~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어난 소요 사건은 교도관들의 구타로 진압됐다. 그 과정에서 수형자 중 스무 명 가까이 징벌방에 갇히는 등 격리처분을 받았다. 이관술은 조용히 단식하면서 형무소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했다.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들을 살펴보면 미군정 법무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정판사 사건 수형자들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관술을 이감했다는 기사는 4월 29일 발행한 <동아일보>에 처음 보도됐는데, 기사에 나오는 4월 19일이란 날짜는 오보로 보인다. 실제로는 4월 26일 이후에 이뤄졌다.

건강이 나빠진 채 대전형무소로 이감

5월 1일에 발행한 <경향신문>에는 서대문형무소 김병원 소장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기자가 탐문한 옥중 단식에 대해 형무소장에게 묻고 대답을 들은 내용이다. 김 소장은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수형자가 약 4000명이라고 밝혔다. 이런 규모는 일제강점기 때 없었다고 덧붙였는데, 그만큼 당시 사회가 혼란했던 것뿐 아니라 사상범이 늘었음을 보여준다.


김병원 소장은 단식에 관련한 답변을 피하고 수형자들을 더 받을 수 없어 지방 형무소로 분산해 이감하는 방침을 밝히면서 이관술을 언급했다. 이미 이감한 이들 중에 이관술, 송언필 등이 대전으로 갔다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다.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단식을 계속한 이들이 위독한 상태로 생명이 우려된다고 했는데, 이관술과 송언필 두 사람을 빠르게 이감시킨 이유이기도 했다. 당시 수감됐던 사상범 중에 이관술은 가장 영향력이 컸고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서대문형무소로 보면 뜨거운 감자와 같았다. 그래서 지방으로 이감을 시키는 게 최선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어진 5월 20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이관술이 정명환 박상근과 함께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뒤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관련 기사는 경향신문을 비롯한 법조기자단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 형무소를 5월 9일부터 방문 취재한 후 연속으로 보도하는 기획이었다. 기사 서두에 기획 의도를 보면 ‘왜정시대 때도 보지 못했던 포화상태’에 있는 형무소 상황이 남조선 인민 생활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이 대전형무소에 도착해 취재한 날은 5월 15일이었다. 그날 형무소장을 면담한 후 수형자들이 있는 옥사도 둘러보았다. 정판사 사건 수형자 중 이감된 이 중 마포형무소에서 온 송언필은 이감 직후 식사 등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강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그러자 교도관들이 쇠고랑을 채웠고 이에 5월 12일부터 단식을 시작해 기자들이 목격한 15일까지 이어가고 있었다.


기자들의 발걸음은 이관술이 갇힌 옥사로도 이어졌다.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매우 수척한 얼굴로 법무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광명>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기자들이 감방순회를 마치고 나올 때가 돼서야 얼굴을 마주쳤는데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고, 형무소장의 말에 따르면 주사를 맞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 1947년 5월 1일 <경향신문> 서대문형무소장 인터뷰

두 평 방안에 5~6명이 갇혀 사는 대전형무소

동행한 법조기자단 중 <민보>의 신문기자가 쓴 기사(5월 23일, ‘남조선 형무소 시찰기’)는 대전형무소의 실상을 보다 자세하게 담고 있다. 형무소의 수용자는 1783명이었고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갇힌 이가 약 200명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말에 형무소 최대 수용자가 1300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더 열악한 상황이란 걸 알 수 있다.


급식은 빈약했고 위생 문제도 심각했다. 기자들이 옥사를 순회하러 들어간 순간 밀려온 악취를 참기 어려웠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관술이 갇힌 기결수 감방은 두 평 크기에 5~6명을 함께 수용하는 형편이었다. 방안을 들여다보면 모두 앙상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대전형무소장 윤용섭은 식량과 자재가 부족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사정이라고 설명한다.


더구나 미군정에서 책정한 1년 예산이 전년도보다 줄어들어 걱정이라는 푸념도 전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취재 당시 5월 중순까지 형무소에서 사망한 수형자가 28명이나 됐고 남은 기간을 가늠하면 1년에 70명은 감옥에서 죽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인은 주로 폐결핵이나 늑막염으로 형무소에 들어와 감기나 기관지염에 걸려도 치료가 되지 않고 더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관술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두 차례 옥고를 겪으면서 모두 폐질환으로 병보석 출감했다. 그런 병력이 있는 이관술에게 대전형무소는 최악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런 이관술 때문이었는지 <민보>의 기사 서두에 일제강점기 혁명투사가 해방 후 감옥에 갇혔다는 말은 결코 허투루 읽히지 않는다.
 

▲ 1947년 5월 20일 <경향신문> ‘지방 형무소 시찰기 上’ 중 대전형무소 부분

 

▲ 1947년 5월 23일 <민보> ‘남조선 형무소 시찰기 上’, 대전형무소 상황

감옥에 면회 온 사촌 동생을 통해 고향 땅 기부

이관술이 대전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찾아온 것은 기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향 범서 입암마을에서 온 사촌 동생 이수은도 있었다. 이관술과 이수은은 담장을 사이에 대고 맞붙은 바로 옆집에 살았다. 작년 가을에 9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수은은 사촌 형 이관술에 대해 매우 각별한 정을 지녔다.


2019년에 발족한 학암이관술 기념사업회 활동에도 애정을 보였다. 필자는 입암마을에 들를 때마다 자주 뵙고 인사를 드렸는데, 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자택에 방문해 이관술을 면회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이수은이 사촌 형을 면회한 것은 가족들을 대표해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있지만, 1947년에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땅을 기증하기 위함이었다.


반곡초등학교는 원래 언양초등학교 분교로 해방 전인 1943년에 문을 열었다. 지금 위치인 울주군 언양읍 반곡리 709번지로 이전한 것은 1946년이었는데, 1947년 학교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 부지를 기증받고 건축비를 모았다.


지금도 학교를 방문하면 운동장 입구와 본관 건물 앞에 각기 다른 공적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비석에 모두 1947년 건립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중 부지를 희사한 이는 모두 4명이며 이관술은 542평(1791.74㎡)를 냈다고 기록돼 있다. 이관술과 함께 이름을 올린 기부자는 가장 많은 땅을 낸 권포양을 비롯해 송석하, 권금성이 있다.


이관술 이름으로 기부된 땅은 아마도 집안에서 소유한 땅을 물려받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고 기부가 쉬운 결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본인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고향에 있는 아내와 딸들의 형편은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주변 친척들이 챙긴다고 해도 가장이 없는 상황에 이르면 돈 한 푼이 아까울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갖고 있던 땅을 매각한 게 아니라 선뜻 기부한 것이다.


이런 결정은 이관술이 원래 항일 혁명운동가 이전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자로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관술은 서울 동덕여고보 교사가 되기 전에도 유학 시절 방학 때마다 고향 울산에서 동기들과 함께 강습소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앞장섰다. 그런 마음은 감옥에 갇혔다고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관술을 대신해 기부 서류를 정리했던 이수은도 당시 면회를 떠올리며 흔쾌히 수락했다고 기억을 전했다.
 

▲ 2019년 초 봄, 이관술과 면회했던 기억을 전해 준 이수은 선생(입암마을 자택)

 

▲ 반곡초등학교에 있는 공적비

 

▲ 반곡초등학교 건물 앞 공적비에 적힌 희사 명단

정판사 사건 이후 멈추지 않는 좌익탄압

정판사 사건이 상고심 기각 이후 종결되고, 관련자들이 중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힌 뒤 세상은 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중단된 후 2차 미소공위를 예정하고 있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한민당 주도 세력 등은 남북을 분리해 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더 굳세게 밀어붙였다.


반대로 좌익계열은 2차 미소공위가 무척 중요했다. 조선공산당이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 등과 통합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단일한 흐름을 만들었으나 내부 진통과 외부의 공세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특히 정판사 사건으로 미군정이 낙인을 찍은 상황에서 민심도 조금씩 균열을 보이고 있던 상황이라 미소공위 재개에 앞서 남북 단일정부 수립을 걸고 여론을 모아 나갔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여운형이 암살당한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 이후 한동안 숨을 고르다 2차 미소공위를 앞두고 복귀한 때였다.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 안으로 난입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지근을 비롯해 극우 세력의 사주를 받은 이들이 공모한 계획 살인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에서 해방 공간의 중요한 정치지도자로 이어진 여운형의 삶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그날의 총성은 분단을 가속화하고, 미군정과 우익 세력이 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는 방아쇠가 됐다.

 

 

▲ 1947년 8월 3일 여운형 장례식에 참여한 대규모 인파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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