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암 이관술 시민 세미나, 범서읍사무소에서 열려

이동고 기자 / 기사승인 : 2019-05-01 16:5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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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은 조작”
경성트로이카 이관술 명예회복을 위한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발족
▲ 24일 울주군 범서읍사무소 2층에서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주최로 시민세미나가 열렸다. 왼쪽부터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좌장을 맡은 손문호 전 서경대 총장, 임성욱 박사, 배성동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이동고 기자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창립

행사장에는 유난히 나이 든 이들이 많았다. 이관술에 관한 영상이 시작되자 관객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울음소리는 통곡으로 바뀌었다. 백발이 성성한 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이었다. 부축을 받으며 행사장 바깥으로 나가는 내내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24일 오후 1시, 울주군 범서읍사무소 2층 회의실에서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창립총회와 시민세미나가 열렸다. 기념사업회 대표는 이일환 씨와 배성동 씨가 공동으로 맡았고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 씨가 운영위원장을, 윤은숙 민예총 부이사장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배성동 공동대표는 경과보고를 통해 원래 울산시청에서 공간을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범서읍은 학암 선생이 태어나고 일제강점기 활동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들어 행사를 이곳 범서읍사무소에서 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2013년, 2016년에 두 차례 이관술연구회를 추진하고자 했지만 무산됐고 2019년 1월 22일에야 학암이관술연구회 준비모임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2월 18일 이선호 울주군수와 면담했고 2월 28일 추진위 3차 모임을 열었다고 설명했다. 3월 7일 학암이관술후원회 간담회와 3월 18일 전체 모임을 통해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로 이름을 확정짓고 조직을 정비해 ‘학암이관술기념사업후원회’와 ‘학암이관술역사포럼’을 만들었다.

시민세미나에서는 임성욱 박사(한국외국어대)가 ‘정판사 위폐사건의 조작과 진실’을 주제로 발표했고,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이 ‘항일독립운동가 이관술’을,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가 ‘화폐위조범으로 몰려 학살된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배성동 대표가 ‘두 울산인, 이관술과 노덕술’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이후 손문호 전 서원대 총장을 좌장으로 배성동, 임성욱, 박만순, 배문석 씨가 종합토론을 이어갔다.

“정판사 위폐사건은 미군정의 조작”

첫 주제발표를 맡은 임성욱 박사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6하원칙으로 간단히 정리하겠다며 “조선공산당 간부와 당원 11명이 1945년 10월 하순에서 1946년 2월 상순까지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 1200만 원어치를, 6회에 걸쳐 매회 200만 원씩 조선공산당 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인쇄한 사건”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작으로 결론이 났다며 이 사실을 6하원칙으로 정리하면 “미군정(CIC, 공보부, 경찰, 검찰, 법원)이 1946년 5월 중순에서 1946년 10월 하순에 조선정판사, 본정경찰서, 서대문형무소, 경성지방법원에서 정판사 위폐사건을 조작하여 피의자들을 체포, 고문, 수사, 기소, 재판을 통해 처벌한 것으로 미군정이 위기를 극복하고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서였다”고 요약했다. 이관술은 이 사건으로 1심에서 박락종, 송언필, 김창선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임성욱 박사는 1945년 8.15 해방 이후 남북은 각각 3년간의 미군정 시기와 소련군 점령시기를 보내는데 미군정 치하 남한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군정 시기는 크게 해방 이후 모스코바 3상회의를 거쳐 제1차 미소공위를 지나는 1차 시기,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렸던 2차 시기,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서는 3차 시기로 나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은 제1차 미소공위(1946년 3월 20일)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5월 8일 발생했다.

당시 미군정은 식량분배와 조폐정책에서 실패한 상황이었다. 해방 전 일제는 퇴각 경비 마련을 위해 조선은행권 100원권 을(乙)권을 대량으로 인쇄 발행했다. 화폐 도안도 단순화하고 품질도 저하된 상태였다. 위조지폐 제작에 최적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군정이 들어섰지만 일제강점기의 불법 통화를 인정했고 조선은행권 100원권 병(丙)권을 인쇄하고 발행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을(乙)권과 매우 비슷했다. 당시에는 위폐 같은 진폐, 진폐 같은 위폐가 범람하고 있었다.


위폐를 만든 곳으로 알려진 정판사는 서울시청과 가까운 일본인 건물인 근택빌딩 안에 있었고 1층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인쇄소가 입주해 있었다. ’적산관리법‘에 따라 미군정으로부터 건물과 함께 인쇄소까지 불하받은 조선공산당은 이 건물 2층에 본부를 두고 1층 인쇄소 이름을 ’조선정판사‘로 고치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3층에서 인쇄했다. 이때 인쇄소 직원들은 모두 일제 때부터 일해 온 이들을 그대로 재고용했다.


1946년 5월초에는 조선정판사 직원 김창선이 징크판(지폐인쇄용 금속판) 판매미수사건으로 본정경찰서에 체포된다. 경찰은 이전에 다른 징크판을 판매한 사실을 밝혀내고 구매자들이 뚝섬에서 위폐를 제조한 사실을 알게 된다. 뚝섬 위폐사건 핵심피의자인 이원재는 대한독립촉성 국민회 뚝섬지부 조직부장이었고 위폐사건에 우익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수사 과정에서 징크판이 조선정판사 기술과장인 김창선으로부터 나왔고, 당시 조선공산당이 근택빌딩에 입주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사건은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조작됐고 1946년 5월 15일 미군정 공보부가 사건을 공식 발표했다.


조작 증거는 여러 가지다. 1차 위폐 인쇄일이 '10월 하순경'으로 표시돼 범행 사실이 육하원칙에 의해 기술돼야 한다는 형사소송법 기본원칙을 위반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발언을 인정하지 않고 경찰과 검찰 수사기록만을 인정해 공판중심주의 원칙을 위반했다. 초기 경찰조서에서 허위자백한 정황은 고문의 간접증거가 됐다. 이 고문에는 악독한 친일분자 노덕술이 참여했다. 정판사 위폐사건의 증거물로 제시한 사진은 사실 ‘뚝섬 위폐사건’의 증거물이었다. 임 박사는 결론적으로 당시 미군정의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 꾸며낸 조작사건으로 반공주의적인 분열통치술이었다고 주장했다.

동경고등사범 졸업 동덕여고보 교사
식민통치 맞서 항일 사회주의운동가로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은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을 주제로 이관술의 삶을 조명했다. 어려서부터 수재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이관술은 중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해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 유학생들은 대부분 1920년대 초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관술은 사회주의 사상을 알기는 했지만 자신을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에 한정지었다. 배문석 사무국장은 이관술이 처음부터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가 될 마음보다는 약소민족의 청년으로 민족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는 데 필요한 부분을 얻고자 하는 소극적인 태도였고, 결국 민족해방을 위한 길을 걷다가 어떤 계기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관술은 1929년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경성에 있던 천도교가 운영하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존경받고 안정적인 지위였지만 조국의 현실은 이관술을 식민통치와 맞서는 항일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타계한 후 충청도 보령 출신의 갑부 이석구가 교주가 된 후인 1930년대 동덕여고보에는 한글운동가인 이윤재를 비롯해 민족의식이 뛰어난 교사들이 여럿 재직했다. 이윤재가 학교를 떠난 후에 온 신명균은 <한글>의 편집 겸 발행인인 최현배, 권덕규, 이병기 등과 활동했는데 이관술과 행동을 같이 했다. 수학교사였던 백남규도 동경수학전수학교에 유학할 때 유학생 대표를 맡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이로, 대종교의 국내 비밀결사에 가담했고, 만국공용어인 에스페란토를 항일을 위해 보급한 선구자다.


이관술은 부임 후 바로 역사와 지리를 맡았다. 동경 유학생 출신의 엘리트 교사지만 학생들에게는 부임 초기엔 ‘물장수’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촌스러운 외모의 선생님으로 제자들은 기억했다. 동덕여고보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거 입학한다. 이효정(1913~2010)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다른 학교 항일학생운동에 참여해 징계를 받고 편입한 사례도 있었다. 일제에 항거한 학생운동과 적색노조운동을 했던 이종희, 이순금도 1932년 졸업생이었다. 


이관술의 삶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은 1929년 10월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 3.1 운동 이후 10년 만에 터진 만세운동이었고 1년 이상 지속돼 신간회를 통해 전국으로 확대됐다. 경성까지 도착한 만세운동은 학생들의 궐기와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 학생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민족계몽을 명분으로 학교를 운영한 인사들은 일본 총독부의 눈치를 보았고, 만세운동 확산을 막기 위해 휴교를 하거나 조기방학을 함으로써 일제에 순응했다.


동덕여고보 학생들은 이화와 숙명, 배화 등과 함께 동맹휴학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1929년 12월 7일과 11일 경성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동덕여고보 학교재단은 일제 압박에 못이겨 겨울방학을 앞당기는 등 동맹휴학을 막으려 했다. 


해를 넘겨 1930년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2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여성단체 근우회가 앞장서고 경성지역 여학교 대부분이 참여해 ‘경성여학생운동’으로 불리는데 1월 15일 아침 9시 30분 학생들은 일제히 운동장으로 나와 만세와 구호를 외쳤다. 


이날 만세운동은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의 거리 진출을 막기 위해 종로경찰서 기마경찰까지 출동할 만큼 급박했다. 경성 여학생들의 2차 만세운동은 다음날 16일부터 서울뿐 아니라 평양, 개성, 부산, 함흥, 청주, 춘천 등 전국으로 퍼져갔다. 집계로는 총 320개 학교 5만4000여 명이 참여했고, 구속자는 1642명이었다. 이 일로 퇴학당한 학생이 582명이고 무기정학이 2330명이다.


1929~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각 지역의 학생 만세운동은 신간회와 근우회가 이후 해체를 결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의 항일투쟁과 지원 방식에 드러난 갈등 때문이었다. 동덕여고보와 연관이 깊었던 근우회도 사회주의 계열이 속속 연행, 구속되면서 사실상 해산과정으로 들어갔고 분열의 한쪽 편에 섰던 근우회의 민족주의 계열은 대규모로 이탈한다. 


당시 이관술의 회상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학생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불같이 열렬한 데 반해 교사들은 냉담하고 비겁하다는 것,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반일투쟁적이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걸 통해 '반일적이지 않은 민족주의자'라는 것인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되물었고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산층이 반일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고 일찍이 전공하던 역사연구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았던 유물사관이 민족해방 투쟁에서 유일한 지침으로 실천노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경성반제동맹사건으로 첫 구속

이관술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거치면서 변화된 제자들처럼 사상적인 성장을 거둔다. 이때 이효정은 독서회를 만들고 이관술과 연계를 맺는다. 학교 측은 동맹휴업을 주도한 3,4학년 참가자 대부분과 100여 명에게 제명처분을 내린다. 이관술은 동료 교사 신명균과 함께 학생들의 편에 서서 학생들의 처벌을 풀라고 요구했다. 교사들이 전원사직 입장을 밝힐 때도 이를 주도했다. 학교 측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교원의 사직을 반려하고 학생들을 복직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이효정 등 10여 명의 단식투쟁 등으로 학생처벌은 완전 무효화됐다. 


이후 일제 경찰은 ‘경성RS독서회’라는 검거사건을 일으켰다. 이관술의 제자 이효정, 박진홍, 이순금, 이종희가 연행되고 박진홍은 구속된다. 이때부터 이관술은 교사 신분을 넘어 본격적인 실천활동에 나선다. 독서회를 지도했고, 경성반제국주의동맹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반제동맹은 1931년 9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만주침공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걸고 처음 결성됐다. 반제동맹의 주요 활동은 공장의 노동자와 학교 학생들을 일제에 항거하는 통일된 조직으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방법으로 독서회를 우선 조직하고 활동 구호는 △식민지 노예교육의 반대 △학교 내 경찰 침입의 반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철폐 △졸업생 취직에 대한 학교의 책임 부담 △여자교육에 대한 남존여비적 교육 반대 등이었다.


경성반제동맹의 주동자는 이관술, 이순근, 조정래였다. 이순근은 중동고보 동창으로 이때부터 해방 이후까지 행보를 같이하는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경성반제동맹은 1932년 동경에서 개최되는 태평양연안제국 반제국주의민족대표자회의에 조선의 독립투쟁을 지원 요청하고자 직접 참가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일제경찰에 발각돼 43명이 연행된다. 이때 이관술은 처음으로 체포되어 구속된다. 이관술은 체포 이후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후유증으로 병보석 가석방돼 고향 범서로 내려온다.

경성트로이카, 운명처럼 만난 이재유

이관술은 출소의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경성트로이카’와 이재유라는 인물을 알게 됐다. 여동생인 이순금도 이재유 그룹에서 활동했고 옥고를 치렀다. 이재유는 1933년 적색노조파업을 이끌었고,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여러 갈래 중 정점에 있었던 일제강점기 후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932년 12월부터 1933년 12월까지 약 1년 동안이 경성트로이카 1기였고 이관술은 범서를 떠나 다시 경성으로 돌아가, 경성트로이카 2기에 결합했다. 1934년 9월 이관술과 이재유는 운명처럼 만났다. 트로이카의 나머지 한 자리는 경도제대로 유학했던 박영출이 채웠다. 하지만 이듬해 1월 박영출을 비롯한 42명이 일제 경찰에 의해 대규모로 검거된다. 


다행히 이관술과 이재유는 검거를 피해 산중으로 은거했고 3월 신분을 위장하고 경기도 양주군에 정착했다. 김해에서 수재가 나서 상경한 농민으로 위장했는데 주재소 경찰마저 믿을 만큼 신분을 완벽하게 속였다. 둘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워 상당한 수익을 내고 동네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등 놀라운 도피 생활을 했다.


이재유는 경성에서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의 기관지인 <적기>의 제작과 발행을 맡았다. 3호까지 등사를 마치고 1936년 12월 25일 이재유가 집을 나섰다가 체포됐다. 이관술은 다시 도피 길에 올랐고 그날이 항일동지 이재유와 마지막 작별일이 된다. 이재유의 검거는 <경성일보> 1면에 크게 실렸다. 이재유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만기를 채우지만 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청주보호감호소로 옮겨 계속 옥고를 치르다 1944년 10월 26일 옥사한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박헌영을 경성콤그룹 지도자로
같은 울산 출신 노덕술에 고문


이관술은 1939년 1월 이순금을 만난 뒤 조직재건에 들어가 전국에 흩어져 있던 김삼룡(충주), 정재철(부산), 권우성(마산), 이기성(마산) 등을 만났다. ‘경성콤그룹’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기관지 <꼬뮤니스트>(1939년 9월)를 발간했다. 출판과 인쇄는 이순근과 안동 출신 권오직이 주도했다. 경성콤그룹은 일제강점기 말 가장 대표적인 국내 항일독립운동 조직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다양한 사회주의 계열 항일조직이 만들어지고 해체되길 반복하는 와중에도 독보적이었다.


이관술은 1920년대 초반부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던 박헌영을 만나기로 마음먹는다. 이관술이 박헌영(1900~1956)을 만난 것은 1939년 12월 12일이었다. 이관술은 박헌영을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 세우고자 했다. 박헌영은 이관술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표를 맡는다. 그 뒤 이관술은 1940년부터 함경도로 잠입해 청진과 흥남지역 노동자들 조직과 접촉하고 광산 노동자들을 규합해 일제에 항거하는 활동을 한다. 


1941년 이현상과 김삼룡이 잇달아 체포되고 이관술은 경인지역의 공백을 정비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오지만 수배된 지 6년 만에 잠복한 형사들에게 체포된다. 이때 같은 울산 출신인 노덕술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받게 된다. 노덕술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 특채돼 경찰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한 대표적 친일파로 잔인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고문받은 일을 회고한 이관술의 글 내용은 놀랍다.


“나의 과거 생활 중 가장 유쾌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포되었을 때 박헌영 동지와 동생 순금의 주소를 말하라고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 기로에 처했는데 나는 죽기를 맹세하고 13일간 단식하다가 전에 함남 지방에서 일하는 것을 이용하야 허구를 꾸며서 그들을 감쪽같이 속인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만큼 대범한 인물이었다. 


고문으로 병을 얻은 이관술은 1934년 말 병보석으로 3개월간 가석방된다, 고향 입암리에서 몸을 추스르게 되는데 범서면사무소 옆에 위치한 주재소 순사가 검은 제복을 입고 집 앞을 지켰다. 보석 기간이 끝나기 전에 이관술은 입암리를 탈출해 동지들을 만나고 다녔다. 이관술은 1급 수배자였는데 어떤 때는 숯장수로, 어떤 때는 땜쟁이로 변장해 곳곳을 누볐다.

해방후 여론조사 ‘뛰어난 정치인’ 5위

해방이 됐다.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평양을 점령할 때까지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서 출발해 북상 중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아베 노부유키가 마지막 총독으로 남아있었고, 여운형, 조만식 등이 이끈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구성돼 전폭적인 지지 속에 활동했지만 9월 7일에 도착한 미군정에 의해 활동이 중단된다.


조선공산당 재건파인 박헌영은 이에 앞서 9월 4일 ‘미군당국과 절충할 인민총의의 집결체’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며 여윤형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다. 9월 6일 저녁 1000여 명의 민중 대표들이 서울 경기여고에 모여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중앙정부 역할을 하는 중앙인민위원회의 위원과 후보위원, 고문을 선발했다. 주석은 이승만, 부주석은 여운형, 국무총리는 허현. 내무부장은 김구, 외무부장은 김규식, 재무부장은 조만식, 군사부장은 김원봉이, 선전부장은 이관술 등등이 맡았다. 조선공산당만이 아닌 국내외 독립운동가와 죄우익을 총망라한 형태였으나 실권은 공산당 측에 좀 더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진주한 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인정을 하지 않았다.


미군정청이 새로 정당등록을 받았는데 54개였고 1년 이내에 300여 개로 증가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가장 영향력이 큰 정당은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이었다. 이관술은 조산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하고 1945년 2월 좌익단체 총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이관술의 입지는 우익성향의 단체인 ‘선구회’에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로 알 수 있다. 가장 역량이 뛰어나고 양심적인 정치가를 물어본 1차 조사 결과는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최현배 7%, 김규식 6%, 서재필 5%, 홍남표 5% 순서였다. 이 결과를 통해 이관술이 해방 전 항일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신뢰받는 정치인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고 분석할 수 있다.

1950년 대전형무소에서 불법 학살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는 ‘화폐위조범으로 몰려 학살된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주제로 발표했다. 박만순 대표는 한국전쟁 때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된 정치범을 연재기사로 낸 적이 있고 그 와중에 이관술을 다루게 된 계기로 자신도 주제발표에 초대받았다고 말했다.


이관술은 한국전쟁이 터질 때 대전형무소에 정치범으로 있었다. 이준영 씨의 증언을 통해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혀낸 이관술의 최후는 이렇다. 6.25가 터지고 7월 1일 공산당 책임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새벽에 대규모 적의 공습이 있으니 검사장이 전화로 사살하라 지시한 것이었다. 형무소 간수 대부분은 후퇴하거나 출근하지 않은 상태라 재소자들이 탈출을 시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별경비대(특경대) 이준영은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지만 재소자들을 쉽게 죽일 수도 없는 일이고, 어느 선까지 죽여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김택연 소장도 검사장을 만나 확인하자고 했고 둘이 같이 검사장을 만났는데 같은 명령이었다. 소장관사로 오니 법무부 교정국장과 장, 차관들은 부산 방면으로 피난 가기 위해 허둥댔다.


7월 3일 헌병대 짚차에 이어 지에무씨(GMC) 트럭 수십 대가 대전형무소 안으로 들이닥쳤고 심용현 중위가 “야, 재소자들 전부 인계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헌병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기에 간수들은 재소자들의 손을 노끈과 광목, 철사로 묶기 시작했다.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서울에서 이감된 이관술과 송언필을 실은 트럭은 대덕군(현재의 대전광역시) 산내면 골령골로 향했다. 골령골에 도착한 인솔 책임자 이준영은 이관술을 포함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헌병대에게 인계했다. 사전에 인근 주민과 청년방위대원들을 시켜 파놓은 세로 1m80cm, 가로 50cm 구덩이가 여러 개 있었다. 제일 먼저 학살된 사람은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인 이관술이었다.


심용현 헌병대 중위가 “어이~ 이관술, 너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 부를 수 없냐?”고 하니 이관술은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라고 답했다. 이 대목에서 이관술은 사회주의자였지만 남북통일에 관심이 많았던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관술이 “조선”이라고 외침과 동시에 헌병과 경찰들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고 이관술은 ‘악’ 소리 한 번 못하고 고꾸라졌다. 심 중위는 이관술의 뒤통수에 권총을 들이대고 확인사살했다. 이관술이 죽던 날 송언필도 죽었고, 이후 며칠간 진행된 ‘피의 살육제’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과 대전, 충남 보도연맹원 1800~3000명이 학살됐다.


이관술은 1950년 대전형무소 사건으로 대전 산내에서 불법적으로 학살됐다는 것이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확인했다. 사법부 역시 유족들에게 국가손해배상을 결정했다. 박만순 대표는 "그 당시에  ‘조선정판사 사건’ 진실 규명은 안 된 상태였는데 임성욱 박사의 논문으로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15년 동안 민족해방운동에 전심전력했고, 이로 인해 두 차례 5년간의 옥살이와 8년간의 수배 생활을 했기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돼야 한다는 의견이 울산과 경주지역에서 모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두 울산인, 이관술과 노덕술

배성동 공동대표는 ‘두 울산인, 이관술과 노덕술’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배성동 대표는 한국 호랑이를 찾아 러시아, 중국 등 한반도 주변국을 추적하면서 내린 결론은 ‘호랑이 루트와 독립군 루트는 동일하다’는 것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배 대표는 “울산에는 3대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박상진, 이관술, 노덕술”이라면서 “노덕술은 잘못된 과거 역사 청산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노덕술(盧德述, 1899~1968)은 경남 울산군 대현면 장생포 출신으로 일정고등경찰, 해방 후 반공헌병경찰로 변신해 서훈 5개를 받았다. 1940년 조선총독부 공로상신(중일전쟁에 적극 협력), 1941년 조선총독부 훈8등 서보장, 1950년과 1951년 화랑무공훈장(훈4등급, 전시비상사태 전투참여 유공자), 1953년 충무무공훈장(훈3등급, 전시비상사태, 전투참여유공자) 등이 그것이다.


두 사람은 세 살 터울로 울산에서 태어난 같은 동향인이다. 애국과 매국의 길을 걸었던 둘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 경찰이 되기 위해 ‘마쓰우라 히로’로 개명한 노덕술은 누구보다 일본제국주의에 헌신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을 자행했던 인물로 죽음도 극과 극이었다. 이관술은 48세 나이에 해방조국의 형무소에서 처형됐고, 노덕술은 출장고문, 조작의 달인, 고문왕으로 악명을 떨쳤지만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배 대표가 학암을 알게 된 것은 부산, 울산, 밀양, 양산, 청도, 경주를 무대로 활동하던 ‘신불산 빨치산’을 탐사하던 때 어느 퇴역 빨치산이 남긴 말을 통해서였다. “사상적으로 동요를 일으킬 수 있는 통도사를 불태워야 한다는 지도부 산중회의가 한창일 무렵, 울산 범서로 보급투쟁을 나갔다. 범서하면 부자 동네로 보급투쟁을 나가면 반동 지주들을 손보기 마련인데, 이관술 집이 있는 선바위 마을은 건들지 않았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인들은 자기네 나라와 가까운 울산 장생포에 대거 진출했다. 장생포는 그들의 고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그 마을에 노덕술 생가가 있다. 배 대표는 근처에 세워진 고래 갈비뼈는 마치 식민지 역사 아가리에 걸린 가시처럼 청산하지 못한 과거 역사의 상징물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고래 전진기지로 개방한 장생포엔 왜인들이 많았고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란 노덕술은 일찍이 일본말과 일본문화를 접하고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왜인들을 보고 자라면서 출세 지향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 잡화점에서 잠시 일하다가 일본 홋카이도를 다녀왔고 왜인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다고 추정했다.


당시는 너도나도 순사나 소사가 되고자 하는 열풍이 불던 시절이었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한해 전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 순사교습소에 지원, 교습소를 졸업한 후 경상남도 보안과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노덕술은 1921년에 울산경찰서 순사부장이 된다. 비록 학력도 낮고, 든든한 배경도 없었지만 그는 승승장구했다. 1923년 울산경찰서 순사부장 시절에는 부패 경찰로 고소당하지만 1924년 말 경부보 시험에 합격해 경부보로 경남지역을 돌다가, 1933년 드디어 경부(경감)가 된다. 조선인으로 올라갈 수 있는 꼭대기인데 1943년 한반도에는 1만9328명(순사보 제외)의 일제 경찰이 있었고, 이 가운데 조선인 경찰은 겨우 86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은 만족하지 않고 1943년 9월 30일경 드디어 경시(총경 급)에 오르게 된다. 조선인 가운데 일제 경찰로 경시를 단 사람은 35년 강점기를 통해 21명뿐이었다. 노덕술을 제외하고는 조선인 경시들은 이미 대한제국시대부터 경찰 경력이 있거나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대부분이었다. 그가 낮은 학력으로 경시를 달았다는 것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것이고 일제의 눈에 들기 위해 항일인사나 항일사상을 가진 이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고문했다는 반증이다.


이관술도 항일독립운동을 하면서 많은 고문을 당한다. 그중에 노덕술에게 취조를 당하면서 받은 고문이 세 번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1월 7일 이재유가 체포된 뒤 지하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이던 이관술이 저명한 국문학자인 김태준과 함께 체포된다. 그의 회고록에 하필 그를 취조하던 인물이 울산 출신인 노덕술이었음을 밝혔다. 노덕술은 수배 6년 만에 검거된 이관술에게 고문을 가했다. 민족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일제 경찰의 고문을 당해본 이들의 공통된 증언은 일본인 형사보다 조선인 형사가 더 지독하고 악랄했다는 것이다.


해방 후 좌익활동을 많이 다뤘던 작가 이병주는 그의 작품 <남로당>에서 이관술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관술은 몇 번이고 체포되고 어떤 혹독한 고문을 받아도 전향하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 고문왕이라고 알려진 노덕술이라는 경찰관이 있었는데, 그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어떤 공산주의자들도 배겨나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관술은 노덕술의 손에 세 번 걸려 세 번 죽었다가 네 번 되살아났는데도 전향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전향을 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는 눈부신 존재였습니다.”


한편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고문과 공작기술이 군사독재정권으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그의 고문 공작기술은 박처원, 이근안 등 현대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고문기술자들에게 전수됐다.

 
이관술은 노덕술에게 온갖 수모와 악행을 당한다. 특히 양손을 치켜 묶고 얼굴에 수건을 씌워 주전자로 고춧물을 부으면 폐로 들어가 폐가 망가지는데 1941년 노덕술의 물고문으로 폐병이 들어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해방 후 노덕술은 1946년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당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이었던 이관술에게 세 번째 고문을 가한다. 친일경찰에서 우익반공경찰이 된 그는 친일세력의 전폭적인 조력을 받아 더 악독한 인물이 된다.


노덕술의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한 이관술은 결국 허위자백을 한다. 재판에서 고문 때문에 허위자백을 했다고 밝히지만 재판부는 이관술에게 무기종신형을 선고했고, 이는 전쟁 중에 무고한 처형으로 이어진다. 


노덕술과 이관술의 악연은 2014년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에서 ‘울산의 인물’이라는 인물대백과사전 형식의 책자를 만드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587명이 선정됐는데 노덕술과 이관술이 나란히 오른다. 노덕술의 친일 문제가 거론되고 ‘악질 친일경찰이 울산의 자랑스런 인물이라니’식으로 비난 여론이 들끓자 선정위원회는 재선정 작업을 거쳐 이관술과 노덕술을 아예 제외한 586명을 최종 선정한다. 이 둘의 악연은 죽은 뒤에도 이어진 셈이다.


노덕술이 다시 고향인 장생포를 찾은 것은 1956년, 그동안 비호를 받던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의 눈 밖에 나면서 예편해 울산에 내려와 칩거한다. 그는 자유당 후보로 공천을 신청했지만 공천을 받지 못한다. 1960년 7월 61세 나이로 제5대 참의원선거에서 울산 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2000표(4.24% 득표, 6위)로 꼴찌를 차지한다. 좌익을 분쇄한 반공주의자라고 떠벌렸지만 추악한 그의 과거를 아는 고향 사람들이 모두 외면했다. 이후 그는 서울에서 흥신소 사업을 하다 1965년 탈선 혐의로 영업허가를 취소당하고 흥신사업법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가까운 인척은 장생포를 떠났고 장생포 사람들도 노덕술 이야기를 꺼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두 개의 이관술 비

학암 이관술의 비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지상의 언양 반곡초등학교 희사방명비이고 또 하나는 이관술 막내딸이 일생의 소원으로 세운 유적비 ‘애국지사학암이관술유적비’다. 이관술이 감옥에 있을 때인 1947년 울산군 언양면 반곡리에 국민학교를 세우는 운동이 벌어졌다. 4인의 독지가가 땅을 기부했는데, 총 5715평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관술이 그 중 542평을 기증한 것이다. 무기징역에 처해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그의 가세가 기울어 가족생계도 어려운 마당에 500여 평 땅을 반곡국민학교를 세우는데 선뜻 기부한 것이다. 이관술의 이름은 반곡초등학교에 세워진 송덕비에 들어있다. 애국지사학암이관술유적비는 울산 우익단체에 의해 강제로 철거돼 여전히 그의 생가 앞 밭에 묻혀 있다. 이관술은 두 번 죽임을 당했다.


배 대표는 “이관술은 울산인을 넘어선 민족의 지도자다. 인도주의자이자 참교육자이고, 지금은 잊혀진 이름이 된 항일 슈퍼스타”라며 “이제 학암 이관술, 그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에는 이관술 생가가 있고 이곳에는 어떤 안내판도 없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정치학과 교수는 “오늘 범서에서 뜻깊은 세미나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우리끼리만 한 것은 아쉬운 일”이라며 “박근혜 정부가 온갖 무리수를 두면서 왜 국정교과서를 만들려고 했는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해방 후 71년 역사 중 이승만 이후로 60년 동안 장악했던 그들은 국정교과서로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만들어왔다”면서 “60년을 우익정권이 정보를 취사선택하면서 가르쳐왔기 때문에 인생관, 역사관, 신념이 되어 태극기 부대가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진행자가 이관술의 막내딸인 이경환 여사에게 마이크를 넘겨 한마디 말을 들으려 했지만 계속 울먹이기만 했다. 막내딸의 나이가 벌써 84세. 한편 이 자리에는 학성이씨 집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학암 이관술의 명예회복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동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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