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덴마크 노동박물관

이기암 기자 / 기사승인 : 2019-10-23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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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박물관은 전통을 이어가며 매년 12월 코펜하겐 사람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노동자들은 콘서트, 강의, 주일학교, 암송 및 공연을 위해 연회장에 모였다. 코펜하겐의 많은 노동계급 어린이들에게는 이 홀의 연례 크리스마스 파티가 정말 중요한 행사였다. ⓒ이기암 기자


<기획취재순서>

 

1. 노동박물관이 품은 노동존중 세상을 말한다
2. 핀란드 탐페레 노동박물관의 특별한 자부심
3. 섬유공장을 되살린 스웨덴 노르셰핑 노동박물관
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덴마크 노동박물관
5.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독일 함부르크 노동박물관
6. 청계천에서 구로공단까지... 전태일기념관과 구로노도체험관
7. 노동역사를 담은 그릇, 석탄박물관과 강제동원역사관
8. 울산노동역사관에서 노동박물관으로 한 걸음 더


높은 임금보다 고용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된 덴마크 


덴마크는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는 복지국가다. 이 때문에 덴마크에서는 이직이 쉽게 이뤄지며, 국민들도 이직에 대한 여러 가지 걱정과 부담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약 5주간의 ‘건강격리기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을 보낸 후에는 원래 받았던 임금의 80~90%에 이르는 실직수당을 약 2년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용들은 모두 세금으로 충당한다. 이처럼 덴마크 노동자들은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이 될 때까지 꽤나 긴 시간 동안 경제적인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다. 덴마크는 실업자에게 7년간 주던 실업급여를 4년으로 단축했고, 이후에 또 2년으로 줄였다. 우리나라도 실업급여제도가 있긴 하지만,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여러 요건이 있고 또한 그 기간 역시 아주 길지는 않는 걸로 알려졌다(보통 한국의 실업급여는 실업자에게 평균 월급의 50% 수준으로 90~240일만 지급한다). 사람들이 이직을 쉽게 하고, 해고도 자주 이뤄지기 때문에 덴마크의 고용안정성은 세계적으로도 낮은 편에 속한다. 물론 이에 대해 덴마크인들은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덴마크 노동시장 환경은 고용안정성은 낮지만 고용률은 높게 나오는 특징을 보여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통계에 따르면 덴마크의 고용률은 73.1%에 이른다. ‘해고’가 쉽게 이뤄지는 만큼 사업주들도 새로운 인력을 재고용하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다. 과거 1960~1970년대에서는 일부 노동자들은 많은 임금을 받았지만, 실업률은 높아졌던 적이 있다. 이에 1990년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높은 임금보다는 고용문제(높은 고용률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깨닫게 됐다.
 

▲ 덴마크 노동박물관 상점은 복고풍 장난감, 종이인형, 나무악기, 목재기구, 에나멜머그컵 등 다양한 제품과 영어와 덴마크어로 된 책들이 구비돼 있다. 구식 과자를 즐기고 1950년대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도 있다. ⓒ이기암 기자


▲ 덴마크 노동박물관 내 상점의 다양한 물품들 ⓒ이기암 기자

1899년 덴마크의 노동자간 대 타협 ‘September Compromise' 


덴마크는 1899년 혹독한 노동분쟁을 겪으면서 같은 해 9월 1일 ‘September Compromise’라고 불리는 사용자와 노동자 간 대타협을 이뤄냈다. 이 타협이 이뤄지기 전까지 양측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4만 명이상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못했고, 많은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기아상태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이 대타협이 이뤄진 후, Danish Employers' Confederation(DA)로 대표되는 사용자단체와 Danish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LO)로 대표되는 노동자단체 간 단체협약을 바탕으로 임금 등 노동조건을 규율해 오는 전통을 확립하게 된다. 오늘날 덴마크 노동자의 67%가 노조에 가입해 있고, 노동자의 약 80%가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음에 따라 노사 간 단체협약이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규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덴마크 정부는 임금 등 노동조건의 구체적 내용은 사용자단체 및 노동자단체 간 협의 결과에 맡기고 협상이 결렬됐을 때만 개입한다. 다만 실업급여 수급 조건 변경 등 중대한 노동개혁 조치에 있어서는 노사 단체와 적극 협의를 이끌어간다.

토르발드 스타우닝. 노동자 출신의 첫 사회민주당 총리

덴마크의 노동역사를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토르발드 스타우닝(Thorvald August Marinus Stauning)이다. 아주 평범하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지낸 스타우닝은 일찍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운동(유급휴가, 병가 등의 문제)을 하며 17살이 되던 해 처음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33살에 덴마크 의회 멤버가 됐으며 첫 번째 노동자 출신 총리가 된 인물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가정상황이 좋지 않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해야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꾸준히 일을 했고, 보통교육과정을 마친 후에는 담배공장에서 일하며 처음으로 노동단체 멤버가 됐다. 스타우닝은 이때부터 노동자들을 위한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1910년부터 1939년까지 사회민주당 대표를 역임했으며 두 차례에 걸쳐 덴마크의 총리를 역임한다.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기는 세계 1,2차 대전 시기로 덴마크는 독일 나치에 의해 점령까지 당하게 되는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나치의 점령을 받자 스타우닝은 사회민주당에 보수당과 좌익당을 포함시켜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초기에는 독일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많은 국민들은 이러한 스타우닝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다. 스타우닝은 국민들의 정서를 의식하며 나치 독일에 항거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박물관 측 관계자는 당시 스타우닝의 사무실이 바로 이 노동박물관 건물에 있었다고 한다.
 

▲ 토르발드 스타우닝(Thorvald Stauning)은 덴마크에서 노동자 출신으로는 최초로 총리가 된 인물이다. 스타우닝의 사무실이 바로 현재의 노동박물관 건물에 있었다. ⓒ이기암 기자


나치 점령이 끝난 이후 덴마크 경제의 변화

1950년대,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나치의 덴마크 점령이 끝난 후 덴마크 경제가 번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커피바는 덴마크 노동자문화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50년대에는 코펜하겐 전역에 커피바가 상당히 많았다. 여기서 바쁜 노동자들은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신문을 읽기도 했다. 이때부터 덴마크의 일상생활에서 미국의 영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당시 커피바에서는 북미 병사들이 원하는 코카콜라가 있었고, 노동자들이 선호하는 ‘양키바’를 구입할 수 있었다. 또한 1950년대에는 텔레비전을 빼놓을 수 없는데 덴마크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은 1951년에 시작됐으며, 젊은이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당시 텔레비전 가격은 일반노동자의 6개월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텔레비전을 쉽게 구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세계대전이 끝난 후 코펜하겐에서는 주택이 부족했으며, 그로 인해 젊은이들이 이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한다.

1879년, 코펜하겐 노동박물관 설립되다

코펜하겐 노동회관 건물은 1879년 덴마크 내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노동자들을 위한 연회장이었다.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이 건물은 덴마크 노동운동의 중심으로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코펜하겐과 덴마크 전역에 약 40여 개의 노동 회관 건물들이 생겨났지만 이곳이 지닌 위용과 상징성에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건물은 코펜하겐의 노동자들의 노조 모임, 교육 활동과 사회적 기능 등을 제공했다. 덴마크의 수많은 노조들이 이 건물에 사무실을 갖고 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이 건물을 비롯해 ‘노동자’ 같은 특정한 계층만을 위한 회관들의 중요성은 점차 떨어지게 됐다. 여기에 건물도 점차 노후화 되면서, 여러 노조들은 좀 더 새로운 건물로 사무실을 옮기길 희망했다. 결국 1970년대 후반, 당시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덴마크전국노동조합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Labour Unions)가 건물의 소유권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비슷한 시기, 코펜하겐의 여러 풀뿌리 시민운동 단체들은 덴마크 도시의 노동자 거주촌과 이들의 생활 유산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에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에 덴마크 노동박물관을 설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동시에 코펜하겐 노동회관을 박물관 장소로 활용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에 노동박물관은 1982년에 공식 설립됐으며, 덴마크전국노동조합협회가 건물을 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 박물관의 첫 전시는 1983년 일반인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됐다. 1984년에는 노동회관 건물이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동시에 덴마크 노동박물관 또한 덴마크 역사를 다룬 국립 박물관으로 승격됐다. 이후 박물관 운영의 전반에 있어서 노동조합협회는 기증, 기여, 나아가 박물관 운영에 필요한 비용 등에 큰 역할을 해주게 된다. 최근에는 덴마크 정부에서 나오는 국가지원금이 박물관 운영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박물관의 신규 전시 기획 및 건물 유지보수 비용은 사립재단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 1890년 5월 1일 8시간 근무가 처음 논의됐다. 덴마크의 8시간 근무제는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뤄졌다. 당시 대부분 노동자들은 10시간을 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1919년 5월 6일 덴마크상공조합과 덴마크노동조합이 시간을 명시한 단체협약서에 합의한다. 그리고 일주일 후 농업과 항만분야를 제외한 모든 노동과 산업분야에서 하루 8시간 노동을 적용할 것을 명시했다. ⓒ이기암 기자

 

어린이노동박물관과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전시

과거에 덴마크의 평범한 노동자들의 아이들은 생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일을 해야 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6~7세)까지는 과거 궁핍했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동생들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했고,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점심시간까지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그 후에 일하러 갔다. 고학년이 돼도 여전히 학업에 집중하기보다는 일을 계속 했다고 한다. 이에 덴마크는 1873년에 이미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의 노동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됐다. 덴마크 노동박물관 관계자는 어린이노동박물관, 그리고 코펜하겐 초기 산업기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전시가 딱히 시민 또는 특정 이익대변단체(노동단체 포함)에 의거해 추진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전시의 경우, 이주노동자의 후손들과의 교류를 통해 당시 이들의 삶에 대해 재현하는 식으로 표현됐다. 당시 노동자들의 아파트를 고증해 놓은 전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전시를 처음 기획 및 설치한 것은 1990년대인데 박물관에서 먼저 추진한 프로젝트였고, 어린이노동박물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현지 공동체(커뮤니티)들이 코펜하겐 노동박물관의 전시 기획과 개발에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이야기라고 한다. 현재는 덴마크 노동박물관 활동에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덴마크 이민국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첨단기술을 가진 외국인 노동자수가 500% 증가했다고 한다. 이들은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들이며 덴마크 정부에도 많은 세금을 내기 때문에 사회복지에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박물관 측은 이러한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젊은 층에게 짧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다가가면서 이들이 원하는 전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이들을 더 박물관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민주시민 참여, 강제노동 등을 다루는 특별전시

일반인들에게 접근이 허락된 코펜하겐 노동박물관 전시는 상설전, 특별전, 그리고 이벤트 행사가 있다. 특별전은 이 중에서 특정 역사적 사건과 현상을 연결하고, 나아가 현재 덴마크 사회와 노동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특히 미래의 노동에 대한 고민)들을 다루는 데 집중한다. 최근 박물관이 특별전으로 다룬 주제는 민주(시민) 참여, 강제노동, 그리고 젊은 층의 기술직 기피 현상 등에 관한 것이다. 향후 코펜하겐 노동박물관은 민주적인 논의 과정에서 시민행동의 역할에 대한 특별전을 계획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특별전을 6~12개월 정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그 기조가 변화해 18~24개월짜리 전시도 흔해지고 있다. 특별전시를 준비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특별전을 준비하느라 일정에 쫓겨 다른 중요한 업무가 소홀히 이뤄지는 경우가 자칫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긴 호흡의 특별전이 갖는 장점은 전시를 할 때 좀 더 교육적인 프로그램과 긴밀히 공조할 수 있게 하며, 전시 그 자체가 학교와 지역사회의 교육적 툴로 활용될 수 있는 기회를 늘린다. 또한 박물관의 예산은 주로 사립재단에서 나오고 있으며, 공공 지원금이나 노동(상공)조합들의 지원은 드문 편이다. 유럽 지역의 타 박물관과 공조해 전시를 기획할 때는 유럽연합의 지원금도 중요하며, 두어 번 정도는 유럽연합을 통해 예산을 확보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말에 덴마크에서도 산업화가 진행됐다. 증기엔진은 농장노동자의 노동을 대체했고 공장은 코펜하겐 등 덴마크의 모든 대도시에 설립됐다. 수천 명의 농장노동자들이 시골을 떠나 일과 주거를 찾아 도시로 이주했다. ⓒ이기암 기자


덴마크 노동조합과 노동박물관과의 관계

코펜하겐 노동박물관의 이사회는 총 7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 중 이사회 위원 3명을 덴마크 전국노동조합연합이 임명한다. 그 외 4명은 노동조합 외 다른 경로로 임명된다. 코펜하겐 노동박물관과 노동조합은 매우 긴밀한 관계로 맺어져 있으며 이는 박물관의 운영과 방향성에 영향을 미친다. 덴마크전국노동조합연합은 박물관이 중장기적인 경영계획을 수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박물관 경영에 대한 것일 뿐, 노동조합 측은 (박물관의 특별한 요청이 있지 않는 한) 전시 기획이나 디자인에 관여하지는 않는다. 박물관 이사회는 박물관 경영과 전시 방향성은 엄연히 구분된 영역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박물관은 여러 노동조합의 역사적 사료 아카이브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덴마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설 역사관이자(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것이 아닌, 특정 박물관 혹은 연구기관이 위탁해 운영) 덴마크 근현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역사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코펜하겐 노동박물관이 매년 노동조합들로 부터 멤버십 회비를 받는 명분이 바로 이 아카이브 덕분이라고 한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덴마크에는 미국식 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기암 기자

▲ 덴마크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은 1951년에 있었고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가격은 일반노동자의 6개월 치 임금에 해당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덴마크 노동자들은 텔레비전 장만을 꿈꿀 수 없었다. ⓒ이기암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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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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