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이 대전형무소에 갇힌 동안 벌어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충돌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3-09 00: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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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5)
▲ 일제강점기 대전형무소 정문 사진(대전광역시)

 

이관술이 갇힌 대전형무소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10월 19일 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에 ‘대전감옥’이란 이름으로 세워졌다. 대전형무소로 명칭이 바뀐 것은 1923년이다. 지금은 원래 자리는 모두 철거된 상태로 1984년 3월 20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전했다.


대전형무소는 원래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형자들을 수감해오다, 3.1 만세운동 이후 그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뒤 신축한 감옥이었다. 처음 만들 당시 대전형무소는 담장 둘레가 1341m에 달했고, 면적은 112.397㎡, 독방은 80개였다. 방사형의 판옵티콘 구조로 4면에 7.8m의 망루를 세워 감시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엔 미군정이 접수해 직접 관할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관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수감됐던 아픔의 현장이다. 도산 안창호와 몽양 여운형이 갇혔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그 공간을 이른바 좌익사범으로 불렸던 사회주의 계열 수형자들이 채웠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가 이관술이었다.

1948년 이후 대전형무소로 밀려온 사상범들

1948년 봄이 되면 남한에 있는 형무소에 갇힌 재소자의 숫자가 2만2000명에 이른다. 해방 이후 10개월을 넘겼던 1946년 7월에 집계한 형무소 재소자가 약 1만7000명이었다면 30% 이상 늘어난 수였다. 그리고 1949년에 이르면 대한민국 전국 형무소 재소자 수가 3만5119명을 기록한다. 겨우 3년이 지났는데 곱절로 늘어난 것이다. 갇힌 사람 중 약 80%가 좌익수였다는 것은 더 충격적이다.


대전형무소는 적정하게 수용할 수 있는 재소자가 약 1200명이었다. 그런데 1948년 하순에 이르면 3000명을 넘어선다. 한계 이상으로 사상범들을 체포하고 수용한 결과였다. 대전과 충남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의 재소자뿐 아니라 전국의 주요 좌익사범이 수용됐다.


1948년 봄에 벌어진 ‘제주 4.3 항쟁’과 같은 해 10월에 벌어진 ‘여수·순천 사건’으로 체포되고 재판에 넘겨진 이들이 대전형무소에 대거 수용됐다. 1949년에는 ‘숙군사건’으로 불리는 국군 내부 사상범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들어온다.

 

▲ 국가기록원이 수집한 대전형무소 감방 설계도

제주 4.3항쟁으로 체포된 이들은 제주에서 열린 고등군법회의에서 형을 받고 대전형무소로 오게 된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은 총 300명으로 징역 7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10월 19일 처음 시작된 여순사건은 반란 병사 3000여 명을 국군 제2사단 헌병대가 압송해 대전과 청주형무소에 감금한 뒤 취조했다.


당시 주한미군 정보일지(HQ USAFIK G-2 Periodic Report)에 따르면 11월 19일부터 재판이 열려 총 2817명이 회부됐고, 그중 410명이 사형, 563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49년 1월 25일부터 3일에 걸쳐 대전형무소에서 75명의 군인 수감자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여순 사건 이후 바로 이어진 대규모 ‘숙군’은 국군 내부의 ‘좌익’ 색출이 전 군으로 확대된 결과였다. 이 시기 대규모 숙군은 1948년 11월부터 시작돼 1949년 3월까지 계속됐다. 주한미군 정보일지에는 1949년 3월까지 적발된 장교가 78명이고 사병이 174명이라고 보고돼 있다. 군사재판에 회부된 252명 중 225명에게 유죄가 선고됐으며, 사형 6명과 무기징역 9명 외에 나머지 210명은 6개월에서 20년 형을 받았다.


우리가 잘 아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48년 11월 11일 숙군을 통해 체포됐다. 수사 과정에서 주변 동료들을 밀고하는 등 적극 협조해 1심 재판에서 사형을 피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됐다.

통일정부 vs 남북한 단독정부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25일이 지난 9월 9일 평양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과였던 ‘단일정부를 세운다’는 합의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와 함께 물거품이 됐다. 해방 후 원하지 않던 분단 상황을 극복하고, 단일한 통일정부를 희망했던 민중들의 염원 역시 산산이 깨져버렸다.


통일정부를 주장한 정치세력은 미군정 지지 세력보다 훨씬 크고 광범위했다. 그중 조선공산당에서 남로당으로 당명을 바꾼 사회주의 계열은 단독선거를 극렬히 반대하면서 2월 7일부터 총파업을 시작하는 등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3개월 넘게 전개했다. 중도를 표방했던 홍명희, 김규식뿐 아니라 반소련, 반공산주의를 내세웠던 김구와 한국독립당 역시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주장했다.


이승만의 찬성은 미소공동위원회 1차 회의가 결렬된 이후부터 남한 단독 총선거를 노골화해왔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한국민주당을 포함한 우익정당은 미군정의 뜻과 완전히 일치했다. 미소공위 2차 회의가 결렬된 이후에는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그리고 월남한 이들이 중심이 된 조선민주당만이 남한 단독선거를 밀어붙이는 형국이었다.
 

▲ 1947년 9월 29일 <동아일보> 유엔 총회 미소 대립 일층 심각

UN으로 넘어간 한국 정부 수립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자 한국 문제는 UN으로 넘어간다. 미국은 이를 적극 찬성했고, 소련은 명확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9월 21일 UN 운영위원회에 미국이 제안한 ‘한국의 독립 문제를 UN 총회 안건으로 상정한다’는 안건이 가결됐고, 23일 총회에서도 찬성 46표, 반대 6표, 기권 7표로 가결된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해 서로의 안을 제출한다. 먼저 10월 17일 제출한 미국의 입장은 “1948년 3월 31일까지 미국과 소련 점령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해 인구비례에 따라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국회와 정부를 수립한다. 새로 수립된 한국 정부와 합의를 거쳐 미·소 점령군은 조속하고 완전하게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10월 28일 “유엔에서 한국 문제를 토의할 때 남북한 대표를 초청할 것과 1948년 초까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군대를 동시에 철수해 한국인 스스로 정부수립을 할 수 있도록 일임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이에 미국은 ‘한국 대표 참가를 촉진하기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자’는 수정안을 내놓는다.

 

▲ 1947년 11월 15일 <조선일보> 유엔 ‘조선 문제 최후 토의 전개’

 

결국 UN총회 제1분과위원회는 10월 28일 소련이 제출한 안건을 부결시키고, 미국 수정안이 통과된다. 그리고 11월 14일에 열린 UN 총회에서도 소련이 내놓은 ‘미소 양군 철수 후 스스로 정부수립’이라는 안건 대신 미국이 수정 제시한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동시 선거‘가 통과된다. 자세한 결정 사항은 아래와 같다.  

 

① 유엔에서의 한국 문제 토의에 선거에 의한 한국 국민의 대표가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이러한 참여를 용이하게 하고 이 대표들이 군정당국에 의해 지명된 자가 아니라 한국 국민에 의하여 정당하게 선거된 자라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조속히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을 설치해 한국에 부임케 하고, 이 위원단에게 전 한국을 통하여 여행·감시·협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②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의 9개국 대표로 구성한다. 늦어도 1948년 3월 31일까지 보통·비밀선거원칙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남북인구비례에 따른 대표자들로 국회를 구성하고 중앙정부를 수립한다. 이 정부는 위원단과 협의하여 국방군을 조직하고, 남북의 점령당국으로부터 정부 기능을 이양받으며,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양 점령군이 철퇴하도록 점령당국과 협정을 맺는다.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으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서울에 도착한 때는 1948년 1월 9일이었다. 이들의 주요 과제는 총선거를 위한 분위기 확보, 선거에 대한 의견 청취, 선거법 검토였다. 위원단은 서울에 도착한 후 북한 쪽 조사를 위해 북한주둔 소련군 사령관과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의 태도는 UN에서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애초에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하는 것을 꺼려 했기 때문에 파견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했다.


임시위원단 중 미국과 교감한 대표들의 선택은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이견이 커지자 임시위원단의 결정 대신 2월 19일 다시 UN 소총회로 안건이 상정된다.


소총회 결과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의안 채택이었다. 여기서 ‘접근 가능한 지역’은 당연히 남한에 한정된 것이었다. 2월 28일, 임시위원단 회의에서 1948년 5월 10일 이전에 선거를 진행하고 참관하는 것을 결정한다. 미군정은 3월 1일 사령관 하지의 이름으로 5월 9일 선거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날이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하루 뒤 5월 10일로 최종 확정된다. 이렇게 결정되자 가장 환호한 것은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와 한국민주당 등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중도와 우익을 넘나들던 한국독립당의 김구,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한 김규식, 민족독립당의 홍명희 등이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특히 김구는 1월 28일, 미군정과 미국의 방침과 달리 ‘미·소 양군 철수 및 남북한인 지도자회의 소집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었다. 김규식도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협의를 제안했다. 그러자 미군정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김구와 김규식을 단독선거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배제하는 양면전술을 택했다.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가 5월 10일로 결정된 후 결단의 순간을 맞이한다. 본인이 주장해왔던 1월 말의 ‘의견서’를 반대했던 남로당과 다르게 북쪽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해 왔기 때문이다. 남로당이 2월 7일 총파업을 시작으로 단독선거를 물리력으로 막아내고 중도 세력과 결별을 선언한 것과 북로당의 태도는 대비됐다. 결국 김구는 남북한 지도자가 만나는 자리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4월 19일 아침 본인이 머물던 경교장을 떠나 38도 경계선을 지나 평양으로 향했다.

 

▲ 1948년 1월 28일 유엔 위원단 공보 ‘조선인과의 협의 30일부터 10일간 속개’

 

▲ 1948년 4월 19일, 평양으로 향하던 중 삼팔선 앞에서 기념 촬영한 김구 일행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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