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을 사슬에 채운 때 벌어진 9월 총파업과 박헌영 월북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1-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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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9)

미군정 탄압에 조선공산당은 ‘신전술’로 노선 변화

‘정판사 사건’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전면 탄압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어 경제를 혼란에 빠트렸다는 전면 선전을 시작으로 경찰과 우익단체를 총동원해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공세를 벌였다. 


그동안 미군정이 벌였던 정책들, 특히 1946년 2~3월에 절정에 달했던 식량 배급 파동 등 사회문제가 커지는 과정을 만회할 책략이기도 했다. 경제위기의 원인이 미군정의 실책이 아니라 조선공산당이 위폐를 만든 것 때문이라고 화살의 방향을 바꾸려는 것이었다. 바로 ‘뚝섬 위폐 사건’을 확대해 조선공산당원들이 대거 연루된 정판사 사건을 빚어낸 것은 미군정의 역전 카드와 같았다. 


하지만 조작된 사건이기 때문에 증거도 부실했고, 고문으로 얻은 허위 자백들을 짜맞춘 것들도 허점이 많았다. 때문에 공판을 청구하고 재판이 열리는 과정에서도 조선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다. 5월에 조선공산당이 사용하고 있던 당사인 근택빌딩을 압수수색하고, 기관지 <해방일보> 발행을 막았다. 미군정 적산관리과는 5월 27일 급기야 조선공산당은 근택빌딩에서 퇴거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조선공산당은 결국 퇴거 이후 빌딩을 몰수당한다. 


그럼에도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미군정을 적대시할 수 없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민주정부를 세운다는 방침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더 심각한 상황으로 연결됐다. 


먼저 조선공산당의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와 농민들의 실망이 커져 갔다. 당장 먹을 게 없는 식량문제로 미군정에 대한 성토가 터져 나오는데, 십자포화를 받듯 탄압받는 조선공산당이 협조노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성토가 이어졌다. 급기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의 지도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결국 박헌영은 7월부터 준비해온 ‘신전술’을 이관술이 체포된 뒤 8월 하순에 전 조직에 공식 방침으로 전달한다. 지금까지의 협조노선을 중단하고 강경 대응으로 노선이 바뀐 것이다. 이른바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이었다.
 

▲ 1946년 7월 미군정에 항의하며 부산 식량 배급소 난입.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공산당 분열 속 이관술 빈자리 커져

박헌영이 ‘신전술’을 꺼낸 과정은 모스크바와 평양을 잇달아 방문해 소련과 북한 지도부와 협의를 거친 결과였다. 1946년 6월, 미군정은 서울에 있던 소련 영사관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7월 2일 완전히 철수했기 때문에 박헌영이 38선을 넘어야 했다. 


박헌영은 방북 때마다 김일성과 여러 차례 만나 미군정의 탄압국면뿐 아니라 이승만을 내세워 남한 단독정부를 가시화하는 상황, 우익 세력을 규합하고 일부 사회주의 계열을 포섭하는 것에 대한 대응 전략도 함께 논의했다. 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을 묶는 ‘3당 합당’ 안도 정한다.


신전술과 3당 합당안 두 가지 모두 당시 남한 사회주의 계열 전체에 큰 변화를 주는 방안이었다. 1946년 2월부터 사회주의 계열은 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으로 결집해 있었다. 따라서 급격한 노선 변화에 여운형과 김원봉을 비롯해 민전 내부에서 반론이 제기됐다. 이들은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애초의 원칙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민족통일전선을 유지해야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을 고립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공산당 내부에서도 박헌영과 대립하는 세력이 있었다. 3당 합당에 대해 일방적인 결정이란 항의가 8월 4일 당중앙위원회에서 터져 나왔다. 이들은 ‘대회파’ 또는 ‘반박헌영파’ ‘반간부파’로 불렸는데 김철수, 서중석 등이 중심이었다. 이미 미군정의 이간질에 휘말려 박헌영과 결별하고 탈당한 조봉암과 비판의 맥락이 비슷했다. 


조선공산당 내부의 분열 상황에 박헌영은 이관술의 부재를 절감했을 것이다. 이관술은 사실상 당내 2인자로서 박헌영과 불만을 지닌 당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조율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를 전후해 당 대회와 열성자회의부터 갈등의 조짐이 보일 때마다 이관술이 대화 창구로 역할을 했다.
 

▲ 박헌영(가운데)과 김일성(왼쪽). 사진은 1948년 박헌영이 월북한 뒤의 것이다.

조선공산당 지도부 체포령
이주하 체포, 박헌영 월북

그럼에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인민당과 신민당에서 호응하는 이들을 넓혀가며 3당 합당을 밀어갔다. 인민당의 여운형과 신민당의 백남운 등 두 정당의 위원장이 빠진 상태에서 3당합동준비위원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름은 잠정적으로 남조선노동당으로 정하게 된다. 조선공산당의 명칭이 남조선으로 반 토막 난 것은 결국 강제적인 분단이 고착화한다는 느낌과 함께 남쪽이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상황도 반영됐다.


그렇게 여러 차례 진통을 겪으며 합당을 강행하던 중 미군정이 또 한 번 칼날을 휘둘렀다. 9월 6일 미군정 헌병들이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32개 신문사를 압수 수색했다. 다음날 7일,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진다. 경찰은 언론의 취재에 체포 사유를 함구하고 ‘상부 명령’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여기서 상부는 당연히 미군정이다. 이주하가 9월 8일 검거됐다. 


이주하는 박헌영의 최측근으로 모든 정책과 지침에 적극 협조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원산총파업을 통해 성장한 그는 원산지역 적색노조운동의 지도자로 체포돼 5년을 복역한 바 있다. 해방 후 원산시당을 이끌다가 박헌영의 요청을 받고 1945년 12월 서울로 와 당 정치국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 이주하는 경찰에 체포된 후 고문을 당하자 단식으로 버텼다. 


이관술은 이주하가 체포된 뒤 고문과 단식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위독한 상태로 수감됐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 또한 갇혀있는 상황에서 동병상련하는 마음으로 아파했다. 이관술은 정판사 사건 결심 때 이주하를 ‘동정’해 본인이 나가야 할 재판에 출정을 거부하기도 했다. 반면 박헌영은 체포를 피해 월북을 감행한다. 시기는 10월 초로 체포령이 떨어진 후 전평의 9월 총파업 이후 대구에서 10월 인민항쟁으로 불이 거세게 옮겨붙은 때였다. 박헌영은 미군정의 감시망을 피해 상여에 실린 관에 숨어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공산당 내부 소수 핵심을 빼고는 박헌영의 월북을 몰랐을 정도로 비밀리에 움직였다. 이시기 이후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합법정당에서 지하정당으로 처지가 뒤바뀌게 된다.
 

▲ 1946년 11월 13일 <경향신문> 이관술 출정 거부, 이주하를 동정한 행동

7‧8월 ‘쌀 획득 투쟁’과 9월 전평 총파업 그리고 10월 인민항쟁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에 따라 1946년 7월부터 전평과 전농을 중심으로 미군정을 상대로 한 강경한 투쟁이 시작된다. 그 시작은 ‘쌀 획득 투쟁’이었다. 전평은 기존의 온건노선을 버리고 소속된 노동조합들이 쌀 배급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투쟁은 9월 총파업으로 번져갔다. 그 중심에 철도노동자들이 있었다. 


서울철도국 노동자 3700명은 1946년 9월 13일 태업에 들어갔고, 14일은 종업원 대회를 열었다. 19일 부산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이 동참했고, 23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경성은 다음날 24일부터 파업으로 전환했는데 대구와 경북 경주를 비롯해 전국 철도에 퍼져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 


철도본부는 ‘철도종업원대우개선투쟁위원회’와 함께 ‘식량대책위원원회’를 꾸렸다. 노동자들의 중심 요구 중 하나가 ‘쌀’ 배급 문제였기 때문이다. 총파업선언서의 첫 항목에 ‘쌀을 달라. 노동,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는 요구가 들어갔다. 물가등귀에 따른 임금인상, 공장폐쇄와 해고 절대 반대, 반동테러 배격,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자 즉각 석방 등도 요구했다. 이관술과 이주하 등이 포함된 석방 요구였다. 


미군정은 러취 장관 명의로 철도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철도노동자들이 군정청 소속이란 것을 강조하며 요구 조건을 내걸더라도 시간 여유를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투쟁은 노동자 파업으로 끝나지 않았다. 10월 1일부터 대구 항쟁을 시작으로 이른바 ‘10월 항쟁’이 벌어진 것이다. 

 

▲ 1946년 9월 25일 <동아일보> 남선철도 총파업 단행, 식량 대우 문제로

 

▲ 1946년 10월 1일, 대구 노동자 파업 집회. 출처: 10월항쟁민간인희생자유족회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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