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판사사건 조작, 여운형 암살, 반민특위 테러를 주도한 ‘악인 노덕술’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3-02 0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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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4)

1947년 7월 19일에 벌어진 몽양 여운형 암살 사건은 남조선 정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해방 이후 이미 10여 차례에 걸쳐 암살과 테러 위협을 겪었던 여운형은 사건 당일 명륜동에 있는 은신처에서 서울운동장으로 향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여운형은 그날 IOC 회원국이 된 것을 기념해 열린 영국과 친선 축구경기가 열려 참관할 계획이었다.

 

▲ 1947년 7월 20일 <한성일보> 여운형 혜화동 광장서 괴한에 피격

그런데 이 정보를 입수하고 암살을 기획한 이들은 사건 전날부터 여운형 주위에서 범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일 오전부터 명륜동 정무묵의 집에서 출발해 명륜동 로터리로 나오는 길목에 포진해 있었다. 그곳이 서울운동장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여운형이 명륜동 은거지를 떠난 시각은 오후 1시 14분이었다. 검은색 리무진을 타고 출발한 여운형과 일행은 천천히 암살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로터리 쪽을 지나게 된다. 그런데 로터리 입구 파출소 앞에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여운형이 타고 있던 차의 앞을 막아섰다. 경찰은 교통사고가 벌어졌다고 했지만 바로 이어 저격이 벌어진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을 알게 해준다.

 

▲ 이필형이 여운형을 저격한 장소(명륜동 로터리)

 

▲ 암살 당시 여운형이 입고 있던 옷


멈춰 서있는 차에 암살조 중 이필형(체포 당시에 한지근이란 가명을 내세웠다)이 접근해 뒷좌석에 탑승해 있던 여운형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만약 차량이 정상적으로 이동했다면 움직이는 차에 타고 있는 상태에서 저격은 정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암살을 돕기라도 하듯 일어난 교통사고는 차를 멈추게 했고, 2m 앞에 멈춰 앉아있는 여운형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 암살 배후에 친일파 출신 경찰 노덕술 의심

총탄을 맞은 여운형은 비서 고경흠이 껴안고 곧장 인근 혜화동에 있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여운형을 저격한 암살범 이필형은 황급히 달아났다. 여운형을 수행했던 경호원 박성복이 바로 뒤쫓아가 잡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 이유는 동대문경찰서 소속 경위 최태화가 범인이 아닌 경호원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최태화는 경호원을 암살범으로 착각했다고 하지만 이 또한 공교로운 일이 된다. 이미 도주하는 범인을 추격해 온 상황이었는데 앞서 도망가는 암살범 대신에 쫓아온 경호원을 범인으로 판단했다는 것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경찰은 범인이 도주하게 된 책임을 회피하면서 사과는커녕 경호원에게 모든 것을 떠넘겼다. 여운형 경호원의 ‘무지’로 범임을 체포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도주할 여유를 줬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발표한 담화의 내용이었다.


암살 당일 오전에 벌어진 의문의 교통사고와 암살범 체포를 방해받은 것 외에도 배후를 의심하게 되는 상황들은 계속 벌어졌다. 암살사건 발생 5분 만에 우익단체 명의의 벽보가 붙은 것도 그중에 하나다. 그리고 사건 발생 5일 후 수도경찰청에서 도주했던 범인을 체포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경찰은 범인이 평안도 영변 출신 한지근으로 북에서 월남한 19세 청년이라고 밝혔다. 또 암살 이후 11일이 지난 7월 30일 공범으로 함경도 흥원 출신 신동운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일주일 뒤 8월 6일 서울지검 조재천 검사는 이 사건을 ‘북한 괴뢰의 지령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신동운은 이후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됐고 한지근이란 가명을 쓴 이일형은 11월 4일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이 사건의 진실은 무려 27년이 지나 1974년에 이르러서야 일부 사실이나마 밝혀진다. 이일형 외에 암살에 가담했다는 공범 4명이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양심고백을 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1974년 2월 10일 <일요신문>에 나온 이 중에는 1947년에 불기소 석방됐던 신동운도 들어있었다. 그는 “모든 정치테러가 그렇듯이 배후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나 이상의 배후를 밝힐 수는 없다”고 뻔뻔한 발언을 이어갔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더는 처벌할 수도 강제 수사로 진실을 밝힐 수도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배후를 짐작케 하는 단서들이 나왔다. 바로 친일파 출신으로 해방 후도 마찬가지로 경찰 수뇌부에 속했던 ‘노덕술’이란 이름이 증언에서 등장한 것이다. 바로 신동운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인 노덕술(총경)과 자주 만난 사이였다는 말이었다. 신동운은 경찰서를 자주 드나들었고 노덕술에게 용돈도 더러 얻어 썼다고 한다. 밀정을 부리듯 노덕술이 끄나풀로 사용한 관계로 짐작된다.


실제 한지근이란 가명으로 이필형이 체포될 때도 노덕술이 검거를 지시했는데, 신동운에게서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일당 모두를 일망타진한 것이 아니라 이필형만 체포한 것은 일종의 꼬리 자르기 수법이었다. 나이도 17세로 두 살을 낮춰 미성년자로 위장했다. 여운형 암살에 대한 국민의 의구심이 커지자 신동운을 추가로 체포했을 뿐 나중에 결과는 똑같았다.
 

▲ 왼쪽부터 1948년 7월 23일, 24일 <동아일보> ‘수도청 노덕술 씨 계속 문초’

정판사 사건 조작에 가담하고 고문 수사를 지휘한 노덕술

‘악인’으로 꼽히는 노덕술(1899~1968)은 이전(기획기사 10회)에도 살펴봤지만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을 꼽을 때 첫손가락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울산 장생포 출신으로 울산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 훗카이도로 건너가 잡화상에서 일하다 1920년 경찰을 지원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를 고문 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여러 조작 사건을 만들어내는 데도 정통했다. 1924년 경부보(현 경위), 1932년 경부(현 경감)로 승진했고 1943년에는 경시(현 총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고위직으로 승진한 조선인 경찰은 일제강점기 내내 단 12명에 불과했다. 경시로 승진한 것은 종로서에 근무할 때 이관술을 비롯해 경성콤그룹을 고문 수사한 공을 인정받아서였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그렇게 같은 울산에서 태어나 극과 극의 삶을 이어간 것으로 연관지어 여러 매체에서 언급된 바 있다. 이관술도 해방 후 적은 본인의 회고록에서 고문을 받았던 상황을 이렇게 언급했다.

 

“나의 과거 생활 중 가장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포되었을 때 박헌영 동지와 동생 순금의 주소를 말하라고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기로에 처했는데 나는 죽기로 맹세하고 13일간을 단식하다가 전에 함남 지방에서 일하던 것을 이용하여 허구를 꾸며서 그들을 감쪽같이 속인 일이다.”(<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


이관술의 이런 증언은 당시 고문 수사를 총괄한 노덕술을 속였다는 것을 말한다. 노덕술이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따로 봐준 것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더 악랄한 고문을 가했고, 이관술은 13일을 단식해 쓰러진 후 각혈을 하는 것으로 꾸며 속였다고 한다. 노덕술이 꺾지 못했던 것은 이관술이 지닌 기개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정판사 사건으로 친일파 출신 노덕술이 항일 혁명운동을 했던 이관술을 다시 취조하게 된 것이다. 미군정 경찰과 검찰은 조작한 증거조차 부실한 상황이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이때 노덕술이 다시 특기를 발휘하고 자신의 기술을 전수받은 부하 경찰들을 진두지휘했다.

고문치사로 체포, 도주 그리고 반민특위 암살 시도

노덕술이 승승장구하다 드디어 첫 발목을 잡힌 것은 1948년 7월 말이었다. 같은 해 1월에 박성근을 물고문하다 살해한 뒤 그대로 얼어붙은 한강에 구멍을 내고 빠뜨려 유기했는데, 6개월 뒤에 시신이 떠오른 것이다.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고 그가 장택상 암살 시도 사건으로 체포됐던 박성근이라고 신원이 밝혀지자 경찰 내부가 술렁였다. 그리고 노덕술을 비롯한 당시 수사관들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고 7월 21일부터 고문과 시체 인멸에 대한 조사가 계속됐다.


장택상은 노덕술 조사가 껄끄러웠다. 노덕술은 미군정 경찰이 음지에서 벌였던 일들을 모두 꿰고 있었다. 장택상의 수족이 돼 경찰을 움직였던 현장 지휘관이 노덕술이었던 것이다. 결국 수사과장이었던 노덕술의 사표를 받는 모양새를 갖췄다. 3차 조사가 있던 날이었다.


그런데 사표를 낸 뒤 2일도 지나지 않아, 구속 상태였던 노덕술이 도주했다. 이 상황도 장택상이 함께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장택상은 7월 25일 수도경찰청 부청장인 김태일을 경무부로 보내 노덕술을 문의할 것이 있어 이송할 테니 잠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로 행방이 사라지고 바로 도주한 것이다. 노덕술이 장택상을 비롯해 고위 경찰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내부 폭탄과 같은 존재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 1948년 7월 27일 <조선일보> ‘도주극 꾸미고 시체 수장, 경찰 관계자 14명’

 

▲ 1948년 10월 10일 <경향신문> ‘노덕술 씨는 어데로?’

도주 후 은신하던 노덕술이 다시 세상이 등장한 것은 1949년 1월에 출범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체포 명단에 오르면서다. 노덕술은 당연히 자신이 1호 체포대상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거를 멈추고 오히려 반대로 반민특위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운다. 먼저 우익인사 백민태를 찾아가 또 다른 범행을 공모한다. 백민태는 여운형 암살을 시도했던 경력이 있는 테러 설계자였다.


장택상은 백민태를 설득해 대규모 암살을 주도한다. 이를 위해 백민태에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최난수와 사찰계 홍택희 등을 소개해 무기 준비와 실행 시기를 꾸준히 조율했다. 이렇게 반민특위에 대한 공격을 노덕술을 비롯해 경찰들이 주도한 이유는 해방 이후 미군정 경찰 수뇌부 대다수가 친일 경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특히 노덕술처럼 악질적인 고문을 자행하고, 독립운동가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이 경찰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직후 발각되게 된다. 고의로 빼돌려져 도주하고 은신한 지 거의 5개월 만인 1949년 1월 21일이었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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