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그레이 아이스티-청량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 기사승인 : 2021-10-06 00: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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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함께

나무껍질 향, 아직 다 피지 않은 작은 들꽃들, 그 옆을 스치는 차가운 바닷바람. 언덕을 오르면, 그 너머에 레몬 향이 바람에 실려 온다. 상큼한 레몬 향은 어느새 화려하고 짙은 꽃향기로 바뀌며 벌어지는 꽃 잔치.

당연하게 여겨지던 일상이 비일상이 된 지 오래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도 많은 망설임과 걱정이 뒤따른다. 최근 국내외에서 이슈인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영화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는 <모가디슈>를 보았다. 영화는 아주 잘 만들었고 보는 동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뜻하지 않은 아프간의 상황을 마치 예측이라도 한 듯한 개봉 시기 때문에 더 몰입됐다. 영화 내내 화면 너머로 느껴지던 아프리카의 더위와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탓에 갈증이 나서 아이스티 한잔이 간절해졌다. 


세계 곳곳에 내전이 계속되고 유럽 등에서 난민수용이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최근 미얀마의 쿠데타와 이번 아프간 사태로 난민수용이라는 주제가 우리 사회에서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주로 이슬람국가의 무슬림 난민으로 인해 발생한 서구국가의 문제들과 그에 따른 부작용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어느 기자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찬반 논란이 있는 것 자체가 참 반가운 일이라고 했다.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의 내전 지역 사람들은 전에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오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고. 반대하더라도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빠, 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의 분쟁과 그 속의 사람들이 겪는 불행은 내 관심 밖이었다. 간간이 접하는 소식들이라고는 테러, 난민수용 후 겪는 유럽의 문제들, 그나마도 서구의 눈을 통해 보고 듣는 것들이 다였다. 


최근 아프간의 협력자 구출로 우리도 난민수용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면서 이슬람 체제나 그들의 문화에 대한 정보가 빠르게 퍼지고 있고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도 섣불리 이슬람 난민을 받았다가 생존에 위협을 받을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난민수용에 회의적이 되고 만다. 


빨리 우려내기 위해 차 상자에서 아무 티백이나 손에 잡힌 대로 꺼낸 차. 포장지의 얼그레이라는 글자를 보니, 내전 지역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우리가 그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은 잘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이기에 우선 그들에 대해 알고자 했으면 좋겠다는 기자의 말이 떠오른다.


홍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얼그레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아마도 홍차 중에 가장 유명한 한 가지가 아닐까. 반대로 호불호도 명확하게 갈리는 차다. 얼그레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누 맛, 화장품 맛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처음 얼그레이를 마셨을 때 그랬다. 실수로 향수를 입에 뿌리고 만 느낌.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가?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 맛. 그리고 변질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맛과 향이라는 걸 안 순간 천하의 몹쓸 차라며 쳐다도 보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이후로 얼그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몸서리쳐지게 되는.


‘고수’처럼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얼그레이는 정말 대중적이면서도 매니악한 차다. 실제로 홍차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도 얼그레이를 무서워한다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브랜드마다 꼭 존재하는 기본 중의 기본 차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이 차의 매력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얼그레이 정복하기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무작정 마시기부터 했다. 최초로 접했던 그 차부터 다양한 브랜드의 얼그레이들까지. 열 가지가 넘는 브랜드의 얼그레이를 마셔봤지만, 그저 비누 향이 나거나 향수 몇 방울을 떨어뜨린 물이라는 인상은 가시지 않았다. 다만, 중심 향은 비슷한데 앞뒤에 따라오는 향들이 다르고 무엇보다 찻잎의 맛이 서로 너무 달라 다른 인상을 주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렇다. 얼그레이는 실론, 아쌈, 다즐링처럼 차 산지에 따른 차 품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홍찻잎에 베르가못이라는 감귤류의 향을 입힌 가향차의 이름이다. 즉 실론 베이스의 얼그레이도 있고, 아쌈 베이스, 다즐링 베이스의 얼그레이가 있고 또 온갖 찻잎을 다 섞은 다음 가향한 얼그레이도 있다. 거기다 베르가못을 착즙해 향을 낼 수도 있고 오일로 향을 입힐 수도 있고 그 오일을 또 어떻게 정유하고 무엇과 섞느냐에 따라 향이 달라진다.


그럼 그저 각종 홍차 잎에 감귤류의 향을 입힌 차인데 왜 이렇게 호불호가 극명하고 화장품이나 비누 맛이라고 표현할까? 그런데 그것이 무리도 아닌 것이 우리에게 베르가못은 이름부터도 낯선 과일인데, 실제로는 향수와 화장품의 향료로 많이 쓰인다. 그러니까 화장품 맛, 비누 맛이라는 평가는 굉장히 사실적이고도 진실된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저 베르가못을 식재료가 아니라 향료로서 처음 접했고 계속 만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얼그레이 정복하기’라는 나 홀로 과제를 하면서 서서히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다양한 베이스 홍차들과 부재료들 덕분에 처음의 몸서리쳐지는 인상은 옅어졌지만 결국 베르가못이라는 핵심 재료가 갖는 그 묘한 화장품 맛을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지도교수님께 대접받은 한 잔의 얼그레이를 마시게 됐다. 중국엽의 깊은 맛과 훈연향, 실론의 날카로우면서도 시원하고 깔끔한 맛, 거기에 상큼함과 향긋함이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뤘다. 베르가못 특유의 향이 꽤 강한 편이었는데도 향수의 느낌이 아니라 향긋한 꽃향기로 표현돼 너무나도 맛있고 기분 좋은 차였다. 나는 한동안 그 차만 마셨고, 더 이상 내게 얼그레이는 싫어하거나 못 마시는 차가 아니게 됐다. 


어떤 한 브랜드의 얼그레이 하나가 전체 얼그레이를 대표하지 않는다. 얼그레이는 다양한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차다. 하지만 얼그레이 자체가 차의 한 품종이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다. 너무나도 강렬했던 베르가못 향이라는 단 한 번의 정보로 판단을 끝내버렸다면 나는 여전히 얼그레이 공포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얼그레이가 가진 다양한 매력도 모르고 내가 가장 애정하는 차 중 하나를 만나지도 못했을 테지. 


물론 여전히 나는 얼그레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파헤쳐봤지만, 상당수의 얼그레이는 나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부분이 나와 맞지 않는지 알기 때문에 그 매력도 분명히 알고 사랑해 마지않는다.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정온진 글 쓰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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