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1948년 4월 30일, 평양에서 남북대표자 연석회의 공동성명 발표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3-23 00: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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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6)

1948년 4월 19일부터 시작한 ‘전조선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남북대표자연석회의)는 4월 30일까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렸다. 김구가 38선을 거쳐 평양으로 향한 4월 19일 오전에 이미 예비회담이 열린 상태였다. 본회의는 오후 6시에 열려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다가 김구의 방북 소식을 듣고 휴회한다.


첫날 채택된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의 4대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유엔 임시 위원단 부정, 유엔총회와 소총회 결정 무효화 △단독정부 단독선거 반대 △소미 양군의 즉시 동시 철퇴 실현 △양군 철퇴 후 조선인민의 자주성 위에서 일반, 평등, 직접 비밀투표로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었다.
 

▲ 1948년 4월 24일 <조선일보> 단독정부 수립 기획은 남북을 막론 반대

남북대표자연석회에서 나온 대표자들의 연설

김구가 평양으로 출발한 날 김구의 참가를 지속적으로 설득해왔던 홍명희 역시 북으로 향했다. 홍명희는 여운형이 암살된 후 근로인민당 당수를 맡았다. 미소공동위원회 2차 회의 전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던 김규식은 4월 21일 출발한다. 민족자주연맹(민련) 의장이었던 김규식과 함께 민련 측은 20여 명이 연석회의 참가를 위해 38선을 넘었다. 국민의회 의장이었던 조소앙도 북행에 나선다.


김구는 4월 20일 자신을 예방한 김일성, 김두봉과 면담했다. 김구는 김일성과 단독회담을 요구했다고 한다. 함께 만났지만 서로의 장벽이 느껴졌다. 21일에 속개된 연석회의에도 김구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 대신 원했던 대로 김구는 김일성과 단독 회담했다. 홍명희는 김두봉을 만났다. 면담 이후 4월 22일에 열린 회의에는 대부분 참가해 진정한 남북대표자 연석회의는 이날 성사됐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민족이 악독한 일인에게서 해방된 지 3년이 지나도록 독립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흉악한 위기를 타개치 않으면 남조선 동포들은 지금보다 일층 더 곤경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단선을 반대하고 파탄시키는 방침을 결정하여 외국군대가 우리 국토에서 철퇴하도록 하여 우리 민족끼리 우리나라 국사를 처리해야겠습니다.”라고 개회사를 했다.


남측 대표로 참가한 원로 허헌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수석의장 자격으로 연설을 더했다. “조국의 민족적 위기에 직면해서 조국의 분할을 반대하고 통일한 조선 완전 자주독립을 위하여 조직된 이 회의 역사적 의의는 참으로 거대합니다. 또 남북조선 인민의 이 회의에 대한 희망도 거대합니다. (중략) 우리는 단선 단정을 반대하여서 조선의 자유 독립을 위한 역사적 방침을 결정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키 위하야 모든 것을 초월하야 이 민족의 동기를 타개합시다.”

 

▲ 1948년 4월 19일, 남북대표자 연석회의 개회사를 하는 김일성(앞 왼쪽). 중앙에 박헌영

김구는 준비해온 연설문을 낭독했다. “친애하는 의장단과 각 정당 단체 대표 여러분. 조국 분열의 위기를 만구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통일 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토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이와 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은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으며 민족이 없으면 무슨 정당이나 무슨 주의, 무슨 단체도 존재할 수 있겠나?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한 최대 과업은 통일독립의 전취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최대 장애는 소위 단정 단선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들의 공동한 투쟁목표는 단정 단선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 1948년 4월 22일 남북연석회의 본회의에 나서 연설문을 낭독한 김구


홍명희는 “늦게 참석하여 미안하다. 오늘날 우리의 나갈 길은 오직 민족자결주의뿐이다.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것은 사상여하를 막론하고 일치하는 것이다.”라고 발언했으며, 조소앙은 “우리에게 결정적 승리가 올 것을 믿고 여러분의 분투를 빈다. 민족의 승리를 위하여 공동투쟁을 한다.”고 연설했다.

 

▲ 1948년 5월 3일 <조선일보> 남북연석회의 요인 공동성명서 발표

대표자 연석회의와 별도로 ‘4인’ ‘15인’ 요인회담 열려

김구는 22일 본회의에서 축사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 지도자들과의 직접 대화라고 여겼다. 이것은 김규식도 마찬가지로 본회의에 아예 참석하지 않으며 요인회담을 강제했다. 앞서 김구와 김일성이 독대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기에 더 신중했다.


4월 24일 저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김일성, 김두봉이 모여 1차 의견을 조율한 후 26일 4자 회담이 열렸다. 남쪽의 김구, 김규식과 북쪽의 김일성, 김두봉이 머리를 맞댄 이른바 ‘4김 회담’에서 통일민족국가 수립 문제를 논의했다. 다음 날 27일은 김붕준, 이극로, 엄향섭, 허헌, 백남운, 박헌영, 주영하, 최용건이 더해진 15인이 회동했다. 김규식의 비서 권태양과 북쪽의 주영하가 공동성명서 초안을 다듬었다.


이 공동성명서는 4월 30일 2차 ‘4김 회담’과 함께 남북지도자협의회에서 채택된다. 바로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공동성명서’로 그 내용의 요지는 아래 상자 속 내용과 같다.
 


김구, 김규식은 서울로 왔지만 허헌, 홍명희, 김원봉, 이승엽 등은 남아

4월 30일 남북한대표자 연석회의가 끝난 후 김구와 김규식은 5월 4일 평양을 출발한 뒤 개성을 거쳐 5월 5일이 되어 서울에 도착했다. 김구는 북한을 떠나기 전까지 짧은 기간을 이용해 주변을 돌아보면서 내밀한 상황을 들여다보려 했다.


떠나기 전날에는 김일성과 남북한 모두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세우면 안 된다는 약속을 받으려 했다. 아울러 북측에 있는 발전소를 통해 전기를 공급받는 송전 문제와 조만식의 월남에 대해 소련군과 협의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런 내용은 남으로 내려온 뒤 김구와 김규식이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서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서 김구와 조소앙을 안내하는 김일성

연석회의에 참석했던 남쪽의 단체들은 성명이 남쪽에 전달된 후 곧장 환영 입장을 밝혔다. 반대로 남쪽의 미군정과 이승만은 남북 공동성명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기만적 협상에 동요 말라”면서 5월 10일, 당장 눈앞에 다가온 총선거에 매진하자고 주장했다. 미군 사령관 하지도 “총명한 조선인은 찬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성명의 핵심은 “우리 민족통일의 기초를 존정(尊定)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자주적·민주적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였으며, 외력의 간섭만 없으면 우리도 평화로운 국가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였다.”는 것이었다.

 

▲ 1948년 5월 6일 <경향신문> 평양회담 요청서에 하지 중장 “완연한 좌익의 진정”

5월 5일에 남쪽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66명이었다. 북으로 간 인원이 200여 명을 넘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는데 절반도 안 내려온 것이다. 게다가 북쪽에 남은 대표자들의 무게도 컸다. 대표적으로 김원봉, 허헌, 홍명희, 백남운, 이극로가 있다. 월북한 박헌영의 빈자리를 메워 남로당을 이끌었던 이승엽도 북에 남았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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