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정체성과 문화이데올로기

이동고 기자 / 기사승인 : 2019-12-04 19: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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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저널 인문학강좌- 울산의 정체성을 찾아서
▲ 백무산 시인 ⓒ이동고 기자

 

[울산저널]이동고 기자= 울산저널이 독자들과 함께 하는 인문학강좌로 기획한 ‘울산의 정체성을 찾아서’에 백무산 시인의 강의인 “울산의 정체성과 문화이데올로기”는 마지막 강좌였다. 문화, 정체성, 이데올로기, 노동문화, 처용설화의 비극성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2시간이 넘게 진행됐다. 울산문화가 왜 정체성 혼란에 빠지고 후진성을 거듭하는지에 대한 시원하고도 탁월한 혜안이 빛나는 강의였다. 강의 내용을 가급적 충실하게 담으려 애썼다. <편집자 주>

정체성, 문화, 문화이데올로기는 같은 말

정체성과 문화, 문화이데올로기는 같은 것이며 정체성이라는 것은 문화적으로 표현돼야 하고 문화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없다. 보통 이데올로기라면 정치이데올로기를 떠올리는데 가장 영향력이 강한 것은 문화이데올로기다. 처용문화제가 울산의 중심문화제이지만 정체성의 혼란이 있는 것은 출발에 문제가 있기에 그렇다.
처용은 역사가 아닌 설화이고 문학인데 지난 30년 동안 ‘문학을 주제로 한 처용의 정체성’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매년 ‘처용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묻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모든 질문에는 답이 있는 것 같아도 답이 없는 질문도 많다.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정체성은 현재 형성되는 과정이고 바뀌고 있기 때문에 답을 내기가 힘들다. 만일 ‘삶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쉽게 답을 할 사람이 없고,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로 질문을 바꿔야 올바른 질문이다. 다양한 주체를 불러내는, ‘어떻게’ 불러내느냐에 따라 답이 달리 나오는 방법의 문제다.
질문을 바꿔 무엇을 위한 정체성이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지리적·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집단의 문화적 동질성으로서의 정체성 △사회 성격의 현재적 동일성으로 정의된 정체성 △진보하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 지표가 되는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가지고 정체성을 묻는 과정이다. 특히 미래 이야기는 과거, 현재에 없는 것일 수도 있기에 열린 마인드가 필요하다.

문화정체성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

정체성은 과연 필요성이 있는가? 지금은 국가의 전면적인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시민사회 의 다양한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상황으로 다양한 주체와 다문화적으로 살아간다.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극우적이고, 정체성 이야기는 사회를 단일화, 동일화해서 지배이데올로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울산에도 법령이 아닌 지배이데올로기가 문화라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정체성은 세력 간 관계, 집단과 집단의 관계, 우리 사회 갈등이 존재하는 한 헤게모니 지표로 작동하기에 필요 없는 것 같다가 붙들고를 반복한다.
사회구성에서 동일성이 있는가? 역사적으로 급변하고 단절적인 울산에서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 고민할 것인가? 정체성 문제는 극단적인 갈등을 야기할 수 있고 한국동란도 정체성의 층돌로 봐도 된다. 남북으로 나뉘면서 서로 정통성 문제를 들고 나왔다. 아프리카 국경은 직선이 많은데 아프리카 54개국 경계는 제국주의자들이 종족, 문화, 전통을 무시하고 임의로 그은 국경선이다.
정체성은 사실 ‘내가 누구냐’는 질문인데 그런 질문은 잘 하지 않는다. 특히 문제없이 잘 살고 있을 때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외부세력이 들어오고 뭔가가 요구될 때 내적인 통합이 필요해져서 ‘도대체 우리는 누구야’ 또는 ‘우리는 어떤 민족이야’하는 대립되는 중심 생각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민족정체성의 역사적 기원과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조선말 때만 해도 우리 민족이 중국과 어떤 것이 다르냐는 개념이 없었다. 일본의 침략 후 활발히 이야기했고, 일제강점기 때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 당시 유럽 사람들 시선으로 보면 특히 영국의 왕립지리학회 ‘이저벨라 버드 비숍’ 여사의 눈으로 본 조선의 모습을 적은 글은 읽기가 아주 불편하다. 비숍은 1893년 동학혁명이 나기 한 해 전부터 네 번이나 방문하는데 그의 묘사가 이렇다.
‘조선은 모든 것이 정체된 나라,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담뱃대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서울 거리는 오물로 뒤덮였다. 일하는 것은 꾀죄죄한 여자뿐이었다. 가게 하나 없다. 조선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고 모든 것이 중국의 속국처럼 기대고 있다. 뛰어난 언문이 있으나 여자나 종들이 쓰고 양반은 쓰지 않는다.’ 등등. 좋게 보는 대목도 있는데, ‘이상하게 거지가 없다. 조선 사람은 아주 잘 생겼다. 왜놈들보다 중국인보다 잘 생겼다. 아주 활달하고 건강하고 진정성이 있다. 용모와 풍모만 보면 코카서스인 같고 일본하고 중국하고는 다른 종족인 것 같다.’ 사회 내용을 깊이 관찰한 듯한 대목도 있다. ‘일하지 않는 것은 수탈이 강해서 집이라도 고치려면 관리가 뜯어가고 매관매직이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2년 3년마다 관직을 바꾸면서 엄청난 뇌물을 쓰고 1년 안에 자신의 본전을 찾아야 한다. 조선은 착취하는 자, 착취당하는 자 밖에 없다.’ 온갖 악담을 한다. ‘관료 양반은 쓰레기 흡혈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관리를 장작 위에 올려 태워 죽이는 조선인의 행위는 정당하고 효과적이다.’
김수영 시인의 시 ‘거대한 뿌리’는 바로 비숍 여사를 주제로 쓴 시다. 시에 나오는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와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이라는 구절은 인상 깊다. 시인의 ‘거대한 뿌리’가 바로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체성에 대한 관점’이 중요

울산에 과거에 뭐가 있었고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전통에 대한 관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고려 때 성왕이 태화루 한 번 다녀간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처용설화에서 헌강왕이 개운포에 온 것은 어색(漁色, 여자 사냥)이 목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875년에 왕이 되고 880년에 개운포에 온다. 나이가 어려서 5년 섭정을 받는데 섭정이 끝나고 개운포에 온다. 당시 헌강왕은 20대 초반의 나이라고 봐야 한다. 20대 초반에 처용을 경주로 데려가고 정강왕이 된 동생 황이 즉위 1년 만에 죽는다. 이 시대는 신라가 엉망진창인 반란의 시대다. 농민들의 반란의 기록이 없으나 귀족들 반란은 기록이 많은데 헌강왕을 성군이라 하니 이해가 안 된다. 헌강왕 행차를 재현하는 것이 정체성을 찾는 일일까?
지금 정체성 찾는 일은 일제강점기 때 하는 일과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세기인데 12세기처럼 보인다는 정체론,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결여론, 이런 주장에 대해 조선의 지식인들이 열 받아서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쓴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일제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대항해 한국 고대문화의 세계사적 위치를 밝힘)을 발표하고 나중에는 친일로 돌아서는데 단군을 신사에 합체하자는 주장까지 한다.
울산사람은 일제강점기에 민속연구를 대표적으로 한 송석하는 잘 알지만, 어버지 송태관이 악질 중 악질이었다는 것은 잘 모른다. 이토오 히로부미 통역으로 출발, 고종의 통역비서관 역할을 한다. 이완용의 오른 팔이자 고종에게 사약을 먹인 사람이 송태관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다. 송석하는 꾸준히 민속연구를 했는데, 일본인들이 아주 좋아하고 관심을 뒀다. 그 모든 것이 지배를 용이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겠지만.

정권교체는 이데올로기 벗어난 문화적인 정체성을 바꾸는 문제

지방정권이 바뀌었으니 정체성이 달라져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좌파 독립운동가를 되살려내려고 노력하기도 하는데 울산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뭐하려고 애를 써서 정권을 바꾼 것이냐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중앙과 대비해 지방문화는 중립적이라 생각하지만 아주 정치적이고 계획된 이데올로기이고 문화적인 해석을 잘 해 나가야 한다. 사회는 변하고 발전하지만 변화의 방향과 목적이 우리 삶을 풍부하게 행복하게 하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 정체성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이다. 왕이나 영웅을 이끌어내는 것은 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는 일정한 허위의식을 만든다. 견우별과 직녀별도 엄청난 거리에 있는 별인데도 마주 보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허위의식이다.
어제 인터넷 기사에 못사는 동네 여학생들이 치마가 짧다는 기사가 나왔다. 부모의 영향을 받거나 자유로울 수 있는데, ‘그렇기에 너희들이 가난한 것이야’하면 이데올로기가 된다. 과학적이지 않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허위의식을 심는다.
이데올로기 시대는 지나갔다고 자기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 같지만 우리 사회의 거대한 기억 속에 나의 기억이 붙들려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건물이나 집을 떠올리지만 어떤 사람은 건설회사, 어떤 이는 아파트, 부동산, 부동산 입주, 어떤 이는 일당을 떠올릴 수 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존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유물론 이론처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면 세상은 금세 바뀐다. 하지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조건에 반하는 허위의식, 이데올로기를 가진다. 권력자들은 이것을 최대로 이용해, 계급사회가 아님을,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라고 왜곡한다.
다른 계급을 모방하는 이데올로기,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는 장치를 만들어 놨다. ‘이런 개념이 있다’로 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이라는 단어를 던졌을 때 존재가 달라 여러 생각들이 나오듯이 개념에는 기호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데올로기는 논리성을 가지고 설명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와 대비되는 것이 과학적 진실인데 이데올로기는 신화적 형태, 근거 없음, 민족적 형태, 종교적 형태로 나온다. 예를 들어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누가 한 이야기인가. 어떤 논리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도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어떤 영웅적인 이데올로기를 심어 넣는 과정이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가 그냥 악을 쓰고 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의 문화, 오히려 야만성 키워

문화는 자연의 야만 상태를 극복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됐다. 루소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풀었다.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지만 인간은 곳곳에 사슬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문명은 신석기시대 농사혁명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하고 곡식을 저장하고 빈부의 격차가 생겼고, 부를 뺏고 뺏기는 전쟁을 치르고 노예를 갖기 시작하면서 국가를 건설했다. 야만을 극복하기 위한 문화가 새로운 야만을 만들었다. 인간은 드디어 ‘이성’이라는 것을 발명했다. 하지만 이성이 지배하는 그 시대에 엄청나게 많은 전쟁과 학살이 일어났고 2차 세계대전 말기에 가장 야만적인 홀로코스트를 겪게 된다.
계몽주의자들이 주도해서 사회변화와 삶의 다양한 양식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문화’가 전면적으로 부각됐다. 인간이 윤택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에서 문화가 나온 것 같지만 다르게 태동했다. 20세기는 문화시대, 문화폭발의 시대로 문화가 양적으로 많아졌다. 집은 건축문화이자 예술품으로 취급되며 아파트 같은 곳은 단순히 비를 피하는 기능이 아니라 ‘집이 카페 같은 문화상품’으로 되고 있다. 밥도 변했는데 회식, 만찬 등 사람들이 만나 어울려 먹는 문화상품으로 변했다. 노동도 신체노동을 해왔던 것과 판이하게 다르게 정신노동, 창작노동, 예술노동, 정보처리 등 비물질노동, 인지적 노동까지 지식을 노동화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호모루덴스 등 4차 혁명이 우리 코앞에 있다.
변화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형광등을 만드는 것은 전기노동자도 유리노동자도 필요하지만 디자이너다. 기술의 영역은 아주 작은 영역으로 변했다. 디자이너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수요를 좌지우지 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히틀러 시대 독일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한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에서 나치즘 히틀러가 가입한 당이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이었고 그전에 ‘독일노동자당’이었다며 억압체제에 살았던 자가 내부에서는 더 억압적인 체계를 더 만들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줬다. 빌헬름 라이히는 융 심리학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성해방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독일공산당에서 쫓겨난다.

혁명시대 세계적인 대문호들 노동자 출신 많아

현대에는 새로운 개념으로 문화자본이라는 것이 생겨났는데 ‘부자들이 좋은 학교를 다닌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화자본이 결정한다. 노동운동은 자신의 영토를 확보했지만 자신의 문화 영역이 없어 자본의 문화가 들어오면 노동의 문화는 금세 회수 당한다. 소비자가 된 노동자들은 자본문화의 부속물이 된다. 지금 우리는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대한 열차 속에서 아무리 싸워도 달리는 방향을 바꾸지 못하는 꼴이고, 오직 문화예술 변화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문화이론가의 주장이다. 떠오르는 혁명시기의 작가들 ‘월터 휘터먼’, ‘존 스타인벡’, ‘잭 런던’, ‘블라드미르 마야콥스키’, ‘막심 고리끼’, ‘조지 버나드 쇼’, ‘하리 마르틴손’, ‘워싱턴 그룹’(광산 노동자). 이들의 공통점은 노동자 출신 작가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든 노동자들이 당대 최고의 작가가 된 역사가 많다. 지금 자생적 노동자 문화는 생산적이지 못하고 소비적이 됐다. 워싱턴 그룹(광산 노동자)은 공동창작을 하면서도 ‘전업작가로의 길’은 가지 않고 노동자로 끝까지 남았다.
자본문화가 지배하는 속에서 어떻게 인간해방을 성취할 것인가는 예술의 영역 문제다. 여기서 ‘아방가르드’를 눈여겨봐야 하는데, 문화예술에서 급진주의를 표방하는 ‘아방가르드’가 주창하는 것은 당대의 예술적 전통에 안주하지 않고 모든 인습과 제도를 파괴하고 전복하면서 끊임없이 실험해온 예술운동이자 인간 예술활동에 대한 전면적인 민주주의의 실천이었다. 문화민주주의는 누구나 예술과 창작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노동자 문학은 평가자의 잣대로 평가절하돼 문화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 태화루 복원 애초 설계도는 5칸의 촉석루 크기로 설계되었지만 그 후 설계변경을 통해 7칸의 크기로 늘려 준공됐다.
이 정도 규모라면 경복궁 내 누각인 경회루 크기이다.   ⓒ이동고 기자


울산문화는 열등의식 벗어나 당당한 변방문화 자부심으로 태어나야

1990년대 울산은 공해도시, 회색도시, 유흥의 도시, 졸부의 도시, 문화불모지 도시, 가장 살고 싶지 않는 도시였다. 이런 오명을 벗고자 하는 노력으로 오래된 건물을 없애더라도 별다른 반대도 없고 ‘먹고는 살아야지’하는 말만 나오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도시였다.
이제는 뭔가 해야겠다는 문화도 불도저식으로 빨리 빨리 만들면 된다는 식이다. 태화루를 복원했는데 그 규모가 가히 놀랍다. 진주 촉석루도 5칸인데 태화루는 규모가 기둥이 9개, 7칸이다. 이 규모에 가까운 것은 정면 7칸, 측면은 5칸인 경회루밖에 없다. 촉석루도 기둥 위에 익공 정도만 올렸다 경회루도 공포를 쓰지 않았는데, 태화루는 주심포까지 올렸다 태화루가 경회루보다 양식면에서 더 화려하다. 경회루에 공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왕의 집무실인 근정전이 가까운 곳이라 사용하지 않았다. 객사의 부속건물이었던 태화루를 이 정도 크기로 지었다면 허물어진 객사는 근정전만 하게 지어야 격이 맞는데 어찌할 것인지. 또 태화루는 서민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건물이다. 울산은 군사가 주둔하던 곳이었기에 태화루는 유흥문화를 즐긴 관리들의 휴식공간이었다. 성왕이 다녀가며 연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방치해서 건물이 두 번이나 무너졌고, 태화루 누각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태화루 중수라는 표현을 쓰는데 ‘중수’라는 것은 과거의 것을 계승하는 걸 품고 있다. 태화로터리 쪽에서 바라보면 전통적으로 경관을 가장 중시했던 풍경에 대한 폭거다. 550억 예산을 들여 경관을 중시한 랜드마크라고 자랑하지만 강변에서 보면 건물이 너무 커 풍경에 대한 폭력이다.

 

▲ 공업탑은 울산공단을 만든 상징물이지만 지역의 정서와 정체성이 없는 상징으로 건립 때부터 말이 많았다. 앞은 자유의 여신상     ⓒ이동고 기자


울산에 공단이 서기 전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은 70년에 100달러였고 당시 경제력은 세계 100위, 북한이 80위 정도였다. 울산역은 근대화 공업화의 관문이었다. 대한민국 산업혁명의 관문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들어온 학성동 울산역 자리는 근대박물관을 만들면 좋은 자리다. 울산시민들이 대단하게 생각하는 지구의, 월계수잎, 톱니바퀴 등 공업탑로터리 상징탑은 국가독점자본과 개발독재의 상징탑이므로 철거하는 것이 맞다. 공업탑의 상징성은 철저히 중심문화에 근거한 것이고, 중심문화는 지배자들이 왜곡되게 만들어 놓은 문화다.
중앙에서 벗어난 변방문화에서 울산지역의 희망을 찾아야 한다. 신용복 선생은 ‘변방이 희망이다’라는 표현을 썼다. 원래 중심은 멈춰 서 있는 것이고 변방지역에서 역동적인 힘과 창조적인 힘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중앙에 대해 열등의식으로 가득 찬 변방지역이 부를 갖추게 되니 중심문화에 대한 욕심으로 자꾸만 왕과 양반과 귀족하고 연결시키려고 하고, 그 노력마저 기회이긴 하지만 물량중심으로 나가다 보니 ‘네 것보다 크다’고 하는 돈자랑하는 졸부문화로 전락됐다.
국가정원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국가정원이다. 하지만 우리가 괜히 시비를 걸면서 “우리 국가정원이 순천보다 더 크다”는 식으로 열등의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학교, 종교 등도 그렇지만 울산박물관도 하나의 이데올로기 장치로, 일하는 노동자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옛날 유물을 일괄적으로 전시하고 공장, 회사 등 대기업 홍보관이라는 성격이 짙다.

 

▲ 울산경찰서 1980년대 모습                                                                                                       

 
예전 북정동 울산경찰서 유치장은 1940년대에 지어졌는데 1층은 원형에 7개 방이 방사형으로 배치돼 있었다. 반 지하방에 창문으로 마당에서 빛이 조금 들어오는 식이었는데 이 경찰서 유치장 건물이 사라진 것이 안타깝다. 공리주의자 벤담의 설계였는데 이 건물은 판옵티콘 형식으로, 판(전체)+옵티콘(본다), 즉 중심(권력 중심)에서 모든 것을 본다는 근대권력의 건축학적 상징물이다. 이것은 간수 한 사람이 여러 방을 효율적으로 감시가 가능하다는 장점으로 끝나지 않는다. 항상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줘 스스로 검열을 자기 내면화, 자기 검열화해 스스로 자제하는 심리를 갖게 하는 이데올로기 작용이 이뤄진다. 이 건물을 지하에 그대로 살려 지상 유리로 덮어 볼 수 있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처용은 우리나라에 드문 비극문학

처용 이야기를 포용과 관용으로 해석하는데 설화 내용에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처용이 아내가 겁탈당하는 상황 또는 통간하는 상황에 “노래하고 춤췄다”고 하는데 그게 용서가 되나? 누가 봐도 처용이 용서할 상황이 아니다. 처용은 설화로 문학으로 봐야하는데 역사학자들이 역사적 사실에만 초점을 맞춰 논쟁을 벌여왔다. 그동안 왜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해석해왔는가 살펴보면 이전 기록을 그냥 베껴 쓴 것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특이하게도 비극문학이 없다. 대부분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리스 문학과 세익스피어 문학도 비극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론’이라는 것까지도 쓰는데, 이는 문학이 비극을 통해 인간의 진실을 깨우치기 때문이다. 미케네의 군주인 아가멤논 이야기는 총사령관이 출전해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10년 만에 돌아오는데 왕비와 그의 정부가 마가멤논을 죽이는 이야기뿐 아니라 다양한 개인의 비극적인 인연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스의 비극은 ‘인간의 본질과 카타르시스’를 보여준다.
처용은 아주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는 망하고 있었고 그 시기에 최치원이 돌아온다. 최치원과 처용은 거의 당대의 사람이다. 최치원은 진덕여왕 시기 개혁정책을 시행하지만 왕족이 아니어서 밀려나게 된다. 신라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최치원은 떠난다. 그런 상황에서 처용은 무엇을 했으며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편집자주 : 처용가에 대한 문학적 해석은 별도 문건으로 대신했다)


정리=이동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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