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계곡

배성동 시민/소설가 / 기사승인 : 2021-08-30 00: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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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범 망명 보고서(19)

▲ ©문정훈 화가


약탈자와 제왕의 혈투

노국 ‘제국의 령’을 넘은 행렬들은 타이가(Taiga)에 들어섰다. 국경고지의 주봉(비소트나야산‧ 해발 966미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은 산군(보리소프 고지) 아래로는 무인지경의 침엽수림 지대였다. 조선의 백두대간과 연결되는 이 국경고지는 동고서저의 형태를 이뤘는데, 만주쪽에 비해서는 매우 가풀막졌다. 이곳에서 국경 초소가 있는 목우촌(압치니코프)까지는 한 마장 거리긴 했으나 그곳에 상주하는 몽구가이(바라바샤) 군부대를 피해 가려면 얼마나 더 걸릴지 몰랐다. 노일전쟁 패전으로 예민해질 데로 예민해진 노군 초병들이 총격을 가하는 일이 빈번했다. 


노령으로 내려올수록 길은 한층 험했다. 거기다 보일 듯 말 듯하던 길은 끊겼고, 숲속에 잠긴 타이가의 습한 냄새는 강렬했다. 


“죽음의 길로 안내하는 것 아니오?”


응달진 계곡에서 내려오는 싸늘한 한기를 느낀 별동대 김 포수가 이반에게 농을 건넸다. 


“맞소. 우데게 원주민들은 여길 피의 계곡이라 합니다.” 


그때 무슨 냄새를 맡은 풍산개가 피의 계곡으로 뛰어갔다. 얀콥스키가 뒤쫓았다. 뿌리째 쓰러진 커다란 나무를 다리 삼아 건넌 개울가에 발자국들이 난무했다. 큰 발자국은 아무르 호랑이 발자국이었고,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 무리는 늑대 떼였다. 풍산개의 예리한 후각이 인근 혈투 현장을 찾아냈다. 스무 척 아름드리 고목 아래였는데, 피의 현장에는 늑대 세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타이가의 강자들끼리 혈투를 벌여 늑대도 죽고 추적자도 부상을 입은 살육의 현장이었다. 필사적으로 싸우던 늑대들은 목에 구멍이 나 있었고, 피범벅 몸뚱이의 내장이 파 먹혔다. 아무르 호랑이는 이곳의 왕이고, 늑대는 타이가의 약탈자다. 밤눈이 밝고 무리를 지어 협공하는 약탈자 늑대 떼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일행은 피의 현장을 살펴봤다. 혈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입은 호랑이의 핏자국이 계곡 아래로 나 있었다. 쓰러진 늑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피로 물든 늑대 털을 살피던 이반이 멈칫했다. 눈가루처럼 부드러워야 할 늑대 털가죽이 병든 짐승가죽처럼 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이반은 순간 노일전쟁 참전 당시 만주지역에서 발생한 호열자를 떠올렸다. 돌림병 호열자(페스트)의 숙주일 가능성이 있었다. 노일전쟁 중에 만연한 가축전염병은 만주, 연해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졌다. 감염원의 주범이었던 박쥐와 천산갑에서 전파된 전염병은 집에서 키우던 개와 거위, 고양이에게로 돌림됐고, 이윽고 야생 밍크나 여우, 늑대에게도 번졌다. 이반은 멋모르고 다가가는 행렬 일행을 말렸다.


“가까이 가면 안 돼. 늑대 털에 돌림병 균이 묻어 있을 우려가 있어요.”


선두에 있던 권취문이 멈칫했다. 


“야생 늑대가 아니라 꼭 개처럼 생겼소.”


“원래 늑대는 이곳 우데게 원주민 손에 길들여진 거요. 원주민촌이 이곳에서 쫓겨나자 다시 야생으로 돌아간 거요.” 


“로씨아엔 늑대 잡는 척살대가 없소?”


늑대는 인명 살상을 가장 많이 하는 맹수다. 함북육진 복무규정에는 위민제해라는 척살방침이 있었다. 백성을 위해서 금수의 살상은 정당화됐다. 지방에서 출몰하는 범을 포획할 책임은 지방관에게 있었다. 관찰사와 절도사는 그 지방의 포호활동을 책임지고, 수령은 관찰사와 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여긴 그런 건 없소. 누구든 먼저 잡으면 용자로 받드오.”


이반은 수십 년 전만 해도 타이가를 진호하던 아무르 호랑이가 만주와 연해주를 잇는 동청철도가 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철로를 내면서 적잖은 삼림이 훼손됐고, 자신의 영역을 침탈당한 맹수들은 인간과 충돌했다. 맹수들은 제국주의 총구 앞에 급속히 사라졌다. 그렇다고 창으로 짐승을 잡는 시절을 살아온 조선 포수들은 사냥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두만강으로 범사냥을 함께 나갔던 얀콥스키가 조선 포수를 보곤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선 포수는 호랑이와 표범 그리고 사나운 곰을 여러 마리 잡은 백전노장이었다. 


“칠보 앞에서 방아쇠 당긴다고? 이쯤 되면 무모한 짓 아니야?” 


약삭빠른 얀콥스키가 몰아세우자 이반이 맞받았다. 


“총 없이는 타이가에 들어가지 않는 당신네들 담력으론 조선 포수를 당해 낼 수 없지. 화승총 없으면 창으로 범 잡는 조선 포수라네. 급하면 맨손으로 범 때려잡는 위인도 있지. 내 창 받아라! 고래 고함을 지르며 창살을 목구멍 깊숙이 쑤셔 꽂아 넣어.”


“그런 용맹한 조선 민족이 왜 나라를 잃었단 말이야?” 


얀콥스키의 물음에 배포 넓은 이반이 대답했다. 


”알다시피 섬나라 족속들이란 호시탐탐 대륙을 넘보는 승냥이 기질이 있는 놈들 아닌가. 왜놈들이 저들 힘 믿고 경망스럽게 날뛰지만 오래 가진 못할 걸세.“ 


제발 그랬으면 했지만 갈수록 옥죄는 왜의 공세는 더해갔다.
 

▲ ©문정훈 화가


잣나무골 고려인촌


무릎까지 차오른 눈을 헤집고 나가던 이반이 방향을 틀어 옆으로 피해갔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하시오. 짐승 잡는 함정이 많은 곳이요.“


사람들은 이반의 뒤를 따라 조심조심 발을 놓았다. 어른 손바닥만 한 아무르 호랑이 발자국이 또 다시 발견됐다. 이번에는 지나간 흔적이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이었다. 주변에는 새끼 발자국들도 보였다. 눈 발자국을 따라가던 이반이 가문비나무에서 호랑이 발톱 자국을 확인했다. 이반은 총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잣나무 군락이 하늘을 뒤덮은 타이가에 들어서자 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허방다리가 눈에 띄었다. 득실거리는 맹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들이 놓은 함정이다. 우데게 원주민이나 만주족이 파놓은 함정인지 고려인이 설치한 함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허방다리의 형틀로 봐서는 고려인 벼락틀은 아닌 것 같았다. 겨울철에 들면 먹을 양식이 궁했던 그들은 너도나도 덫을 놓거나 함정을 팠다. 땅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가는 막대기 따위를 걸쳐 놓은 뒤 흙을 덮어 땅바닥처럼 만든다. 행렬은 허방다리를 피해 구덩이를 에둘렀다. 구덩이를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땅바닥에 발을 놓으려는 찰나 창살 박힌 가루택이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앗!” 


날아오는 창살을 피하지 못한 누군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별동대의 막내 석이와 만주족 여자 쇼냐였다. 뒤따르던 쇼냐가 땅바닥에 숨겨진 가루택이 줄을 건드린 것 같았다. 이반과 반구대 도포수가 쓰러진 두 사람에게 뛰어갔다. 긴 나뭇가지를 휘어 말뚝에 걸친 뒤 그 끝에 칼이나 창날을 매어둔 가루택이는 단도 같은 아무르범 앞발처럼 강력했다. 다행히 여자는 장딴지를 스쳤지만 옆구리를 가격당한 석이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있었다. 마침 가까이에 동굴이 있었다. 머리 회전이 빠른 권취문이 동굴 속을 향해 총을 한 방 놓았다. 동굴 바닥에 석이를 눕힌 권취문은 조선 무관답게 위기에 잘 대처했다. 권취문은 얼른 창날을 빼내고 피가 나는 옆구리를 무명천으로 감쌌다. 놀란 행렬은 무인지경 산중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켜보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별동대 김 포수가 석기를 냅다 업었고, 이반은 소냐를 일으켜 세워 자춤발이 걸음을 부축했다. 행렬은 빠른 속도로 피의 계곡을 빠져나왔다. 산으로 에워 싸인 저지대에 들어선 행렬은 급히 외딴 고려인 민가부터 찾았다. 인기척을 느낀 집주인이 나왔다. 고려인 리인섭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여기서는 니가이 꼴야로 불렸다. 석이와 쇼냐를 본 꼴야는 인사할 겨를도 없이 집안 아랫목에 눕혔다. 상처가 심한 석이를 본 그의 아내는 행여 자기네가 놓은 벼락틀에 다친 것이 아닌가하고 내심 초조해했다. 


꼴야는 집에 보관하고 있는 낡은 상자를 꺼냈다. 여러 가지 약품가지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속병에 좋다며 불에 구운 죽염도 있었다. 꼴야는 상자 속에 든 가루약을 꺼내 상처에 뿌리고, 출혈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를 보고 있던 쇼냐가 이반을 불렀다. 쇼냐는 가방에서 꺼낸 환약을 건네주며 석이에게 먹이라고 했다. 


“무슨 약이요?”


“유랑극단에서 파는 청심보명단요.”


작은 환약이었다. 청국산 전통 한약에 서양 의학을 접목해 만든 만병통치약이었다. 이반은 석이에게 약을 먹였다. 그의 아내는 더운 물을 끓이고, 꼴야는 사냥해둔 산돼지를 삶았다. 꼴야는 여름에는 광산 금전꾼 일을 하고, 겨울철이면 짐을 나르는 짐꾼이었다. 군부대의 짐을 어깨짝에 피멍이 들도록 나르는 일을 10년째 해왔다. 약품들은 짐꾼 일을 하며 구해뒀다. 비록 미천한 짐꾼이었지만 사람 됨됨이는 괜찮은 친구였다. 한 번은 국경을 넘는 노국 범죄자들에게 죽임을 당해 나무에 간당간당 매달린 고려인 시신을 거둬 오기도 했다. 


다행히 여자는 기운이 살아났지만 석이의 상처는 점차 악화됐다. 


“이 병 고칠 사람은 백 리 밖에 있네.”


한 시 바삐 고려인 의사가 있는 지신허로 옮겨야 했다. 지신허까지는 백 리나 되는 마차 우편길이었다. 


“급한 대로 멍구가이 약종상에게라도 가는 게 좋겠어. 거기 가면 용하다는 가시어미가 있네.”


이반은 두 부상자와 함께 약종상이 있는 멍구가이(압치니꾸바)로 서둘러 떠났고, 별동대는 노군수비대의 눈을 피해 하늘이 막힌 타이가 숲으로 숨어들었다.

※ 이 글과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배성동 시민기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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