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되어버린 소년

이경하 크리에이터 / 기사승인 : 2021-06-28 00:00:16
  • -
  • +
  • 인쇄
청년 공감

어렸을 적 아버지의 넓은 어깨에 올라타 주위를 둘러볼 때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실내화 주머니 들고 다니던 시절, 소변 실수를 했을 때 몰래 새벽에 이불을 빨아주셨던 아버지.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어서 꾀병을 부린 나에게 달콤한 미숫가루를 타주셨던 아버지. 이렇게 슈퍼 히어로 같았던 그의 등 뒤에서 자란 내가 이제는 눈높이가 맞춰질 정도로 훌쩍 커버렸다. 23살이 된 올해, 한 소년이 갑작스레 가장이 되어버린 나이가 되고서야 그가 내쉬던 한숨의 깊이를 알게 됐다. 소년이 가장이 되고, 또 그 가장이 소년이 되려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에 자꾸만 작아지는 그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할까. 아버지의 굳은살이 잔뜩 배긴 투박한 손을 잡고 자꾸만 영원을 빌게 된다. 딸에게 용돈 받는 그 날까지 건강하기만 해달라고 중얼거리며 괜히 아버지 손 한 번 더 잡아본다. 


나는 아버지를 소년이라 부르고 싶다. 아버지에게도 이름 석 자가 존재하며 또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때가 존재한다. 세상에는 갑자기 아버지가 되어버린 다양한 모습의 소년이 존재한다. 이 글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 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정호승 시인의 ‘아버지의 나이’는 김재준 시인의 풍성한 공감각적인 시어 사용과 은유법으로 전하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직설적이고 산문적인 표현으로 담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화자는 아버지가 가장이 되었을 때의 나이가 직접 되고서야 아버지의 행동과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이 시에서는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그의 헌신하는 삶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화자는 비로소 아버지의 나이가 돼서야 삶의 여유와 의미, 지혜를 깨달았다. 또한 아버지가 어린 내게 해줬던 사소한 행동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됐다. 화자는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자신이 성장했음을 자각하고 삶의 진리를 깨우칠 수 있었다. 화자는 아버지를 그저 은퇴한 슈퍼맨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버지를 거울로 삼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더 이상 우리의 아버지를 헌신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연민(憐愍)으로 기억하지 않고 삶의 멘토(mentor)로 존경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등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하청호, ‘아버지의 등’


화자는 가정을 위해 눈물마저 머금어야 했던 아버지를 등과 땀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가족들의 경조사가 있을 때 가장 기뻐하고 슬퍼할 것만 같은 아버지가 누구보다 무뚝뚝하게 계시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자신까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면 가족 모두가 흔들릴까 봐 필사적으로 속으로 삭히셨던 것이 아닐까? 넘어지면 엉엉 울고 갖고 싶은 장난감이 생기면 떼를 쓰던 감정에 솔직했던 소년은 어느새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자라게 된다. 


웃음과 말수가 줄어든 아버지를 보면 속상하다. 책임지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 어느 순간 자신의 원초적인 감정마저도 누르면서 살아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선 왜 땀 냄새가 났을까? 삭히고 삭힌 희로애락(喜怒哀樂), 모든 감정이 눈물이 아닌 노동으로 등에 난 땀으로 표출된다는 것이 더욱더 안타깝다. 아버지는 등에 난 땀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도 슬프다고, 하지만 힘을 내야 한다고. 퇴근하고 말없이 소주를 마시는 아버지에게 땀 냄새가 났다. 방문 너머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감정의 자유를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아버지를 어떻게 노래하는가? 무뚝뚝하고 어려운 존재?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 나는 더 이상 아버지를 연민(憐愍)하며 노래하고 싶지 않다. 삶의 멘토가 누구냐는 면접관의 식상한 질문에 ‘빌 게이츠’나 ‘김연아’로 대답하지 않고 당당히 내 아버지 이름 세 글자를 말하고 싶다. 식상한 질문에 식상한 답변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정말 간단하다. 그를 존경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삶은 유한하기에 아프다. 유한하기 때문에 더욱더 서로를 빼곡하게 사랑해야 한다. 아버지는 매순간 다른 행동으로, 표정으로 빼곡한 사랑을 주셨다. 비록 이번 생에 아버지는 처음이라 투박하고 서툴렀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사랑을 주셨다. 살아가며 몸과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그만큼 사는 세상이 힘겹기 때문이다. 이런 모진 세상으로부터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사랑하려 한다. 갑자기 아버지가 되어버린 우리의 소년을.


이경하 크리에이터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경하 크리에이터 이경하 크리에이터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