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내정사(關內程史)’-이제묘, 고려보, 옥전

문영 시인 / 기사승인 : 2020-09-23 00: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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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로 쓰는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열하 답방 240년(경자년) 기념

관내정사(關內程史)는 산해관 안에서 본 이야기란 의미로 7월 24일에 시작해 8월 4일까지 11일 동안이다. 관내(關內)는 산해관 안쪽 지역을 뜻한다.

노룡현 이제묘
 

▲ 이제묘 야산


▲ 이제묘 이제고리 표지석
▲ 이제묘 청절묘


영평부는 1914년 현재 노룡현으로 바뀌었다. 연암은 영평부를 조선 평양보다 풍광이 뛰어나다고 찬탄했다. 그러나 연암이 아름답다고 한 영평부의 옛 성은 서문 일부가 조금 남아 있고 성벽은 거의 무너지고 없다. 우리는 산해관에서 노룡현으로 가는 비포장 도로 공사 때문에 시간이 늦어져 영평부 옛 성은 제쳐두고 이제묘를 먼저 찾았다. 


이제는 백이와 숙제로 그들은 고죽국의 왕자들이다.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 주나라로 갔다. 그들은 주(周) 무왕이 은나라를 치려 하자, ‘효’와 ‘인’에 어긋난다고 반대했다. 주 무왕은 상국인 은나라를 쳐 멸망시켰다. 백이와 숙제는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죽었다. 그런데 이제묘의 옛 흔적은 노룡현 간수소(감옥소) 야산에 있다. 그곳은 청절묘(淸節廟)와 이제고리(夷齊故里, 백이숙제의 옛 동네)의 표지석이 없으면, 전혀 알 수 없는 곳이다. 백이와 숙제는 공자(孔子)가 그들을 칭송하고, 사마천이 <사기열전> 첫 번째 장에 기록함으로써 충절의 대명사가 됐다. 


이런 백이와 숙제도 현대에 와서 작가 루쉰과 모택동에 의해 비판과 비난의 표적이 됐다. 1966년과 1976년 10년간 벌어진 문화대혁명은 공자와 유교로 대표되는 문화유산을 많이 파괴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이제묘였다. 그런데 홍위병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이제묘는 현 노룡현 이제묘가 아니고 당산시 관할인 손설영촌에 있는 이제묘다. 문화대혁명 때 파괴된 이제묘와 함께 수양산도 철광석을 캐느라 산봉우리도 없어지고 녹슨 제철소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이제묘라곤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손설영촌 그곳을 옛 조선 사신들이 참배하고 고사리를 먹는 의식을 치렀다. 그러니까 과거 이제묘는 진황도시 노룡현 이제묘와 당산시 난현 손설영촌 두 곳이었다. 


연암은 <이제묘기>에서 이제묘는 “홍무(洪武, 명 태조의 연호) 초년(1368)에 영평부 성 동북쪽 언덕에 옮겨 세웠다가 경태(景泰, 명 대종의 연호. 1450~1456) 연간에 다시 이곳에 세웠다”고 했다. 이 기록에서 노룡현 이제묘는 이제의 옛 고향이고, 수양산 이제묘는 충절을 기리는 공간으로서 뒤에 옮긴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노룡현 이제묘는 유교 이념의 폐허지, 손설영촌 이제묘는 복구 불능의 매몰지로 변했다.
 

▲ 노룡현


▲ 노룡현 풍경-장기 두는 사람들
▲ 이제묘 옆 노룡현 간수소(감옥소)
▲ 이제묘에서 본 노룡현


고려보

1780년 7월 26일 이제묘를 참배한 연암은 야계타에서 소나기를 맞는다. 이곳에서 ‘길에서 소낙비를 만나다’라는 짧지만, 묘사가 뛰어난 생생한 글이 탄생한다. 야계타를 지나 사하역에서 자고, 다음날 사하역을 출발해 당시 창기 고을로 유명한 진자점으로 가는 도중에 연암은 “길가에 1백여 리 사이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수없이 많이 자빠져 있다”고 기록했다. 우리가 가면서 본, 버드나무 가로수가 늘어선 풍경은 옛 그대로였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간 고려보는 병자호란(1636)과 정축호란(1637)에 조선인이 강제로 이주한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조선의 풍물은 남아 있지 않다. 


연암은 7월 28일에 “고려보에 이르니 집들이 모두 띠 이엉을 이어서 몹시 쓸쓸하고 검소해 보인다. 이는 묻지 않아도 고려보임을 알겠다. 정축년(병자호란 다음 해. 1637)에 잡혀 온 사람들이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어 산다. 산해관 동쪽 1천여 리에 논이라고 없던 것이 다만 이곳만은 논벼를 심고, 그 떡이나 엿 같은 물건이 본국의 풍속을 많이 지녔다”고 했다. 세대가 흘러가면서 고려보와 사신들과의 관계는 악화됐다. 결국 연암은 “서로 간에 상극이 되어 원한이 깊은 원수를 보듯 한다”고 탄식했다. 

 

▲ 풍윤 가는 길


고려보는 행정명으로 당산시 풍윤구 고려포촌이다. 당산시는 2008년 사천성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당산 대지진은 1976년 7월 28일 새벽에 일어났고, 진도 7.8의 강진이었다.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를 중국 정부는 24만2000명이라 했지만, 서방세계는 80만 명으로 추정했다. 당시 당산시 인구가 100만이었으니까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셈이다. 당시 풍윤 지역도 마찬가지였는데, 현재는 풍윤현 인구만 해도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풍윤현 중심가에서 나와 G102번 국도 삼거리에 있는 고려보는 초라한 시골 마을이다. 고려포촌위원회 사무실과 건물 위에 세운 동네 확성기, 지붕 굴뚝이 우리나라 70년대 새마을운동을 했던 농촌 모습을 연상케 한다. 현재 고려보인들은 모두 한족이라고 가이드가 말한다. 가이드가 조선과 관련 있는 것이 어디 없는지 물어도 “뿌쯜다오(몰라요)”라고만 한다. 확실히 그들은 고려인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부근 시멘트 공장 뿌연 연기에 갇힌 고려보에는 고려가 없었다.
 

▲ 고려포촌위원회 사무실


▲ 고려포촌위원회 사무실

 

▲ 고려포촌 입구 도로
▲ 고려포촌 동네 스피커
▲ 고려포촌 지붕 굴뚝


옥전-호질의 고향

열하일기 여정에서 풍윤성과 옥전현은 옛 모습이 완벽하게 지워진 곳이다. 특히 옥전은 북경에서 다른 일정을 생략하면서 찾아갔다. 그곳은 연암의 소설 <호질>의 고향이다. 옥전 톨게이트에서 옥전 시내로 들어갈 때 설레던 마음은 두 시간의 답방에서 허망함으로 끝났다. 당산시 옥전현은 백화점과 상가 빌딩이 있는 소도시다. 중심가를 답방하면서 현지인에게 탐문하니, 옛 상점이나 건물은 문화대혁명 때 거의 없어졌단다. 이제 옥전에서는 ‘범의 꾸짖음’은 들을 수가 없다. 연암은 이곳에서 <호질>을 베끼고 개작한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 옥전 톨게이트


1780년 7월 28일 저녁 연암은 옥전현에 도착해 성안 노랫소리가 울리는 심유봉이란 사람의 점포를 방문한다. 그 상점에서 연암이 세상에 둘도 없는 기이한 글이라고 평한 ‘호질’을 발견하고 정진사와 함께 베낀다. 주인 심유봉을 향해 “선생께서 지은 것이지요?”라고 두 번이나 묻는다. 심유봉은 자기는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작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왜 글을 베끼느냐고 되묻는다. 연암은 조선에 가서 다른 사람을 웃기게 하려고 그런다고 답한다. 숙소에 들어와서 정진사가 잘못 쓴 글을 고쳐서 글 한 편을 만들었다고 했다. 

 

<호질>은 연암이 쓴 소설이다. 그러나 정작 연암은 <호질후지>에서 “이 글은 비록 지은 사람 성명은 없으나, 아마도 근세의 중국 사람이 비분강개하여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자기가 쓴 글이 아니라 하면서 자기 글로 만든 글쓰기 기법으로 쓴 고도의 패러디다. 중국 당대의 현실을 풍자하면서 조선의 현실을 아울러 풍자한 소설이 <호질>이다. 연암의 <호질>이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힘은 당대 유학자들과 위정자들의 위선과 허위를 질책하고, 나아가 인간의 부도덕한 면을 비판·풍자했다는 사실에 있다. <호질>의 내용이 지금 우리의 현실 상황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의 꾸짖음’은 오늘도 내일도 인간 삶의 부조리가 존재하는 한 유효하다. 


옥전현의 넓은 들판은 비옥하고 풍요롭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호질>이 떠나간 옥전을 뒤돌아보면서 떠났다. 보기를 갈망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마음이 쏴아 했던 첫사랑을 만나고 이별하는 느낌이었다. 

 

▲ 옥전현이 있던 상가 도로

 

▲ 옥전 시내 중심가
▲ 옥전 시내 거리 풍경

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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