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남과 북으로 흩어진 이관술의 항일혁명 동지들, 제주 4.3항쟁과 여·순 사건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7)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3-30 00: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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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0일 전조선 민주주의정단 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남북대표자연석회의)가 끝난 후 김구와 김규식은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북에 남은 대표자들이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허헌, 홍명희, 김원봉, 백남운, 이승엽이다.

 

▲ 월북한 남한 인사들, 왼쪽부터 김두봉, 허헌, 김원봉, 박헌영

허헌은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로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론했고, 여러 사회단체 단체 대표를 맡아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이였다. 1885년에 태어나 해방 때 60세를 넘은 허헌은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고, 사회 원로로 영향을 끼쳤다. 여운형, 백남운, 김원봉 등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선선(민전)의 공동의장을 맡았고, 남조선로동당의 2대 당수를 역임했다.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해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이 합당해 1946년 11월 23일에 창당했다. 하지만 초대 당수 여운형이 바로 물러나 손을 놓자, 허헌이 당수를 맡았고 이후 미군정의 탄압은 점점 커져갔다. 박헌영은 이미 10월 인민항쟁이 시작 전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한 상태에서 남로당 결성과정을 지도했다.

북한에 남아 박헌영을 지지하고 협력한 허헌

허헌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과는 다른 사상을 갖고 있었으나, 해방 후 임시정부와 미군정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운형과 백남운이 남로당에서 이탈해 새롭게 사회로동당과 근로인민당을 결성하는 등 남한 내 사회주의 정당은 통합이 아니라 더 늘어났다. 남로당의 핵심은 여전히 박헌영과 깊은 유대를 맺은 과거 경성콤그룹과 경성트로이카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지도부였다.


하지만 1947년 8월에 이르면 미군정은 남로당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당 전체를 압박했고, 허헌 역시 수배령이 떨어진다. 이후 도피와 은신 생활을 이어가다 남북연석회의에 맞춰 이승엽과 북으로 향했다.


허헌과 이승엽은 1년 6개월 동안 북에 자리 잡은 박헌영에게 큰 지원 세력이 된다. 허헌과 박헌영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소련 군정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군사위원 시티코프 중장의 일기가 있다. 시티코프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까지 소련이 시행한 한반도에 관련한 모든 정책에 관여하고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박헌영을 합법화시키는 문제가 나에 의해 제기되다. 김일성은 그렇게 할 경우 박헌영은 남조선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긍정적인 답변을 회피하다. 남북조선로동당의 단일한 지도부가 창설되면 누가 지도자가 될 것인가? 김두봉 혹은 허헌. 그들 사이에 알력이 싹틀 것이다. 만약 박헌영을 지명하면 김두봉이 반대할 것이며, 허헌은 어떻게 처신할지 알 수 없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이 문제를 재검토하기로 약속하다.”

-국사편찬위 <해외사료 총서> ‘쉬띄꼬프 일기’ Ⅱ부 1947년 1월 4일


해방 후 북으로 귀환한 김두봉이 박헌영을 경계했다면 허헌은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허헌은 미소공동위원회 2차 회의가 열렸을 때도 남로당을 대표해 시티코프와 회담을 가진 바 있었다. 자신의 딸 허정숙도 연안파의 일원으로 북에 돌아와 고위직을 맡고 있었다. 여러 사정이 겹쳐 북에 남았고,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선임된 후 마지막까지 박헌영을 지지했다.

이승엽, 이순금, 권오직, 박진홍, 장순명 등은 북에서

허헌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위해 월북한 이승엽도 북에 그대로 남았다. 이승엽은 박헌영이 월북한 후 남로당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지도부였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재건과정에서 박헌영, 경성콤그룹 출신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정치국원으로 선임된 바 있었다. 1948년 4월 월북한 후에는 박헌영의 최측근으로 자리 잡았다.


이승엽 이전에 월북한 이들은 이순금, 박진홍, 권오직 등이다. 그중 가장 빠르게 북으로 간 이는 이관술과 함께 소위 정판사 사건 때 경찰 체포 1순위였던 권오직이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이었던 권오직은 서울에 남은 이관술과 달리 체포를 피해 1946년 6월 이후 북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관술의 동생 이순금은 박헌영과 비슷하게 1946년 10월 이후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이관술의 제자인 박진홍은 1947년 10월 남편 김태준이 체포된 후 월북한 것으로 짐작된다. 1940년 경성콤그룹의 함북지역 책임자였던 장순명은 해방 후 북로당 함북도당 위원장과 중앙위원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순명은 경성콤그룹에서 박헌영 대신 함북지역으로 파견한 이관술과 함께 적색노조운동을 펼쳤던 이였다. 이관술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1930년대 일제강점기 항일혁명운동을 벌였던 중요한 사회주의그룹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콤그룹 동지 중 다수가 북한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5월 10일 남한 총투표, 북제주는 선거무효 상황

남북연석회의 참가 후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들의 반대에도 5월 10일 총선거는 여지없이 시작됐다. 남북협상파들은 선거 참여를 당은 포기하고 개별로 참가하는 소극적 반대를 표명했다. 그렇지만 남로당은 거세게 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펼쳤고, 그 과정에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미군정은 전국 1만3800개 투표소를 지키는 데 경찰만 동원해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경찰 수는 3만5000여 명이라 투표소 수를 단순 대입해 계산하면 경찰을 모두 동원해도 한 곳에 3명을 배치할 수 있었다. 결국 우익청년단이 총동원됐고, 미군정은 5월 8일 특별 경계령을 내린다. 그럼에도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단독선거 반대 투쟁은 경찰서와 투표소 90여 곳 이상을 습격하는 무력 행사로 이어졌다. 이때 경찰관과 민간인을 합쳐 총 80여 명이 사망했다.


제주도는 사실상 선거무효 상황이 벌어졌다. 선거를 한 달 앞둔 4월 3일 새벽,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계엄군이 파견돼 이를 진압하면서 선거를 강행했지만 북제주는 투표율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북제주 갑구와 을구를 합쳐 134개 투표구 중 63개 구만 투표가 이뤄졌고, 북제주 등록유권자 4만8477명 중 2만1636명만 투표에 참여했다.


이런 결과는 1948년 3월 1일 제주도 기념식 후 진행된 미군정 통치 반대 및 단독선거 시위 때 경찰 발포가 화근이었다. 그때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투쟁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5월 선거 이후로도 6월 말까지 충돌은 계속됐다.


제주에서 벌어진 4월과 5월의 항쟁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인 8월 24일,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이 맺어진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후 주한미군 철수 때까지 ‘임시군사고문단’이 남게 됐다. 이후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상황을 방치하지 않았다. 9월 이후 기존 계엄군에 더해 병력을 늘리면서 ‘초토화작전’을 준비한다.
 

▲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초대 내각

 

▲ 1946년 5월 8일 <경향신문> 누구나 나가자 투표장으로

여수·순천 사건 때 순천에 나타난 이현상

여·순 사건은 오랫동안 ‘반란’으로 불렸다. 지금은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2021년 6월 16일. ‘여수·순천 10.19 사건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공식 명칭의 끝이 사건으로 바뀌었다. 사건의 시작은 제14연대가 10월 19일 오후 8시 제주도로 출병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서였다.


10월 15일 명령을 받고 출병 준비가 한창이던 때 남로당계 장교와 하사관, 병사들을 중심으로 항명이 시작됐다. 이들은 제주로 출병하는 것은 적이 아니라 인민을 상대로 총을 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해야 한다는 명분을 걸었다. 봉기한 군대의 행보는 여수에서 순천으로 확대됐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급히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으로 세운 진압군을 구성해 10월 22일부터 순천지역부터 진압에 나선다. 같은 날 이현상이 순천에 5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도착한다.


이현상은 남북연석회의 때 북으로 갔고, 박헌영의 지원 아래 강동정치학원에서 간부훈련을 받으며 소련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북로당 간부들과 술자리에서 김일성을 폄하하고 박헌영을 높였다는 이유로 양쪽이 대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소련 유학이 물 건너간 상황에서 여순사건이 벌어지자 순천으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이현상은 국군의 진압이 시작된 상황에서 무장봉기한 군인들의 잔여병력을 추슬러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이 부대는 이미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는 야산대와 합류해 이후 ‘빨치산’ ‘남부군’으로 불리는 지리산 인민유격대의 몸통이 된다.
 

▲ 1949년 4월 9일 제주를 방문한 이승만(왼쪽), 여수 순천 사건 체포 사진(오른쪽)

남로당 지하활동을 이끈 김태준, 김삼룡, 이주하

남로당의 경우 창당은 합법적으로 이뤄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불법 정당의 낙인이 찍힌다. 이미 창당하기 3개월 전인 1946년 여름을 거쳐 10월 항쟁에 이르면 조선공산당 역량의 많은 부분이 박헌영이 제시한 ‘8월 테제’를 기준으로 비합법, 지하활동으로 전환됐다. 1947년 8월 15일을 앞두고 미군정이 벌인 대규모 사회주의정당 단체 검거사건이 벌어질 때 남로당은 집중 타격 대상에 올랐다.


김태준도 그때 수배자 명단에 오른다. 김태준은 이관술이 일제강점기 경성콤그룹의 지도부로 활동할 때 가장 신뢰했던 동지이자 지식인이었다. 경성제대 조선어 강사였던 김태준은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된 후 1943년에 석방된다. 이후 아내 박진홍과 함께 중국 연안으로 떠났다 해방 후 3개월 뒤에 국내에 도착했다.


그는 경성대 초대 총장으로 선출됐지만 미군정의 거부로 임명되지 못한 뒤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1947년 8.15 폭동을 음모했다고 수배당한 뒤 10월 10일 체포된다. 이후 1948년 9월 14일 출감한 후에는 이현상이 이끌었던 지리산 유격대의 사상교육을 맡는 등 지하활동을 펼쳤다.


경성콤그룹의 핵심 조직 활동가였던 김삼룡도 이주하와 함께 남로당 지하 지도부의 총책이 된다. 김삼룡은 1950년 3월 체포될 때까지 이주하와 함께 서울에 남아 지하활동을 이끌었다.

 

▲ 1948년 10월 24일 <동아일보> 보성, 광양에 반군 육백, 여수 순천은 완전 탈회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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