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는 시간

이인호 시인 / 기사승인 : 2020-10-21 00: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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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세상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날씨. 지구의 자전은 변함이 없고 어느덧 가을이 내 가슴팍을 훅 치고 들어왔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계절의 변화만큼 절실히 깨닫게 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그래도 일 년 전의 가을과 변함없는 계절이라면 좋으련만 어수선한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하는 올 가을.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던 시인을 떠올린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세상을 떠난 고 진이정 시인. 시집 한권을 세상에 내놓고 서둘러 가버린 시인은 여전히 ‘아이야 나의 희망엔 아직 차도가 없구나, 나의 눈물도 이별도 사랑도 아직 차도가 없어, 난 약을 타러 그녀의 집 앞을 서성거리’고 있으려나. 


그래서 지금 우리가 흘러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이 궁금해진다. 누구나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 모두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게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 이론’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고,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은 서로 같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시간에 무슨 이름을 붙여볼까 고민한다. 아이들은 푸드덕거리며 방 안을 뛰어다니고, 아내는 그런 아이들에게 얌전히 좀 있으라고 소리를 지른다. 햇볕은 지난 계절과 다르게 적당히 따뜻하고 구름도 서서히 흘러간다. 같이 살고 있는 이들의 시간을 조금 더 넓혀본다. 모진 바람을 이겨낸 논에서는 드문드문 추수가 이어지고, 숲에는 소풍을 나온 이들이 자리를 깔고 가을을 좀 더 가까이 느끼며 한가하다. 


하지만 그건 풍경일 뿐 시간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하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라고 했다. 그러니 난 풍경이 아닌 나를 둘러 싼 사건들을 가지고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날을 세우고 세상을 바라보던 시간을 곰곰이 삭히고 시 한편을 읽으며 소주 한 병을 다 마셨다는 일찍 떠나버린 시인의 말을 되새김질 한다. 


얼마 전 농담 같은 부고를 접했을 때 너무 일찍 생을 마쳐버려 도무지 눈물도 나지 않는 동기의 삶을 생각한다. 그녀가 좋아했던 민들레꽃처럼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고자 했던 사람.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주민들과 오롯이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았던 그녀가 남기고 간 것들을 떠올리며 고 고정희 시인의 시를 적어본다.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 중에서)


인류가 최근에 발견한 양자중력 이론은 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로 설명하지 않는다. 사물들이 다른 것들과 관련해 서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세상 사물들이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래서 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을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는 시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누군가 나에게 오고 있다는 것만큼 가슴 떨리는 일이 있을까. 게다가 캄캄한 밤 내 손을 마주 잡기 위해서 오고 있다니, 생각만으로 가슴이 포근해지는 그런 일에 나 또한 누군가의 손을 마주 잡기 위해 가 본다. 내가 부르는 이 시간이 누군가로 인해 이루어지는 시간이라면 그 누군가 역시 나로 인해 이루어지는 시간을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으니 당신에게도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시간에 이름을 한 번 붙여보길 권해본다. 내가 나의 시간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그런 의미들이 조금 더 많아진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도 더불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인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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