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내정사(關內程史)’ - 북경 동악묘와 유리창

문영 시인 / 기사승인 : 2020-10-21 00:00:42
  • -
  • +
  • 인쇄
다시 발로 읽는 열하일기

1780년 7월 29일 조선 사신단은 옥전현을 떠나 계주(薊州, 천진시 계현)를 지나 방균점에서 숙박한다. 연암은 계주에서 독락사와 어양교에 있는 양귀비 사당에 대한 평을 남겼다. 7월 30일은 연교보에서 머문다. 8월 1일 연경(북경)으로 해상에서 들어오는 물산이 노하의 수로를 따라 몰려드는 통주를 지나 영통교를 거쳐 동악묘에 도착한다. 조선 사신들은 동악묘에서 관복을 갈아입고 조양문을 지나 서관의 숙소에 이른다.

동악묘

중국에서는 전국시대부터 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아 오악(五岳)을 정해 숭배했다. 즉 산시성의 북악 항산(北岳 恒山), 산시성의 서악 화산(西岳 华山), 허난성의 중악 숭산(中岳 嵩山), 산둥성의 동악 태산(東岳 泰山), 후난성의 남악 항산(南岳 衡山)을 일컫는다. 이 중 동악묘는 태산의 동악대제를 모신 도관(道觀, 도교 사원)이다. 현재 북경 동악묘는 민속박물관으로 바뀌어 조양문외대가라는 큰 도로변에 있다. 동악묘 앞 도로 건너편에 패루가 우뚝 서 있다. 패루 주변은 아파트촌이다. 연암이 <동악묘 견문기>에서 “동악묘 문 맞은편에는 한 쌍의 패루가 섰는데 푸른 유리 기와와 초록빛 유리 기와로 이어 번쩍거리고 찬란한 모습은 앞서 본 돌로 만든 패루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라고 찬탄한 그대로다. 조선 사신 일행은 모두가 이 패루 밑을 통과해 조양문으로 향했다. 

 

▲ 동악묘 패루
▲ 동악묘 정문

 

▲ 동악묘 첨대문 현판

 

▲ 동악묘 중앙통로

 

▲ 동악묘 대악전

동악묘 입구에는 2개의 탑이 동서로 자리 잡고 있다. 동악묘 현판이 붙은 출입문을 지나면 청동 향로가 놓인 정전의 정문인 첨대문이다. 첨대문 현판 밑에는 동악대제보훈을 걸어놓았다. 중심 내용은 “선을 행하는 사람은 봄날 풀처럼 보이지 않게 복이 늘어나나, 악을 행하는 사람은 칼 가는 숫돌처럼 눈에 띄지 않게 복이 이지러진다” 등으로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내용이다. 첨대문을 지나 좌우에 비림이다. 중앙 통로를 따라 약 60미터 정도 가면 거대한 직사각형 청동 향로가 놓인 대악전이다. 대악전 편액은 연암이 말한 ‘영소화육(靈昭化育)’이란 글자 대신 동학대제가 밝은 빛을 비춘다는 뜻의 ‘악종소황(嶽宗昭貺)’이 걸려 있다. 동악묘는 정전을 중심으로 좌우·동서로 이어진 회랑에 76사(司)의 신전을 각방에다 배치했다. 각방에는 생·노·병·사와 행복과 불행·선악 등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로 파노라마식 형태로 늘어놓았다. 건물 안쪽에는 중국 민속자료 전시실로 주기적으로 바꿔 가면서 전시한다. 


동악묘에서 가장 오래된 주인은 동악묘의 앞뜰에 서 있는 수령 팔백 년이 넘은 회화나무다. 이 고목은 신령으로 모시면서 ‘수복(壽福)’을 기원하는 대상이다. 울타리가 온통 ‘복’을 상징하는 붉은 색 조각난 천을 달아 놓았다. 나무를 떠받친 두 개의 기둥도 묘당의 패루 모양이다. 특이한 것은 현판의 ‘수괴(壽槐)’의 글자가 나무 ‘수(樹)’가 아닌 목숨 ‘수(壽)’로 회화나무 ‘괴(槐)’와 합쳐 ‘복을 주는 나무’로 신성시되고 있다. 이처럼 동악묘는 현세적인 삶의 평안과 기복신앙이 나무와 붉은색으로 치장한 벽과 쉴 틈 없이 피워 올리는 향불 연기로 가득한 곳이다.
 

▲ 동악묘 대악전 현판

 

▲ 동악묘 비림


▲ 동악묘 회화나무 수괴
▲ 동악묘 전시

조양문과 서관

동악묘에서 나온 조선 사신들은 조양문을 통과했다. 동악묘 서쪽 500여 미터 거리에 있다. 조양문(朝阳门, 차오양먼)은 베이징 내성 9대 성문 중 하나다. 명·청 때에 남방의 곡물이 운하를 통해 퉁저우(통주)를 거쳐 동변문 바깥에 도착한 후, 다시 마차를 이용해 조양문 내 창고로 운송했다. 그래서 조양문을 양식문이라고 불렀다. 조양문은 1900년, 영국을 비롯한 여덟 개 연합국이 북경성을 공격할 때 가장 먼저 공격당하고 파괴된 성문이다. 조양문은 1915년 1차 옹성을 시작으로 1956년 이후 전루와 성루가 완전 철거됐다. 1978년 조양문 자리에 입체교차로가 건설됐다. 현재 중국외교부 청사 앞 로터리 중앙에는 동쪽을 향해 ‘朝阳门(조양문)’이라고 새긴 철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조양문은 지하철 2호선과 6호선이 지나는 도심의 중요 교차점 중 하나다. 

 

▲ 동악묘 조양문 가는 길
▲ 북경 조양문 터

북경에서 연암이 머문 곳은 서관이다. 연암은 “서관을 나와 첨운패루(瞻雲牌樓)에 이르렀다”고 했다. 서단 네거리 동북쪽 광장에 2000년대에 새로 세운 첨운패루가 있다. 패루 뒤편 서북쪽으로 백화점과 상가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옛 서관은 첨운패루에서 가까운 지금 시단 네거리 서북쪽 중국은행 본점과 서쪽 민족문화궁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선무문과 정양문

1780년 8월 1일 연경(북경)에 도착한 연암은 열하로 떠나기 전까지 나흘을 머문다. 숙소인 서관에서 하루를 쉬었다가 맨 먼저 달려간 곳이 유리창이다. 첫 번째는 8월 3일 선무문으로, 8월 4일은 정양문으로 해서 유리창을 방문했다. 

 

▲ 선무문 사거리

 

▲ 선무문 상방 자리, 신화사통신

<관내정사> 8월 3일에, “수레는 질풍같이 달려 선무문에 이르렀다. 제도는 조양문과 같고, 왼쪽은 코끼리를 키우는 상방이고, 오른쪽은 천주당이다. 선무문을 나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유리창에 들어갔다. 청나라 때 선무문은 형문(刑門)이라고 불렀는데, 범인에게 형을 가할 때, 이 문을 통해 나가도록 했다.” 연암이 말한 상방은 선무문 안 서쪽에 있던 코끼리 사육장소로 지금은 신화통신사라는 언론사 사옥이 들어섰다. 연암이 말한 천주당은 ‘남당’으로 현재 선무문 네거리 안쪽 도로변에 있다. 


정양문은 내성의 아홉 개 성문 중에서 가장 높은 성문으로 성루의 높이는 43미터이고 전루의 높이는 36미터다. 특히 전루 앞 해자(호성하)의 돌다리 앞 패루는 다른 성문 앞에는 없던 것으로 북경 최대의 다섯 칸 패루였다. 현재 정양문 일대는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번화가로 변했다.
 

▲ 정양문 전루(좌) 성루(우)

유리창

유리창은 유리를 만드는 가마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나라 이후로 서화와 골동품 등을 취급하는 가게가 생겨나면서 상업지역으로 변했다. 청나라 때는 서적 출판과 유통을 중심으로 문화상업 단지가 됐다. 조선의 지식인들도 이곳에서 학문과 우정을 나누면서 문화 교류를 했다. 이곳에서 구입한 서적과 문물을 통해 조선에 근대적인 서양문명을 유입시켰다. 연암이 유리창에서 본 ‘오류거’ ‘선월루’ 등은 서점이다. 특히 ‘오류거’는 박지원이 가기 2년 전 이덕무와 박제가가 들렀던 곳이다. 책을 통한 문화와 문명의 교류가 이뤄진 서적 시장의 중심이 유리창이었다. 청나라가 망하고 혼란 속에서 중국 근대문화의 중심을 이뤘던 곳도 유리창이었다. 나는 세 번째 유리창 방문 때 루쉰이 자주 찾던 ‘청비각’이란 서점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 유리창

 

▲ 유리창 풍경, 서점
▲ 유리창 풍경, 문구점

 

▲ 유리창 풍경

 

▲ 유리창 청비각서점(루쉰)

문영 시인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문영 시인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