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반환점에서 다시 만난 헤르만 헤세와 <데미안>

김수복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회원 / 기사승인 : 2020-09-17 0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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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은 많을지라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데미안> 또한 그렇다. 헤세를 생각하면 공기 맑은 산속에서의 늦가을 분위기처럼 환하고 차가움이 느껴진다. 바람 한 점, 햇살 한 점 없는 선명한 흐린 날의 차분함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다. 그의 눈은 맑고 고요하며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그의 얼굴에서는 절제된 자유로움과 여유가 느껴진다. 이런 그의 눈빛과 분위기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헤세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헤세는 본인이 선천적으로 양처럼 순하고 비누 거품처럼 여린 성품이었지만 계명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유독 반항했다고 말한다. 특히 청소년기에 “너희는 …를 하라”라는 계명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돌아섰다고 한다. 그것이 헤세가 마울브론 신학교를 뛰쳐나오고,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헤세는 열네 살 즈음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노이로제를 앓기도 했다. 고서점 점원, 시계 공장에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때, 헤세는 정신분석을 받기도 했다. 종교와 신,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 방황과 혼돈, 고독이 헤르만 헤세를 만들었다. 그런 헤세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헤세가 마흔을 넘긴 1919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작품으로만 평가받고 싶다는 생각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책을 출판했다. 책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젊은이들의 상황과 고뇌를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폰타네 문학상’을 수상했다. 


헤세가 출생한 지 140년이 지나고, <데미안> 초판이 나온 지 100년이 넘은 지금에도 <데미안>뿐만 아니라 그의 산문집, 편지글은 꾸준히 신간으로 출판되고 있다. 인간 근원과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 있는 한, 헤르만 헤세와 <데미안>은 언제나 우리 곁을 지킬 것이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싱클레어는 부모를 대표로 하는 안락함‧깨끗함‧책임과 의무가 있는 밝은 세계와 술주정뱅이‧욕설‧게으름‧회피 등이 있는 어두운 세계, 이 두 세계에 걸쳐있는 중간자다. 그런 그가 종교와 신, 자신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프란츠 크로머로 인해 어두운 세계에 좀 더 들어간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의 괴롭힘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싱클레어가 신과 악마가 하나 되는 아브락사스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를 상징하는 부모를 떠나 다른 도시의 학교에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생활하지만 그의 방황과 혼돈, 고독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그 여정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당연하게 생각돼온 것들, 예를 들면 카인과 아벨,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있었던 두 명의 도둑, 야곱 등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해주면서 끊임없이 싱클레어가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싱클레어가 반복되는 꿈으로 혼란스러울 때, 또 한 명의 조력자를 만난다.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다. 그는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포기한 인물이다. 그는 싱클레어에게 자기 자신의 길을 찾고 갈망하는 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문제이며,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완결된, 완성된 그 무엇으로서 목표점이다. 데미안은 저 멀리에서 눈이 부시도록 밝게 빛나지만, 주위는 너무나 어두워 싱클레어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데미안은 숱한 방황과 고독의 시간을 싱클레어에게 준다. 이런 싱클레어에게 피스토리우스는 밝게 빛을 발하고 있는 목표점에 갈 수 있는 손전등 역할을 한다.


싱클레어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 베아트리체와 에바 부인을 빼놓을 수 없다.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가 어둠의 세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밝은 세계로 나오는 첫걸음이다. 그런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에게 성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어린 시절 싱클레어 집 대문의 문장(紋章)에 있는 새와 연결된다. 에바 부인은 데미안의 어머니다. 그녀는 싱클레어에게 데몬인 동시에 운명이며, 애인이다.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에게 이성적인 사랑을 갈망하지만 그것 또한 자기 자신으로 가는 길의 한 방편이다.


내가 <데미안>을 처음 만난 것은 유년시절,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 당시 인간과 종교, 선과 악, 특히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은 존재할까?’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은 ‘빛과 어둠, 선과 악’ 등으로 구분되는데, 신이 밝음만을 대표한다는 것이 왠지 낯설었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한쪽만을 편들 리가 없으며 천사와 악마, 어둠과 밝음 같은 이분법적인 것을 하나로 만드는 신이 진정한 신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만난 <데미안>은 충격이자 반가움이었다. 나의 고민이 그대로 거기 있었다. 이후 <데미안>은 일종의 안식처, 휴식 같은 편안함의 다름 아니었다. 사람들과의 갈등, 나 자신과의 괴리감으로 힘들 때 위로가 되어줬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다시 만난 헤르만 헤세와 <데미안>! <데미안>의 한 문장, 한 문장들이 니체가 말한 피로써 쓴 글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에 와 닿는다. <데미안>은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다. 한 인간이 종교와 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서’, 자신과 가까워지기를 갈망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자기고백서’다.


내 유년기에, <데미안>에서 감동 받았던 문장은 너무도 많이 회자되는 문장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지금, 다시 만난 『데미안』에서 마음을 울리는 문장은 서문의 첫 문장이다.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문장이다. 읽을수록 문장의 깊이가 전해온다.


책의 마지막에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입맞춤은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의미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체득했다는 것이 어떤 경지에 올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와 또 다른 나, 외부세계와의 접선이다. 이 접선에 수많은 갈등과 고독이 존재함은 당연하다. 외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설령 흔들림이 있더라도 그 흔들림을 잠재울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가을이다. 고독의 시간이다. 자연은 화려한 색을 남기고 본연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그런 자연은 인간에게도 고독을 허락한다. 내 마음속의 ‘나’를 만나기에 고독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이 가을! 나의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있을 ‘나’를 만나자, <데미안>과 함께.


김수복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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