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은 고유한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고유함이란 스스로 지닌 가치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의미화 하는가에 따라 인간적 가치로 규정될 뿐이다. 그 의미화는 곧 당대의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좋든 싫든 언어활동을 통해서 세상을 발견하고 삶을 창조한다.
현실을 둘러보면 분명하다. 같은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다. 엄연한 사실이건만 뒤집힌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진실이 뒤바뀌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사실을 왜곡했기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 이유는 자신의 존재 방식대로 사실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구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를 선악과 도덕규범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협소한 판단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언어가 곧 권력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매일 매일 수많은 말들을 만들고 사용하지만, 살아남아 통용되는 말은 정직한 언어나 진실한 언어가 아닌 힘을 가진 자의 언어다. 권력의 언어다. 그 언어가 그 사회의 지배적 언어가 되고 상식이 되고 정의로 취급된다. 힘에 의해서 정당화 되고 의미화 되었기 때문이다. 언어활동은 그만큼 중요하다. 사회계급 간의 힘의 관계가 그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권위는 언어로 구성된다.
그렇다고 언어가 독립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수의 시민이 소수의 권력에 지배당하는 것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정당화하고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주도권은 문화적 지적 도덕적 우월성에서 나오지만, 이를 언어로 구성하지 못할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권력의 언어에 의식을 지배당하게 된다.
우리가 지역에서 새로운 언론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신문을 만들려고 하는 건 단순히 객관적 정보 전달 매체를 생각했거나, 정직하고 진실한 목소리를 담아내겠다는 도덕적 의무감 때문만이 아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목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지배 논리에 대응할 논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이를 확산하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삶에 바탕을 둔 진실한 언어와 억압적인 권력의 언어에 대응할 담론을 일상적으로 생산하고 확산하는 주도권을 시민 스스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에서 매일 매일 수만 부의 신문이 배달되고 있지만, 다른 목소리와 소수자의 목소리, 억눌린 자의 목소리, 소외된 자의 목소리, 진보적 목소리는 거의 묵살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작은 진실이 거대한 거짓을 이긴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 스스로 만드는 언론이 생각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일부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터넷 시대에 종이신문이 유지 가능하겠느냐는 것, 지역에서 경쟁력 있는 컨텐츠를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겠냐는 것,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구독료만으로 유지할 수 있겠냐는 우려가 그것이다.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것 아니다.
하지만 우리 지역은 110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큰 도시이며, 상대적인 고학력층이 많고, 40% 이상의 진보 성향의 시민이 사는 도시다. 이러한 도시에 진보언론 하나 없다는 사실은 왜곡된 현실을 넘어 기형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종이 출판물들이 다른 매체로의 전환을 모색하는데 우리라고 종이신문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다만, 현재로서는 종이신문의 장점을 아직 다른 매체가 주도하지 못하고 있고, 정보전달 기능을 제외한 교양과 문화 등 종합적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으로서는 당분간 유효하다.
또한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통해서 역사가 거꾸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해 왔다. 민주화운동을 정권교체 운동, 의회 진출 운동으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의 거점들을 만드는데 소홀히 해왔다. 진보 언론은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역 거점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거점은 곧 시민권력이다.
2012. 6. 19. 백무산 (주)울산저널 창립발기인조합 대표
언론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 사회에 어떤 언론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곧 그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울산의 언론 현실은 어떤가요?
우리의 눈과 귀를 다른 곳에서 구걸해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대에 언론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는 것은 사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제 와서 신문을 만들겠다니, 참 한심한 짓이지요?
그러나 어쩝니까? 아무리 쳐다봐도 우리의 눈과 귀가 되고, 목소리가 되고, 외침이 되고 수호자가 될 그 무엇인가가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눈과 귀를 저 속이 뻔한 자들에게서 구걸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 잘 아는 일입니다. 우리 지역 여론을 움직이는 대부분의 전국지와 지역지, 또 방송사들은 자본과 권력의 충실한 대변자들입니다. 시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서민 계층의 여론을 배제, 축소, 왜곡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몰염치한 언론도 많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지역의 90% 언론이 10%의 상층부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언론들이 평소에는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고, 서민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듯이 온갖 호들갑을 떨지만, 예민한 정치적 문제와 생존권이 걸린 노동문제와 주민문제가 발생하면, 권력과 자본의 나팔수로서의 본성을 확연히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만 존재하는 현실에서 시민들은 매번 알고도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만 놓고 보면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우리는 정말 낯 뜨겁고 부끄러운 심정으로 이제라도 정직하고 책임 있는 언론을 만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언론의 본질적 책임인 공공성과 공론장의 역할을 분명히 하는 공적저널리즘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이 미디어의 수용자인 동시에 참여자가 되도록 열린 언론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한 축으로는 지역 야당지로서의 성격을, 다른 축으로는 노동자와 소수자, 소외계층의 낮은 목소리를 크게 대변하는 당파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겠습니다.어떠한 정당과 정파의 영향력도 배제하겠습니다. 특정 소수의 전유물이 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단호히 거부하겠습니다.
종이신문은 이미 사양길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합적 전달매체로서는 여전히 유용하며, 그 역할을 대신할 것이 아직은 없습니다. 우리는 종이신문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매체 전환을 다각도로 꾀하겠습니다.
언론은 사회적 삶의 공적 환경을 만들어가는 더 없이 중요한 수단입니다. 목소리가 큰 권력과 자본이 지배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라면 분명 제대로 된 민주사회일 수 없습니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제퍼슨의 말처럼, 제대로 된 지역신문 하나가 정당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과 자본의 횡포로부터 자기결정력에 기초한 민주적 시민사회와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내고, 건강한 삶을 위해 의식을 조직하고, 대안적 삶을 생산하는 공론장을 만들어가겠습니다.
그동안 지역에서 대안 언론에 대한 구상과 시도가 여러 차례 있어왔지만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전문성과 돈과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이 간단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제 지역의 언론 전문 활동가들와 언론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 시민단체의 주요 전문 활동가들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모든 방향에서 시민들에게 다 열려있습니다. 지식이든 돈이든 발이든 아이디어든 정보든 질책이든 꾸중으로든 관심을 모아주십시오. 무엇보다 발기인에 참여해 주십시오.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 정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문의 모든 성과는 시민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2012년 3월 5일 경칩일에
백무산 (주)울산저널 창립발기인조합 대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가는 알겠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질문은 우리의 오래된 질문이다.
저항정신은 해방의 의지를 불러오지만, 자기 성찰과 긍정적 전망이 지속적으로 부재할 때는 자신의 삶을 부정의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사회를 재구성하는 일이 더 이상 통제나 규율, 일사불란한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도 더 이상 일치할 수 없고, 수많은 변화하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사회, 어떤 정형의 세계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전통적 가치는 해체되어 갔다. 또한 미래 사회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준비되지 않는다. 기존 사회의 질서와 가치에 대한 해체를 요구하지만 새로운 사회상이 내부로부터 잉태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점점 우리의 삶을 지켜줄 수 있는 공동의 힘과 인간적 유대감 삶의 감성적 공감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목격하고 있다. 공동체적 삶은 빠르게 해체되고 만인은 만인의 적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싶어 하지만 이미 자율적 영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외부에서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생산노동은 인간적 노동이 될 수 없다. 고도화 될수록 인간의 자기성장과 자기실현의 기회가 되기는커녕 인간적 능력을 크게 떨어뜨리고 피폐화해 왔다.
“산업노동은 개인의 자발성을 파괴하고 두뇌를 썩게 만들고 사회를 이해하는 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는 슈마허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목격하고 스스로 경험하고 있다.
삶을 질식시키는 영혼 없는 노동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인간이 꾸는 꿈은 어떤 것일까? 그 삶과 투쟁은 어떤 것일까?
자본주의 노동윤리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의 윤리가 낳은 것이지만, 노동자는 그러한 윤리적 신념을 자신의 무기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투쟁을 하고 있으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 사실도 경험하고 있다.
모순된 삶과 윤리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들은 타율적이고 의존적이고 억압이 내면화되면서 자본의 문화와 보수정치의 비젼에 더 큰 호감을 가지는 심리를 낳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분열된 심리는 삶의 퇴폐화로 이어진다.
공장 안이 세계인 양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공장의 외부를, 자본의 바깥을, 체제의 다른 문화를 경험할 수도 다른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정신적 불균형은 심각할 지경에 이른다. 외부의 정보와 문화와 지식으로터 자신을 분리한다.
오늘날엔 이전 세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매체와 미디어, 통신수단을 가지고 있고 또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나, 오히려 현대인들은 이전 보다 더한 소통부재의 고통을 겪는다. 소통은 다만 기능적 커뮤니케이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가치에 대한 공감력과 인간적 삶의 보편적 감성을 공유할 수 있을 때라야 원활해질 것이다.
우리에게 사회적 제도적 모순과 불합리성에 저항하는 정치 투쟁을 넘어 삶의 실제적인 문제, 생활양식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는 자치와 자율 문화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인간의 실제적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권력의 횡포로부터, 잘못된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고유한 삶을 지켜내고, 저항을 조직하고, 대안적 삶을 생산하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사회의 다양한 부문에서 공공성을 확대하여 권력과 자본의 독점적 횡포를 막고 사회적 부를 시민이 돌려받을 수 있도록 감시하고 고발하는 수호자가 필요하다.
개인의 기회와 욕망과 경쟁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불안한 삶이 곧 사회 불안으로 이어진다는 인식 하에 공공성과 공동체적 감각을 살려내고 삶과 의식의 전환과 제도적 변화를 주도하는 담론 생산의 주체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지역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시민의 공적 삶의 현장에서 책임을 다하는 대안 언론 매체를 창간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새로운 신문은 변화를 위한 신문이다. 내부적으로는 자주관리와 협동조합적 방식으로 운영될 것이며, 객관주의를 넘어 사회구성의 원리와 역사성을 충실히 반영하면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신문을 만들어갈 것이다.
2012.1. 백무산 창간준비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