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민족주의자를 지향했던 이관술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4-21 00: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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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유학

 

이관술이 1925년에 입학한 동경고등사범학교는 1872년에 개교한 학교로 동경 시내 중심가에 위치했다. 이관술은 문과 1부에 속했다. 동경고사 졸업앨범을 보면 졸업생은 모두 199명이고 문과는 97명이다. 그중 9명이 조선인이었다. 

 

당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조선인 학생들은 적지 많았다. 그들은 조국을 떠날 때 품었던 마음이 모두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유학 기간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1919년 3.1 만세운동 직전 2.8 독립선언을 동경지역 조선인 유학생들이 모여 외쳤던 것처럼 항일의식이 더 강해진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깊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다수였다.   

 

그런 이들 중에 울산 방어진 출신으로 일본대로 유학했던 김천해(1899~?)나 나중에 이관술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되는 이재유(1905~1944)처럼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거나 조선인 노동조합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에 가입해 활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김천해와 이재유는 입학 시기는 다르지만 일본대학교 사회과를 다녔는데, 이 학교 유학생들은 유독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유학생들이 그렇게 어떤 방법이든 사회주의 계열 모임에 참가하는 일이 다반사였을 때 이관술 역시 고학년에 올라 사회과학학습모임인 법제경제연구회에 가입했던 적이 있었다. 이관술은 그때의 경험을 후일 회상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알기는 했지만, 자신은 지극히 이상적인 민족주의였다고 한정 지어 말했다. 

 

▲ 동경고등사범학교 1929년 2월 졸업앨범 속 이관술의 사진과 학교 입구 사진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를 지향했던 이관술

 

이관술은 해방 후 8개월 뒤인 1946년 4월, <현대일보>에 ‘반제투쟁의 회상’이란 제목의 글을 3회에 걸쳐 기고했다. 그 첫 회에 동경유학 시절 그가 세웠던 목표와 각오를 엿볼 수 있다. 그중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사(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간 것도 청년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각성시켜보자는 이상에 들어갔고 또 이민족과 접촉해가는 동안에 얻은 정신적 영향도 역시 민족의식의 강화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럼으로 그때 나의 생각은 우리 민족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경중 대소를 물론하고 그 일에 열성을 받히자는 일념뿐이었다. 그때 당시 동경서 내가 맑스주의에 접근해 간 것도 이러한 약소민족청년의 독자적인 견지에서 그리한 것이요. 그것을 연구하여 우리 민족 현실에 알맞는 길을 발견하자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이관술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칠거나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될 마음으로 ‘맑스주의’를 접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약소민족의 청년으로 민족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는 데 필요한 부분을 얻고자 소극적인 태도로 접근했다고 말한다. 이는 이관술의 동경유학은 귀국 후 교사로서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키우는 계몽운동가 또는 본인 말대로 ‘민족주의 이상주의자’를 목표로 일관했음을 보여준다. 

 

이관술의 민족계몽 활동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방학을 이용해 고향 울산에 잠시 돌아와 머물 때 무료강습회에서 강사를 맡은 것에서도 확인된다. 이관술은 안효식(1901~1948)과 함께 울산 병영청년회에서 개최한 학술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했다. 안효식은 이관술의 고향 입암마을 인근 망성 출신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녔다. 동향에 동년배인 두 사람은 오랜 인연을 이어갔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이관술과 안효식은 강습회에서 수학, 산술, 대수, 어학(영어) 과목을 무료로 강습했다고 한다. 소학교 졸업 정도의 수준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면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1929년 동경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민족주의자로 품은 이념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관술이 1930~4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 사건을 바로 1929년 졸업 후 귀국하자마자 일하게 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부임 첫해에 겪게 된다. 

 

▲ 1946년 4월 11일 <현대일보> 이관술 회상기 ‘반일지하투쟁의 회상’ 1
▲ 1929년 2월 21일 <동아일보> 동경유학생 300명 졸업, 이관술의 이름은 왼쪽 네모로 표시

 

동덕고등보통여학교에서 시작한 교사 생활

 

이관술은 졸업과 동시에 경성에 있는 동덕고등보통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당시 고등보통학교의 교사는 안정되고 존경받는 지위였다. 게다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라는 이력을 바탕으로 평탄한 꽃길을 걸어도 무방했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인생에서 예측할 수 없는 큰 파도를 만나는 것처럼 이관술도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관술은 처음 교사로 제자들 앞에 섰을 때 목표했던 삶의 첫 단추를 제대로 채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1932년까지 겨우 사범학교 재학 기간인 4년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짧게 교사 생활을 끝내게 될지는 몰랐다. 더구나 일제 식민통치와 맞선 대표적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변화하게 될 출발점이 될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이관술이 선택한 동덕여고보는 1908년 민족교육을 목적으로 조동식 등이 설립한 동덕여자의숙에서 출발한 학교다. 그리고 1911년 천도교 교주 손병희(1861~1922)를 설립자로 동덕여학교로 개편한 뒤 정식 인가를 받았다. 조동식이 그때부터 학교 교장을 맡았다. 

 

손병희가 3.1 만세운동을 이끌다 감옥에 수감됐고 천도교 전체가 위기를 맞게 되자 천도교 교단의 재정 지원이 끊기게 된다. 게다가 손병희가 1922년에 타계하자 천도교는 학교 운영에서 완전히 손을 뗄 것을 통보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조동식은 고등보통여학교 인가를 서둘러 받고,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갑부 이석구에게 교주(校主)를 제안했다. 

 

이관술이 부임할 당시 학교가 있던 자리는 경성부 관훈동으로 경복궁 인근 동남쪽이었다. 이관술은 역사와 지리 과목을 맡았다. 유학 시절에도 일본 곳곳을 다니며 지리를 실측하고 꼼꼼하게 자신만의 수첩을 만들어 기록할 만큼 전문적인 역량을 쌓았던 터라 가르침에 무리가 없었다. 

 

▲ 관훈동 동덕고등보통여학교 건물 사진, 1932년 동덕여고보 졸업앨범

 

 

동덕 시절 동료 교사와 학생들

 

학교 운영에서 천도교가 빠져나간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민족의식이 남다른 교사들이 남아 있었다. 그중 국어(조선어) 교사 이윤재(1888~1943)는 평안북도 영변 숭덕학교에서 3.1 운동에 참가해 3년이나 옥고를 겪었던 이였다. 그는 출옥 후 북경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24년에 귀국, 오산과 배재고보에서 일하다 동덕으로 왔다. 1927년부터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이 됐고. 민족정신의 보전과 계승을 표방한 잡지 <한빛>과 <한글> 발행에 참가했던 항일 지식인이었다. 

 

이윤재가 1931년에 학교를 떠난 후 그 자리를 메운 신명균(1989~1441) 역시 한글운동가였다. <한글>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최현배, 권덕규, 이병기 등과 활동했는데 동덕여고보 교사 중 이관술과 가장 가깝게 행동한 이였다.

 

수학교사였던 백남규도 동경수학전수학교에 유학할 때 유학생 대표를 맡아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대종교의 국내 비밀결사에 가담했고, 만국공용어 에스페란토를 항일을 목적으로 보급한 선구자였다. 1930년대 초 동덕여고보의 학생운동을 주도한 독서회 참가자들이 에스페란토를 암호로 활용하는 데 영향을 주기도 한다.

 

동덕에 입학한 학생들을 경성뿐 아니라 경기를 비롯해 전국에서 입학했으며 경성 출신은 60% 정도였다. 학생 중에는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칭했던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이효정(1913~2010)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임순득(1916~?)처럼 다른 학교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징계를 받고 퇴학당한 학생들의 편입 사례도 있다. 

 

학생들은 이관술에게 ‘물장수’란 별명을 붙여 불렀다고 한다.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교사라기보다는 학생들에게 촌스러운 외모를 지닌 친근한 선생님으로 다가섰던 때문이다. 이관술 역시 유학생 출신이란 표를 내지 않고 매우 겸손한 품성으로 동료 교사들과 친분을 쌓아 갔다. 

 

▲ 동덕여고보 교사 시절 이관술(중앙에 양복 차림), 그 옆 한복 차림이 조선어교사 신명균.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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