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 논쟁으로 갈라지는 정세 속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11-03 00: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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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3)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로 점화된 ‘탁치 분쟁’은 미·소 합의로 강제로 그어진 해방정국을 들끓게 했다. 그리고 남과 북으로 나뉜 현실이 아예 고착화할 수 있다는 위험한 경고음을 울렸다. 이제 어느 한쪽이 주도하는 흐름은 어려워졌다. 특히 건국동맹에서 인민공화국 그리고 중앙인민위원회로 이어진 사회주의 계열 정당(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등)의 우위가 무너져 내렸다.


미국 정부와 미군정은 이 상황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원래 신탁통치를 강력히 주장하며 즉각적인 통일 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미국 정부로서는 호기를 맞았다. 미군정 역시 1946년 1월 초 사회주의 계열이 ‘3상회의 결정 지지’로 선회한 것을 ‘신탁통치 찬성=민족반역자’로 몰아가는 반탁세력을 물밑에서 지원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46년 1월 18일 우익청년단체 회원 600명이 조선인민당과 청년총동맹, 서울시인민위원회를 습격하자 이를 미군정 경찰(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엄호한 것이다. 


미군정은 미군정 경찰과 우익단체의 결속을 통해 사회주의 계열의 약화를 노렸다. 그리고 이승만과 김구 등은 사회주의 계열이 결성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비롯한 전국 단위 대중조직에 맞설 우익단체를 격려하고 지원했다. 결국 이런 신탁통치 논쟁은 이관술이 속한 조선공산당이 맞이한 첫 번째 위기가 된다.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예비회담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따른 것으로 남북한 현안 문제 해결이 주요 의제였다. 하지만 회담에 참석한 소련 측 대표들은 회담 장소 앞에서 벌어지는 ‘신탁통치 반대’ 집회를 목격했고, 쏟아지는 신문 기사들은 소련을 맹비난했다. 


원래 장기간 신탁통치를 주장했던 것은 미국이었고, 소련은 그 기간을 단축하자고 주장했다. 소련은 이 같은 사실이 왜곡된 것에 대해 깊은 불만을 표시했다. 1월 23일 소련 대표 스티코프는 모스크바 방송 등 소련 언론을 통해 진실을 공개한다. 국내 언론에서도 신탁통치를 적극 주장한 것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이 보도된다. 하지만 미군정은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 그 상황을 우익 세력들이 앞장서 ‘반소’ 구호로 이어가면서 모면했기 때문이다. ‘반탁=반공’이란 것이 어쩌면 진실보다 사회주의 계열을 공격하는 탁월한 무기였음을 보여준다.


예비회담은 2월 6일, 조선에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원조’하고 ‘1개월 이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에 합의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 소련대표단은 북한으로 떠났다.
 

▲ 김구가 머문 경교장 앞을 지나는 신탁통치 반대 시위대(왼쪽). 1946년 1월 19일 <중앙신문>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장 앞에서 시위(오른쪽)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이승만·김구는 미군정 자문기구로

예비회담이 끝나가는 시점인 2월 3일,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명의로 선언이 발표됐다. 민전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재차 확인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찬성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민전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을 비롯해 29개 정당과 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했는데 사회주의 계열을 모두 망라한 전선체 조직이다. 


민전은 2월 15~16일 결성대회를 거쳐 공식 발족했다. 의장은 여운형, 허헌, 박헌영, 김원봉, 백남운이 맡았고 9명의 부의장과 391명의 중앙위원(상임위원 73명)을 선임했다. 그리고 이강국을 사무국장으로 한 사무국을 운영했다. 눈에 띄는 것은 토지, 경제, 행정, 사회정책, 외교, 노동, 식량, 교육을 나눠 부문별 전문위원회 기구를 함께 만든 것이다. 미소공동위가 성명으로 밝힌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실질적으로 준비하려면 정책연구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대로 이승만이 주도해왔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협의회, 김구가 이끈 반탁투쟁 조직인 비상정치회의주비회가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로 합쳤다. 이후 미군정이 펼친 정치공작과 발맞춰 자문기구인 남조선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휩쓸려갔다. 민주의원은 2월 14일에 설립됐는데 미군정 체제 속에서 의회 형식으로 입법과 자문을 맡는 것이었다. 초대 의장은 이승만, 부의장은 김구와 김규식이 선출됐다. 


미군정의 초기계획 속에는 여운형을 비롯한 조선인민당 인사들도 민주의원에 포함시켜 좌익 분열을 도모했다. 하지만 여운형과 조선인민당은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게다가 중경임시정부에 포함돼 귀국했던 김원봉, 김성숙, 성주식 등이 비상국민회의에서 빠져나가 민전으로 결합했다. 


반대로 김구와 임시정부는 비상국민회의가 민주의원으로 전환되면서 신탁통치 논란 초반에 쥐었던 주도권을 이승만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으로서는 본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한민당 당수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꼽히는 김구를 예의주시하며 경계했다. 김구는 당분간 이승만과 한민당, 미군정과 함께 어정쩡한 동행을 하게 된다.
 

▲ 1946년 1월 27일 <민주중보>, 조선신탁통치 제안, 미국은 10년 소련은 5년(왼쪽). 1946년 1월 26일 <공업신문>, 소련 스띠곱 대장, 모스크바회의 진상을 발표(오른쪽)

 

▲ 1946년 2월 7일 <영남일보>, 미소공동성명, 민주정부 수립을 원조

미소공동위원회 기간, 미군정의 좌익 탄압은 전국으로 확산

미소공동위원회 본회담은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첫 회의가 열렸다. 소련 측 대표들은 3월 18일 서울에 도착했다. 회의에서 다룰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두 번째는 임시정부 수립 후 5년 기한의 신탁통치 처리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남북한 정당과 사회단체를 선정하는 문제부터 양쪽의 입장이 충돌했다. 소련 측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세력을 정부 수립 참여대상에서 배제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는 수석대표인 스티코프가 밝힌 개회사에서 언급된다. 

 

▲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한 미국 하지(중앙 왼쪽)와 소련 스티코프 중장

스티코프는 개회사에서 “조선임시민주정부는 모스크바 외상회의 결의를 지지하는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한 통일을 기초로 창설돼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조선 내에 민주주의 제도를 창설하는 것을 방해하는 목적을 지닌 반민주주의적 당파와 분자의 맹렬한 반항으로 중대한 난관이 빚어졌다”며 반탁세력을 비난했다. 


미국 측은 그런 반탁세력을 옹호하며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실제로 미군 사령관 하지는 공동위원회를 앞둔 시점인 3월 11일 성명을 발표하면서 “진실된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미국의 목표”라고 전제하고 “조선을 소수 당파에 지배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여기서 ‘당파’는 당연히 사회주의 계열이며, ‘소수’라는 말은 그 세력의 규모를 사실과 다르게 폄하한 것과 같았다. 


하지가 밝힌 성명은 2월 20일 공포한 ‘군정법령 55호’ 정당에 관한 규칙과 연결된다. 이 법령은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등록을 까다롭게 하는 구실이 됐다.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을 포함한 25개 단체는 대책위원회를 꾸려 정당등록법의 수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회의 시작 전부터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고, 회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실제로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미군정은 그렇게 회담이 지지부진해지는 사이 남한 곳곳에서 좌익세력의 실질적 약화를 시도했다. 정당등록법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체포했고, 덩치가 커진 우익단체들이 앞장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수수방관했다. 

 

▲ 1946년 3월 12일 <한성일보>, 하지 중장 “조선을 소수 당파에 지배시키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6년 3월 24일, 민전이 전북지역 순회 강연에 나서 김제에 도착했을 때 벌어진 우익테러였다. 미군정 경찰들은 사건을 방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음 날 정읍과 부안 강연에 나선 민전 부의장 김성숙과 조선인민당 재정부장 안기성을 체포한 뒤 군정 재판에 회부했다. 4월 1일에는 전남 인민위원회와 민전 그리고 인민당 간부 수십 명을 검거했다. 


영남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군정 경찰들은 부산, 울산, 진주, 밀양, 진해, 고성, 통영 등 경남 주요 지역의 사회주의 계열 단체 대표자들을 검거했다. 모두 ‘맥아더 포고령 2호’와 ‘군정법령 제19호’ 등을 앞세워 미군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체포했다. 임정 수립 촉진 시민대회를 열면서까지 미소공동위원회의 빠른 결과를 기다렸던 조선공산당과 민전에게는 분통이 터지는 일들이었다. 

 

▲ 1946년 4월 12일 <한성일보>, 임정 수립 촉진 시민대회 성황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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