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마고원 들쭉길

울산저널 / 기사승인 : 2021-06-13 09: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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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범 망명 보고서(9)
▲ ©문정훈 화가

 

팔월에도 눈이 내린다

이른 새벽, 별동대들이 후치령 서짝골을 나섰다. 계란은 한 소쿠리에 담지 말라던가. 연해주 무기 공급 별동대는 두 조로 나눠졌다. 일등포수 강두래가 이끄는 반구대 별동대들은 백두고원 자락 길을 잡았고, 북청포수들로 구성된 북청별동대는 두운봉(2487미터), 관모봉(2540미터)으로 이어진 함경산맥을 타고 북상키로 했다. 분조된 별동대 대원들은 각자도생하여 무산(茂山) 수림의 늑대촌에서 집결키로 했다. 북청별동대를 이끄는 김문술은 만주와 노령을 드나들며 시베리아 줄범 세 마리, 곰은 열 마리 넘게 잡은 불사신의 사나이였다. 특히 연해주 도회소에 파견되는 권취문에게는 산포수들이 무장할 총기를 교섭할 중차대한 책무가 주어졌다. 홍범도가 주문한 무기는 소총 외에 포탄도 있었다. 소총 600정, 탄환 10만 발, 권총 150정, 기관총 7정, 수류탄과 포탄이 780발이었다. 


산중역참 파발리에서 갑산 방면은 사방이 탁 트인 고산평지였다. 풍산(豊山), 중평장(仲坪場), 혜산(惠山)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북쪽으로는 황수원(黃水院), 동쪽 계류는 남대천이 흘렀다. 갑산 동점령까지는 빨라야 이틀사흘은 걸어야 하는 거리였지만 버마제비처럼 날랜 별동대라면 이틀이면 충분했다.
반구대 별동대들은 묵묵히 일수를 줄여나갔다. 고산지대답게 아직 중천에 해가 있는데도 차가운 냉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호천팔월즉비설(胡天八月卽飛雪), 그러고 보니 팔월에도 눈이 내린다는 북방 오랑캐 분지에 오른 것이다. 권취문은 깊은 산중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갑지만 얼지 않는 맑은 청수였다. 


“여긴 7월 중순에도 우물 얼어요. 그리고 9월 되면 귀리밭에 서리 내리고, 10월 초면 초겨울에 접어들어 눈 내립죠.” 


반구대포수들의 길라잡이로 선발된 갑산 직업포수 강두래였다. 그는 노일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풍산과 북청 사이에 놓인 황수원 고산평지에 이르자 화전 집들이 눈에 띄었다. 평탄한 고산평지에 파묻힌 화전 집들 대부분은 통나무와 진흙 벽 그리고 지붕에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었는데, 돌풍이 심하고 눈이 많은 특성상 지붕이 뒤집히지 않게 많은 돌이 올려졌다. 너른 개마고원 평지에는 벌써 참억새 같은 가을 풀과 진귀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반구대포수들은 곳곳에 군생하는 만병초, 제비붓꽃, 여랑화 등 알록달록한 꽃들에게 눈길을 빼앗기곤 했다. 


“개마고원엔 봄도 가을도 없고 일 년 중에 오로지 이 시기에만 왕창 핍니다.” 


꽃을 좋아하는 석이가 신기해하는 반구대포수들에게 말했다. 3리나 되는 너른 개마고원 평지에는 감자와 귀리가 끝없이 재배됐고, 주변은 온통 들쭉 산지였다. 개마고원 고원지대는 들쭉 재배의 최적지였다. 특히 도안, 혜산, 갑산, 운흥 등 여러 들쭉 재배지마다 처녀 일꾼들이 많았다. 둘쭉술은 백두산과 개마고원의 들쭉나무 열매가 주원료인 40도가 넘는 고급술로, 노란색 알갱이는 들쭉술의 맛과 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첨가물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대청제국 사람들에게도 꽤 인기가 높아 만주 식당에서는 가짜 술이 나돌기도 한다. 


어은령을 넘고 허천강 건너 갑수와 중평장의 분기점이 되는 유하리에 들어서자 삼림감시초소에 걸린 일장기가 눈에 띄었다. 가는 데마다 왜놈들 세상이 된 조선의 앞날이 걱정이었다. 청나라 금전꾼들이 금전판을 꾸릴 때 가장 먼저 붉은 깃발을 꽂는다더니 왜제 침략자들은 산판마다 자기네 일장기부터 꽂았다. 왜제 침략군은 청일전쟁을 일으킨 그해부터 함경도 국경 고을마다 군대를 설치했다. 조선인이 보기에는 우쭐대는 원숭이 같은데, 자기네는 일등국민이고, 미개한 조선은 이등국민, 오랑캐 대청제국은 삼등국민으로 하시(下視)했다. 또 조선 산포수들에겐 꿩이나 쏘는 납철알을 가지고 무슨 범을 잡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조선 산포수들은 그네들보다 사격술이 뛰어났고, 지리에도 밝았다. 산삼을 찾아다니는 심마니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범에게 국경이 없듯이 산삼을 찾아다니는 심마니에게도 국경은 없다. 의례적으로 조선 국경수비대들은 산포수나 심마니들에겐 관대한 편이라 국경 지역의 산포수나 심마니들은 수시로 조만국경이나 노만국경을 넘나들었다. 섬나라 원숭이 꼴을 보기 싫어하는 이들은 다시는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만주나 연해주에 남아 조선의진에 가담하기도 했다. 왜제 침략군은 이들을 비적으로 매도했다. 조선인과 만주족은 한통속이라며 파렴치범이나 범죄자로 누명을 덮어씌워 개 잡듯 다뤘다. 심지어 억울하게 목숨을 잃기도 했는데, 겁에 질려 달아난 사람을 사살하곤 도주자로 처리했다. 그들은 점점 땅굴 속 두더지로 전략해 갔다.

갑산 동점령 의진(義陳)

반구대 별동대는 갑산부 동남쪽에 있는 장평산 가파른 자드락길을 탔다. 아득한 백두산 아래로 백두고원이 펼쳐졌고, 혜산진 너머로는 압록강이 흘렀다. 함북육진을 두루 복무했던 권취문은 이 일대에 빠삭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대청제국과 인접한 혜산진과 삼수갑산은 예로부터 ‘오랑캐 길’로 불렸다. 장평산에는 발해, 거란, 여진족과 격돌한 진성들이 남아있고, 임진왜란 때에는 가토 기오마사 휘하의 부대가 진격해 왔다. 혜산에서 사염을 밀수하던 등금쟁이는 해관에 잡혀 몽땅 빼앗기기도 하고, 붙잡은 월경꾼이나 밀수꾼은 몽둥이찜질을 당하기도 했다. 


파렴치한 침략자들이 조선 외교권을 박탈하고부터는 갑산 읍내에는 경찰서와 우편취급국, 영림청 지소, 순사주재소, 잡화점과 여관 따위가 들어섰다. 백두고원 삼림지대에 눈독을 들인 일본 임업개발업체 종사원들과 왜제 침략군 수비대 군인 가족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생겨난 쓰루이(鶴屋) 왜인거리였다. 150여 명으로 불어난 갑산 왜인거리에는 여자들의 양산 물결이나 쪽바리들의 게다짝으로 북적였다.
“일본 강도들, 게다짝 끄는 짜개발들은 싸그리 몰아내야 해.” 


노일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김문술은 섬나라 원숭이 종족이라면 오랑캐보다 더 혐오했다. 


“총을 만져본 포수라면 요시찰인물로 감시받아요. 가는 곳마다 왜놈 일진회들이 판을 칩니다. 깊은 산중에 있는 화전민들도 일진회 끄나풀일 수 있어요.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멀더라도 산을 돌아야 안전합니다.”
길라잡이 강두래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하긴 왜놈 종자를 마주쳐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 별동대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산 비알을 에둘렀다. 이번에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적색지대를 피해야 했다. 조선에서 넘어간 범이나 반달곰, 말사슴을 추적하러 다녔던 강두래가 적색지대를 가리켰다. 압록강에서 멀지 않은 조만국경 수림지대였다. 왜제는 여태 없던 수렵을 규제하는 특별한 법을 만들어 규제했다. 노일전쟁에 승리한 왜제 침략자들은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적색지구를 만들어 산포수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래놓곤 만주 간도 40만 조선인을 보호하는 조치라느니, 만주신국가 건설이니, 조선의 연장이니 떠들어 댔다. 


갑산 동점령 산발치에 도착하기론 저녁 무렵이었다. 남쪽은 단천령 서쪽은 부전령을 이뤘고, 별동대가 가야 할 백두고원에는 입갈나무 가문비나무 전나무 수림이 울창했다. 동점령 기슭 산막에는 차도선을 비롯한 백두산포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착호갑사 후예들인 그들은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누구보다 먼저 대항했고, 초창기 항일 의병운동의 주력 포수들이었다. 백두산을 드나드는 산포수들은 냉혈인간들이었다. 겨울이면 손가락이 얼어 터지는 백두산을 돌아다니며 맹수를 잡아 피를 마신 냉혈인간들 눈빛에는 살기가 돌았다. 백두산포수들 중에는 목숨과도 같은 화승총 반납을 거부하는 자들이 많았다. 백두산포수들은 누구보다 화승총, 검창을 잘 다룰 줄 알았고 스스로 탄약을 제조할 줄 알았다. 왜제가 대한제국 군인을 해산시킨 뒤 곧바로 총포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려는 것 역시 의병의 핵심 전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산행포수들의 의병 참여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별동대는 동점령에서 하루를 묵었다. 산막 내부 벽에는 백두산포수가 사냥한 두 마리의 곰 머리가 걸려 있었다. 차도선은 갑산 풍산 산포수로 구성된 의병대를 규합 중에 있었다. 북청군 풍산면 출신인 차도선은 금점꾼, 사냥꾼으로 살아왔기에 안면이 넓고 지형에 익숙했고, 인품이 좋아 인근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높았다. 생계가 막혀 민심이 크게 소란해지자 차도선은 백두산포수들과 손잡고 반일 의병들을 조직했다. 


“기울어 가던 기둥이 무너졌소. 길 잃은 백성들이 나서야 합니다.”


“맞소. 나라가 위급할 때일수록 백성이 무장봉기를 해야 하오.”


강압적인 통치에 살길이 막막해진 백두산포수들은 차도선과 함께 반일 의거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이들 주변에는 봉기할 사람들은 있었으나 무장할 총기가 없었다. 설령 무기가 있다손 치더라도 화승총 수준이었다. 삼보방포 화승총으론 왜제 침략병과 대적하기란 역부족이었다. 화승총의 사정거리는 고작 50미터에서 100미터였지만 왜제병 소총은 500미터에서 1킬로미터였다. 거기다 화승총은 장전을 끝내고 다시 조준해야 한다. 화약을 채우고, 장탄하고, 화승대에 불을 붙여 조준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지체돼 급박한 상황에서는 총도 제대로 못 쏴보고 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흡기마저 뽑힌 조선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의기투합한 의진(義陳)들 의기는 하늘을 찔렀다. 


“왜놈들은 우리를 폭도로 규정하고 토벌에 나설 것이요. 일제의 총탄 앞에 이름 모를 산천에서 산화하는 항일 백성들 부지기수이고, 살아남은 이들은 간도나 아라사 등지로 망명길에 오르고 있소이다.” 


백두산의 뭇 산포수들이 조직적인 무장봉기에 나서기로는 짝 잃은 귀뚜라미가 숨바꼭질하는 입추(立秋) 무렵이었다. 


한편, 용트림하는 풍산 벽모봉(1909미터) 능선을 탄 북청별동대는 백두대간의 원줄기인 두류산(2309미터)을 만났고, 이어서 만탑봉(2205미터), 궤상봉(2333미터), 관모봉(2541미터)으로 이어진 함경산맥을 향해 내처 나아갔다. 함경산맥은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울창한 원시림과 잡목들이 하늘을 가렸고, 산협 물은 수정처럼 맑았다. 무인지경의 산간으로 다가갈수록 화전민들이 놓은 범잡이 함정들도 눈에 띄었다. 


배성동 시민기자, 소설가

※ 이 글과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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