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 가파른 정치세력 변화 그리고 임시정부의 귀환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9-15 00: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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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18)

이승만의 귀국을 기점으로 해방정국 속 정치판은 확대되기 시작한다. 해방 직후 가장 빠르게 움직였던 사회주의 계열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인민위원회로 나아가면서 여론을 선점했지만 미군정이 도착하자 민족주의 계열과 친일파, 부역자들이 들썩거렸다. 그들은 1945년 9월 16일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을 만들어 결집한다. 한민당은 정치이념이 하나로 통일된 정당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다만 뚜렷하게 일치된 입장은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불인정과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배척과 반대였다.
 

▲ 1945년 9월 27일 <민중일보> 한국민주당 부서 결정, 중앙집행위원

 


미군정 파트너를 자처한 한민당과 친일세력

한민당은 태생부터 친일파 정당이라는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창당을 바라고 후원한 세력 속에 친일파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안정적인 지위를 누린 지주와 자본가들, 이른바 부역자들이 밑바탕을 이뤘다. 한민당은 결성될 때 그런 비판을 상쇄하기 위해 이승만, 김구, 이시영, 서재필,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을 당의 영수로 내세웠다. 이승만, 김구, 이시영, 서재필 등은 중국과 미국에서 활동했기에 아직 귀국하지 못했고, 의사를 확인하지 않았다. 문창범은 상해와 노령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1938년경에 이미 사망했다는 설이 있었지만 선임했고, 권동진과 오세창은 일제강점기 후반은 활동이 거의 멈춰 있던 옛 인물이었다. 


실제로 당을 이끈 것은 송진우를 비롯해 모두 9명의 총무였다. 전국 각지를 대표하는 인물로 구성했다. 송진우는 전라남도, 백관수는 전라북도, 허정은 경상남도, 서상일은 경상북도, 조병옥은 충청도, 김도연은 경기도, 백남훈은 황해도, 김동원은 평안도, 원세훈은 함경도다. 


한민당은 미군정과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후 미군정이 선임한 고문 9명 중 7명을 차지한 것도 그 결과다. 게다가 당 수뇌부였던 조병옥이 미군정 초대 경무부장으로 내정됐다. 미군정 산하 경찰 고위직 대부분이 친일 경력을 지녔으니 그 세력의 수장이 한민당인 것은 많은 것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하지 사령관을 비롯해 군정 고위인사의 통역을 맡은 이들 대부분이 한민당원이었다. 미군정이 남한을 통치하면서 최적의 파트너이자 가장 우호적인 정치세력 중 하나로 한민당을 선택한 것이다.

미군정의 노골적인 이승만 지원…독립촉성중앙협의회

미군정이 선택한 또 다른 핵심 카드, 이승만은 귀국 전부터 미군정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이승만은 10월 12일에 도쿄에서 미군 태평양지구 사령관 맥아더를 먼저 만났다. 맥아더는 이승만을 만날 때 하지 사령관까지 동석시키면서 이승만에 대한 환대를 지시한다.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할 때는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을 내줬다. 하지는 이승만이 귀국한 직후 마치 수행하듯이 군정 1회의실을 비워 기자회견을 열어준다. 라디오 연설을 준비해주고, 10월 20일 열린 환영대회 또한 적극 지원했다. 


한민당은 애초에 영수로 이승만을 추대해 놓았으니 미군정의 환대가 달가웠다. 이승만이 거처할 숙소를 마련해줬고 매월 15만 원씩 정치자금을 후원할 만큼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민당이 제안한 영수 취임을 거부하면서 거리를 두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것은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을 거절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한민당과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승만이 군정 초기 모든 정당을 통합하는 적임자를 자임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각 정당 수뇌부를 만나면서 정당연합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구성을 주도했다. 


이런 이승만의 행보 밑바탕에는 치밀한 개인적 야심이 깔려 있었다. 그는 상해임정의 초대 통령으로 선임된 후 역할 수행 대신 지위만 누리다 탄핵받은 흑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해방공간에서 좌우 양쪽 모두 호응해주는 상황을 즐겼다.


미군정을 향해서도 그런 존재감을 과시하는 데 주력했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철저히 부정했지만, 지역 곳곳에 뿌리를 내린 인민위원회에서 힘을 키워가는 사회주의 계열을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를 억누를 정치 세력 안에 이승만이란 카드를 중심 위치에 끼워 넣기 시작했다.
 

▲ 1951년, 이승만과 김성수


이관술,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독촉에 대한 입장 발표

조선공산당과 박헌영도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이 커지는 데 일조했다. 이승만을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한 것도 오판이고, 이승만의 귀국 후 두 사람이 독대한 것도 무게를 실어준 꼴이 됐다. 이것은 조선공산당이 미국이나 미군정의 행보를 너무 낙관한 것과 마찬가지로 초기 정치 구도에서 뼈아픈 실수가 된다.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이 독촉을 바탕으로 각 정당연합체를 넘어 과도정부를 꾸리겠다는 계획을 드러낼 때 ‘민족반역세력 배제’라는 원칙을 조건으로 참가를 결정했다. 건국동맹을 이끈 여운형 역시 좌우익을 망라한 통일전선을 꾸준히 추진했기 때문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독촉 중앙협의회를 꾸리면서 한민당에게 지분을 넓혀주고, 유명무실해진 조선인민공화국의 완전한 해체를 요구했다. 모든 게 미군정이 바라는 바였다. 


조선공산당은 이관술을 대표로 내세워 11월 11일 기자단과 회견을 통해 독촉에 대한 입장을 다시금 밝혔다. 이날 회견에서 이관술은 일단 독촉 참가에 대한 질문에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한 참가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관술은 기자들에게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완전히 제외한 통일전선”을 확인해 줬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통일전선이라는 미명 하에서 일본제국 잔유세력과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도발을 허하는 반민족적, 반인민적 전선”일 뿐이라고 경계했다. 아울러 조선공산당의 입장은 변함없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위한 통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분명히 했다.
 

▲ 1945년 11월 12일 <신조선보> 조선공산당의 독촉협의회 입장(왼쪽)과 박헌영

 


여운형은 미군정과 협력 의지 밝히며 조선인민당 결성

여운형은 해방과 함께 그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좌·우 통일전선을 통한 국가 수립이라는 노력을 독립촉성협의회로 넘길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미군정이 바랐고, 이승만도 원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의 완전한 해체 요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청년 시기부터 알고 있었던 이승만은 독단적이었다. 특히 건국동맹을 결성하는 순간부터 대척점에 서 있던 한민당 세력을 가득 채운 독촉 구성에 쓴맛을 봐야 했다. 


여운형은 결국 독자 정당을 결성하는 행보로 옮겨가게 된다. 여운형은 11월 12일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건국동맹을 모체로 하고 몇 개의 단체를 합류시켜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여운형이 위원장을 맡고 부위원장 장건상, 서기장 이만규, 사무국장 이임수, 정치국장 이여성 등이 선임됐다. 당의 강령은 “조선민족의 총역량을 결집하여 진정한 민주주의국가의 건설을 기함,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여 전민족의 완전광복을 기함, 진보적 민족문화를 건설하고 전 인류의 문화 향상에 공헌을 기함”이라는 3개 항이었다. 


조선인민당은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만을 제외하고’ 손을 잡겠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목표를 내세웠다. 하지만 조선인민당 결성에도 대중에 대한 영향력과 주도권은 조선공산당이 여전히 쥐고 있었다. 여운형과 조선인민당 역시 중앙인민위원회뿐 아니라 전국노동조합평의회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 전국 단위 대중조직 결성 과정에 적극 참여했지만 무게는 조선공산당으로 기울었다.
 

▲ 왼쪽부터, 1945년 11월 3일 <자유신문> 여운형 씨 군정에 협력. 1945년 11월 14일 <자유신문> 여운형 씨 당수로 인민당 결성식 거행

 


중경 임시정부의 귀환…김구 먼저 개인 자격으로 귀국

중경임시정부는 해방이 되자 서둘러 귀국하려고 했다.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 속 ‘당면정책 14개조’에도 최대한 빠른 시기에 귀국해서 각계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과도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미군정은 단체 귀환을 용인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한 것처럼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와 김규식 등 임정 지도자들을 활용할 계획은 있었지만 주도권을 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에 반대할 또 하나의 카드이자, 이승만과 협조를 전제로 임시정부 측과 교섭을 벌여나갔다. 


교섭 결과 11월이 넘어선 뒤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환이 허락됐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을 우호적인 대화상대로 남기기 위해 이를 수용한다. 11월 5일 상해에 도착한 김구는 11월 19일 ‘개인 자격을 인정하고 미군정에 협조한다’는 서약서를 중국 주둔 사령관 웨드마이어에게 제출했다. 그 다음 임시정부 1진 15명에 속해 11월 23일 오후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쩌면 매우 굴욕적인 귀환일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늦추면서 급변하는 해방정국을 멀리서 지켜볼 수는 없었다. 

 

 

▲ 11월 5일 귀국을 위해 상해에 도착한 김구(왼쪽)와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조(9월 3일)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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