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포 왜성(西生浦倭城)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 / 기사승인 : 2019-03-27 1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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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 서생포 왜성 ⓒ문화재청

 

‘서생포 왜성’과 ‘서생포 진성’은 이름이 비슷한 데다 지척지간에 있어 헷갈릴 수 있다.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 중 일본군들에 의해 새로 쌓은 성인 데 반해, 서생포 진성은 조선 수군 주둔지로 임진왜란 때까지 존재했다가 전쟁 초기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 서생포 왜성은 웅장한 모습으로 잘 남아 있으나, 서생포 진성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서생포 왜성은 진하해수욕장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데 비해, 서생포 진성은 진하해수욕장에서 남창으로 가는 도로 왼쪽에 있어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해 한 달도 채 못 돼 서울을 점령했다. 전쟁 초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 의병, 재조직된 관군, 그리고 명나라군에 패퇴해 경상도 남쪽 해안 지역으로 쫓겨 내려오게 된다.


이후 일본군은 한편으로는 강화 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을, 다른 한편으로는 장기전을 펼칠 심산으로 울산에서부터 전라도 순천에 이르는 해안가 중요 지점 30여 곳에 성을 쌓아 그들의 방어거점으로 삼게 된다. 당시 일본군들이 조선 땅에 쌓은 성을 왜성(倭城)이라고 하는데, 울산에는 서생포 왜성과 울산 왜성이 있다.


서생포 왜성은 1592년부터 1593년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휘해 쌓은 성이다. 한때 7천 명의 군대가 주둔할 정도로 규모가 컸던 이 성은 경주, 안동, 문경 등 경상도 내륙지방에 진출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부였다. 이 성의 방어를 위해 지금 학성공원 자리에 울산왜성을 축조할 정도로 일본군에게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개전 초기 기세등등했던 일본군이 남쪽으로 쫓겨 내려온 다음 이 성에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또한 정유재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이곳을 교두보로 삼아 총반격에 나서기도 했다.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은 일찌감치 서생면 진하리 일대의 지리적 이점에 주목해 전쟁 초기인 1592년 7월부터 그들의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근처 서생포 진성의 성벽을 허물어 이곳 왜성을 쌓는 데 이용하면서 이듬해 완공했다. 성의 전체 면적은 15만1668㎡(4만5960평)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왜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서생포 왜성은 진하해수욕장 입구 성내(城內)마을에서 시작해 해발 200m 정상에 있는 본성(本之丸)까지 넓은 공간에 걸쳐있는 평산성(平山城)이다. 성의 전체 모습은 직사각형이고, 성벽 밖으로는 해자를 팠다. 현재까지도 성벽이나 축대는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해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의 가장 높은 곳인 산 정상에 본성을 두고 그 아래 평지까지 모두 3단의 공간으로 나누기도 하며, 크게는 내성과 외성의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이 같은 공간 구획은 우리나라 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일본성만의 독특한 구조다. 일본성 내부를 세분하여 본환(本丸), 이지환(二之丸), 삼지환(三之丸)의 세 공간으로 구분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이 같은 구분이 모호하다 하여 잘 사용하지 않는다.


산 정상에는 본성(本城)이 있다. 과거의 구분법대로 하면 본환이다. 이곳에 왜장의 지휘소인 천수각(天守閣)이 있었다. 지금은 삼각형 철구조물로 만든 지적삼각점(地籍三角點)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오르면 문수산에서부터 동해까지 한눈에 들어와 성 쌓기의 대가 가토 기요마사가 왜 여기에다 성을 쌓았는지 이해가 된다. 성 전체를 지휘 감독하는 주장(主將)의 천수각(天守閣)은 대장단(大將壇)이라고도 하며, 장군수(將軍水)라는 우물도 있었다.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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