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 정치 변화 속 결성된 전국조직과 통일전선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9-01 00: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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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17)

이관술이 고향 울산에 방문한 시기는 조선공산당이 재건된 이후였다. 이때는 총비서 박헌영을 비롯해 ‘경성콤그룹’ 출신들이 중심이 됐던 재건파가 장안파를 흡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지도부 또한 경성콤그룹 출신들이 대거 포진했다. 정치국에 포함된 김일성, 최창익, 무정 등 남쪽이 아니라 북으로 귀환한 이들을 빼면 대부분 그랬다. 반대로 장안파의 핵심이었던 정백, 이영, ML파의 김철수, 이정윤 등이 지도부에서 빠졌다.


조선공산당은 조선인민공화국 이후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하는 시기에 지방당 구축에 나섰다. 서울은 김삼룡이 조직에 나섰고, 부산경남에는 이구훈, 호남에는 윤순달 등을 파견했다. 이때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사회주의 세력들이 각 지역 인민위원회를 주도하면서 조선공산당 지방당 조직에 참가한다. 그리고 당의 지도를 받는 대중조직 창립에 나선다.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 결성
 

▲ 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대회 사진. 아래, 1945년 12월 9일 <조선일보>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

대중조직 중에서 조선공산당이 가장 심혈을 들여 결성한 단체는 바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였다. 재건파의 경우 활동 중심이 경성트로이카에서 경성콤그룹에 이르는 동안 적색노조운동에 매진해왔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일본인 자본가들이 운영하는 공장과 사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치위원회를 구성했다. 일본인들이 빠져나가면서 친일 성향의 악덕 관리자들이 배제되고 노동자들이 직접 공장을 장악해 생산을 이어갔다. 노동자들의 경우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노동해야 생존할 수 있는 생존의 선택이었다. 이런 흐름에 조선공산당이 적극 나서 전국조직 건설에 대한 간담회를 진행했다. 9월 26일 경성토건노동조합 사무실에 금속, 화학, 출판, 섬유, 토건, 교통운수, 식료품, 철도, 연료, 피복 등 10개 산업 노동조합 대표(51명)들이 모인다. 이날 전평 준비 대표자 회의 이후, 9월 28일 전평 준비위원회 회의가 시작됐고 그로부터 40여 일이 안 된 11월 5~6일 이틀에 걸쳐 전평 결성대회가 열렸다.

 

▲ 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창간호에 실린 ‘창립선언’

서울중앙극장에서 열린 대회에는 남북한 40개 지역 노동자 대표 505명이 참가했다. 상임위원장에는 허성택, 부위원장에 박세영, 지한종, 서기부 한철, 박종호 등이 선출됐다. 명예의장에는 박헌영과 김일성이 이름을 올려 공산당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파리국제노조 비서 레온치오, 소련노조 비서 쿠스네초프, 중국공산당 마오쩌둥을 비롯해 영국과 미국 노동조합 비서를 명예의장에 포함시켜 국제연대를 보여준다. 이는 대회장 무대에 걸린 각 나라 국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전평은 결성 2개월 만에 전국에 걸쳐 55만 명의 조합원이 가입하는 성과를 냈다. 당시 노동자가 210만 명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조직률이 25%를 넘어선다. 현재 대한민국의 노조조직률(2019년 노동부 기준) 12.5%에 비교하면 2배가 넘는 수치다.

전국 농민, 청년, 여성단체도 차례로 결성
 

▲ 1945년 12월 23일 <조선일보> 전국부녀총동맹 결성식
전평 결성 이후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결성도 박차를 가했다. 준비위원회는 1945년 11월 8일 조직됐고 지역인민위원회 결성과 함께 조직된 농민조합 대표들을 묶어 12월 8~9일 이틀에 걸쳐 결성대회를 열었다.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열린 결성대회까지 조직된 규모는 앞서 열린 전평 결성 때보다 훨씬 컸다. 조직원 숫자가 13개 도 연맹에 188개 군, 1745개 면을 아우르는 330여만 명에 이르렀다. 


청년조직은 ‘전국청년단체총동맹’(청총)으로 12월 11~13일, 천도교회관에서 72만3305명의 회원을 포괄하는 중앙조직으로 결성대회를 마쳤다. ‘전국부녀총동맹’(여총)은 1945년 12월 22~24일 서울 풍문여고 강당에서 1000여 명이 모여 결성했다. 


이관술의 제자이자 동지였던 박진홍은 연안에서 서울로 돌아와 여총의 문교부장 겸 서울지부 위원장을 맡았다. 또 다른 제자 이효정은 울산 위원장이었고, 이관술의 동생 이순금은 중앙대표위원이자 조직부장을 맡았다. 동덕여고보의 동기들이 해방 공간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 김일성 그리고 박헌영

조선공산당이 전국 단위 대중조직을 연이어 만들어가는 동안 정치지형은 거물 정치인들의 귀국으로 더욱 들썩였다. 먼저 평양에서 김일성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날 환영대회는 북한에 주둔 중인 소련 25군 사령관 레베데프를 비롯해 소련군 장성들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조만식(1883~1950)이 함께했다. 


조만식은 당시 북한지역 민족주의 계열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일제강점기 마지막 순간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일제에 협조하지 않은 기개를 보였기 때문에 대중의 신망이 컸다. 소련군정 뿐 아니라 김일성도 조만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해방 후 9월 19일 소련 화물선을 타고 원산에 도착한 후 평양에서 소련군의 고문 직함을 달고 한 달여 비공개 활동을 이어갔다. 북한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김일성이 만주 항일전투에서 오랜 기간 혁혁한 무공을 올린 전설적인 인물로 퍼져있었다. 하지만 당시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은 33살로 너무 앳된 청년이었다. 그래서 ‘가짜’ 김일성이라는 반발이 환영대회 현장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환영대회

이승만은 10월 16일 태평양사령관 맥아더의 전용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해 바로 미군정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했고, 10월 20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연합국 환영대회에서 대중 연설을 했다. 이날 연설문 속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정치인 이승만을 상징하는 문구로 각인됐다. 


이승만과 박헌영은 10월 31일에 만난다. 두 사람이 만난 뒤 나눈 이야기는 거의 모든 신문에서 대서특필됐다. 약 3시간 동안 가진 회담에서 이승만은 조선공산당도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박헌영은 ‘민족반역자를 배제한 통일정부 건설’을 원칙으로 삼고 2가지 사항에 완전 합의했다고 밝혔다. 친일파가 배제된 통일정부 건설을 위한 연합전선(통일전선)이었다.
 

▲ 1945년 11월 2일 <자유신문> 완전 합치 본 2대 원칙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가와 분열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외에도 여러 정치단체 대표들과 연쇄 회담을 이어가며 국내 정세 파악과 인물 관계의 밑그림을 그려갔다. 그리고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내용과 주석으로 선출된 과정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할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여러 회담 결과를 전달하는 신문보도 어디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이승만은 즉답하지 않고, 독촉 참가를 권유하면서 본인의 명망과 영향력을 드러내려 했다. 


11월 2일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독촉 2차 회의는 여운형과 박헌영 등 사회주의 계열 대표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중앙집행위원 인선 등 주요 권한을 이승만에게 이양한다. 하지만 그날 회의에서는 좌우 균열이 감지됐으며 다음날 조선공산당은 독촉이 진실한 통일전선이 아니라는 비판을 얹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1월 7일 방송연설을 통해 인민공화국 주석 직위에 대해 ‘정식으로나 비공식으로나 수락치 않았다’며 취임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 1945년 10월 20일 이승만은 서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연합국 환영대회에서 대중 연설을 했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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