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미륵촌

배성동 시민/소설가 / 기사승인 : 2021-08-17 0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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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범 망명 보고서(17)

▲ ⓒ문정훈 화가


만주족 객점

춘화 동흥진 벽촌을 나설 무렵부터 내리던 폭설은 갈수록 기세가 좋아졌다. 


“아이고, 추워라. 불알이 얼어 쥐방울만해졌다.”


때아닌 폭설 한파에 별동대 대원들의 걸음걸이가 허적댔다. 


“젠장. 반나절 내내 걸어도 겨우 두 마장 왔군. 이러다가 로씨아도 못 가보고 얼어 죽는 거 아냐?”


“곰도 겨울잠 들어가고, 범도 굴속에서 들앉을 철이지.”


“노만국경 고지대는 8월에도 얼음 언다더군.” 


이반은 사내들의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길을 열었다. 가도 가도 눈이었다. 


“저기 보이는 미륵뫼가 노만국경이요. 우린 그 아래 분수령을 넘어야 하오.”


아득한 산이었다. 짐승도 마다하는 험한 산줄기에 걸린 먹구름으로 봐선 쉬이 그칠 눈이 아니었다. 분수령 문턱은커녕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힐 처지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어렵겠소. 좀 더 가면 만주족 객점이 있는 미륵촌이오. 우선 눈부터 피하고 봅시다.” 


천하에 눈을 당해낼 장사는 없다. 이런 날은 만주범도 동굴에서 나오지 않는다. 


만주족들이 사는 호문산(虎門山) 기슭의 미륵촌에 들어섰다. 만주족이 운영하는 월임가(月林家) 객점에 들어서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다리가 길고 늘씬한 것으로 봐서는 조선 명견인 풍산개 같았다. 만주 전통 복장 차림의 노장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반과는 밀거래를 트는 사이였다. 의심 많은 노장은 눈을 맞고 서 있는 낯선 사내들을 흩어보았다. 


“이반, 일본 헌병에 쫓기는 조선인들 데리고 와서 어쩌자는 건가? 훈춘 관헌에서 알면 골치 아파.”


꿰놓은 동태마냥 추레한 사내들을 본 노장이 듣기 싫은 거위 목소리를 냈다. 


“폭설에 발이 묶인 멧포수 총땡이들이요.”


“이거 왜 이래? 척 보면 아는데.”


노장이 살 세게 그루박았다. 밖에 선 사내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지켜봤다. 사흘 피죽도 못 먹은 몰골들을 외면했다간 언제 날강도로 돌변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럼 말이네. 자네 용골은 나한테 넘기는 거네?”


“알았소, 날삯해 드리지요.“


범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노장에게 용골을 넘기기로 하고 객점에 들어섰다. 별동대들이 들어간 판자객점의 내부는 의외로 넓고 안락했다. 신식 목조건물과 구식 판자객점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게 조화를 이뤘다. 


방안에 들어선 이반은 가죽 가방에 든 기름종이를 꺼내 들고 노장이 있는 신식 목조건물로 갔다. 이반은 기름종이에 싸뒀던 용골을 노장에게 넘겼다. 용골을 챙긴 노장은 웃음을 머금었다. 터무니없는 거래였지만 인원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귀한 물건들을 바꿀 땐 서로 적당한 값을 맞춤해야 하는데, 상술에 밝은 만주족 장사치들은 후려쳐 거저먹으려고 덤벼들었다. 만주족들은 범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특히 범 뼈와 내장 몇몇 부분은 비싼 약재로 썼고, 사슴뿔은 중국인들 사이에 회춘 처방 특효약이었다. 이반은 외출을 서두르는 노장과 함께 거실로 나왔다. 길손들이 거실 가마불 앞에 앉아 있었다. 남녀 셋에 서양인 둘이었다. 그중에서 여자를 끼고 있는 젊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좁은 골목에서 독사를 만난 듯이 피하는 눈치였다. 문밖에 나온 이반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거실에 있는 젊은이는 누구요?”


거실을 나오면서 본 젊은 사내의 눈초리가 신경 쓰였다. 훈춘 관헌의 끄나풀이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응, 간혹 우리 집엘 드나드는 조선 약초꾼 말이군. 만주족 과부와 정분이 맞아 연해주로 달아나는 간사위라네.” 


만주족들은 장인장모가 인정하지 않는 교묘한 사위를 간사위라 불렀다. 


“죄라면 만주족 여자를 사랑한 죄 밖에 없지.”


“서양인도 보이는 것 같은데?” 


“아라사 포수야. 자네도 네눈이 알잖아?”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에 있는 풍산개를 볼 때부터 짐작했었다. 네눈이라면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명포수이다. 연해주의 재력가로, 여러 마리의 풍산개를 데리고 다니며 사냥을 했다. 노장은 흰 눈을 밟으며 걸어갔다. 진품인지 가품인지 알아보러 가는 길이 뻔하다. ‘자기 잇속만 챙기는 뺀드기 영감탱이 같으니라구. 순대처럼 속이 꽉 차야지. 저리 노래미 창자가 돼서야. 웬.’ 이반은 혼잣말로 덧두리를 했다.
 

▲ ⓒ문정훈 화가

 


노만국경의 유랑객들

길손들은 거실 불가마 앞에 모여 있었다. 짙은 콧수염짜리 서양인은 얀콥스키 포수였다. 이반은 청어와 노어를 섞어 가며 길손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눈이 그치면 함께 나설 길동무들이니 인사나 나눕시다. 난 멍구가이(바라바샤)에 사는 이반이라고 하오.”


“초행길이니 잘 부탁합니다.”


만주족 여자였다. 


“어딜 가시오?”


“저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갑니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만주족 여자의 분 바르지 않는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곱고 아리따웠다. 


“두 분은 어딜 가시오?”


청나라 말로 대화를 나누던 남녀가 이반에게 눈길을 줬다. 


“예, 예, 포수님. 저는 목허우(포세이토) 가는 길입니다.” 


상투를 자르고 서양복을 입은 조선 청년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청나라 말은 어디서 배웠소?”


“장바이를 자주 드나들다 보니 청나라 말을 알게 됐습니다.”


“심마니요?”


“예, 예, 백두산 심마니입니다.”


심마니가 달고 다니는 여자는 열 살 연상으로 보였다. 그는 원래 천하를 떠도는 직업 약초꾼이었다. 조선 팔도뿐만 아니라 청나라 장바이(장백산)와 만주수림 그리고 노령 연해주를 드나들며 귀한 산삼과 심산유곡의 약초를 캐 팔았다. 간도 땅의 약초꾼, 노령 약초꾼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는 만주 유랑 중에 젊은 만주족 과부와 정분이 맞았다. 


“포수님, 저 코다리 나리는 누구시죠?”


“시지미에 사는 얀콥스키 포수요. 이 바닥에선 네눈이라 부르오. 눈이 네 개 달렸는지 봤다 하면 두 번 안 당기는 명포수로 소문이 났소.”


남녀는 얀콥스키 얼굴에 정말 눈이 네 개 달렸는지 쳐다보았다.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만주족 여자는 옅은 미소만 띨 뿐이었다. 


훈훈한 가마불 앞에 앉아 있던 얀콥스키가 다가왔다. 헌칠한 몸에 걸친 표범가죽 조끼가 잘 어울렸다. 


“이반, 올겨울에 흑룡강성으로 올라가 볼까? 거긴 아직 범 있을 거야.”


“글쎄, 거기도 철도가 들어서고부터 범이 귀해졌다더군. 이러다간 범 씨가 마를 판이야.”


얀콥스키는 범 사냥을 나갈 때는 몰이꾼들을 여럿 고용한다. 이반 역시 그와 함께 만주 길림성과 흑룡강성 그리고 조선 백두산까지 범 사냥을 다닌 적이 있었다. 그는 길림성 만주수해를 비롯해 하얼빈을 다니며 청국인 일본인과도 두루 교류했다. 


“저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얌전히 앉아 있던 만주족 여자가 일어서 거실을 빠져나갔다. 


“이반, 저 여자 알아?”


“나도 처음 봐. 블라디보스토크에 간다더군.”


“여자 홀몸으로 이 험한 국경을 넘겠다? 뭔가 수상하군.“


정탐에 밝은 얀콥스키는 여자를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이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길을 드나드는 수상한 사람의 십중팔구는 밀수꾼 아니면 범법자들이다. 사연이 있지 않고는 짐승도 마다하는 험한 국경을 넘기란 드물었다. 혹시 만주족 재력가의 애첩? 도망자? 만약 아편 밀수꾼이라면 아라사로 도주하는 길이다. 아편전쟁으로 망조가 든 청나라는 아편 밀수꾼을 교수형으로 엄히 다스렸다. 


“이반, 정말 국경 넘을 거야? 당신 친구들도 그렇고. 국경수비대에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얀콥스키, 자네가 일본인과 교류하는 건 알지만 우리 조선인 입장도 이해해 주길 바라.”


“난 몰라. 알아서 해.” 


노일전쟁 이후 월경은 한층 힘들어졌다. 예전에는 노령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부지기수였지만 노일전쟁 이후에는 불법 월경자를 철저히 단속했다. 불법 체류자가 많은 조선인을 악용하는 무뢰한들도 있었다. 그들은 불법 체류자를 잡아 인신매매나 노예로 팔아넘겼다. 여자는 아편을 은밀한 성기에 숨겨 오도록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초주검이 되도록 몽둥이질을 했다. 매질에 장사가 없었다. ‘개보다 못한 식민지 조선인, 개 패듯 두들겨 패서 추방해야 해.’ 살려줄 때는 신고하지 못하도록 초주검이 되도록 매질을 하거나 발바닥에 칼질을 했다. 특히 노군 탈영자는 무뢰한이나 마피아보다 더욱 잔인했다. 그들은 인정사정이 없는 인간 백정들로,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사람이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흰옷 입은 조선인 월경자를 백조라 부르며 백조 사냥을 서슴지 않았다. 

 

 

▲ ⓒ문정훈 화가

 


배성동 시민기자, 소설가


※ 이 글과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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