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과 인민위원회의 대립…울산을 방문한 이관술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08-25 0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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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16)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 원수의 포고와 하지 중장의 정령과 아놀드 소장의 행정령에 의하여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1945년 10월 10일 미군정장관 아치볼드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성명 중에서


1945년 9월 14일 내각을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은 남한으로 진주한 연합군(미군)에게 협조 의사를 미리 밝혔다. 하지만 인천항을 거쳐 서울로 진주한 뒤 수립한 미군정은 ‘인공’을 부정했다. 조선 안에 미군정 외에는 어떤 정부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10월 10일 미군정장관 아놀드가 성명을 발표해 쐐기를 박았다. 미군정은 10월 18일에 아놀드가 직접 여운형을 만나 ‘인공’의 즉각 해소와 정당으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의 권고를 전달했다. 

 

▲ 1945년 10월 12일 <신조선보> 아늘드 장관 발표 내용

 


미군정 북위 38도 이하 한반도 점령 정책

미군정이 보인 태도는 사실 미군이 상륙하기 전 미공군 전투기를 이용해 공중에서 살포했던 첫 포고문부터 연결된 것이었다. 남한에 주둔이 결정된 미군 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의 이름으로 뿌려진 포고문의 제목은 “남한 민중에게 고함”이었다.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한글이 섞인 포고문의 핵심 내용은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을 하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라는 경고였다. 맥아더의 이름으로 낸 ‘포고 제2호’에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율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함”이라고 명시한 것을 앞세워 강하게 압박했다. 


미군정은 군정관들과 함께 그들이 ‘엄선하고 감독’하는 조선인으로 조직된 정부로 행정 각 방면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인민위원회로 이어진 자치활동을 모두 백지화하려고 노력했다. 조선공산당을 비롯해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 전략이었다. 


미군정이 외형상 한국인을 군정 요직에 포함시키면서 내세운 ‘엄선한 조선인’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나 부역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미군정 초기 남아있던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조선인 중 친일파를 추천하고, 그들 역시 또 다른 친일파를 추천하는 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결국 친일파는 친미파가 됐고, 부역할 대상이 바뀐 것이라는 비판이 나올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서울을 시작으로 11월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남한 전역을 미군 전술부대가 점령하는 동안 계속됐다.
 

▲ 미군 24군단 하지 중장 이름으로 뿌려진 포고(1945년 9월)


미군정과 대립 속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열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내각을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중앙인민위원회와 남한 전역에 만들어진 지역인민위원회 또한 부정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압박에도 지역인민위원회는 자치 기능을 유지해 나갔다. 


미군정장관 아놀드의 10월 10일 포고 이후 중앙인민위원회는 10월 14일 성명을 내고 미군정 발표에 대해 “미군정과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전제한 후 “아놀드 장관 성명은 반민중적이다”라는 유감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16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계승과 강화를 바탕으로 “각지에 있어서 도인민위원회, 군인민위원회, 면인민위원회를 조속히 조직하고 중앙인민위원회의 지시를 받으라”는 포고문을 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건전한 발전’과 조선의 ‘완전 독립’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데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중앙인민위원회는 ‘인공’을 대표해 여운형이 아놀드 군정장관과 세 차례 회담했고, 하지 사령과과 한 차례 회담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미군정과 인민위원회의 대립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11월 20일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가 소집된다. 


서울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대표자회의는 1945년 11월 20일부터 3일 동안 열렸다. 참석자는 전국 13개 도, 25개 시, 175개 군의 지방인민위원회 대표 약 600명이 참석했다. 의장을 맡은 허헌은 개회사에서 “군정당국은 반드시 조선민중 대다수의 요망을 알고 가까운 장래에 민중 총의가 환영할 정권 수립에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대회에 귀빈으로 참석한 아놀드는 여전히 “군정과 협력할 것”을 주장했다.
 

▲ 1945년 10월 15일 <신조선보> 중앙인위원회 성명 전문

 


고개 드는 친일파와 민중의 저항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로 이어진 3개월 동안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은 일관되게 미군정과 충돌보다는 대화를 통한 조율의 끈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같은 기간 한민당을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 인사뿐 아니라 친일파와 부역자들을 적극 품에 안았다. 


미군정은 사회주의 계열은 완전히 배제하고 해방 직전까지 일제에 복무했던 관리들을 유임하거나 신규로 임용했다. 신규 임용 역시 공개 채용이 아니라 추천이었으니 최소한 부역자로 대부분의 자리가 채워진 것이다. 이는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내세웠던 ‘친일세력 배제’와 정면으로 부딪힌 인사정책이었다. 결국 행정과 입법, 사법에 걸쳐 핵심적인 자리에 총독부에서 일했던 친일 관료들이 대거 진출했다. 


그중 가장 심각한 부분은 경찰이었다. 해방 직후 혼란을 줄이면서 치안을 담당했던 각 지역 건준과 인민위원회의 권한을 뺏기 위해 친일 경찰들을 앞장세웠다. 각 지역으로 파견된 미군 전술부대가 친일 경찰의 뒷배가 돼주었다. 그중 경상도 지역에서는 미군 전술부대와 인민위원회 자치 치안조직의 충돌도 벌어졌다. 


이 상황에 가장 분개한 것은 기층 민중들이었다. 해방 직후 친일 세력 청산과 소작료·토지문제 등을 걸고 확대된 것이 인민위원회였기 때문이다. 결국 경상남도에서만 약 300명의 인민위원회 관계자가 체포됐지만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1945년 11월 21일 <중앙신문>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고향 울산을 방문한 이관술

같은 시기 이관술은 조선공산당 재건과정부터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구성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활동했다. 조선공산당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주요 인사들은 수많은 곳에서 초청받았다. 당대표는 박헌영이지만 부재할 경우 이관술과 이현상 등이 대신해서 주요 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해방을 맞은 후 고향을 방문할 짬을 내기 어려웠다. 


이관술이 고향 울산에 방문하자 지역 인민위원회 주요 인사들이 모두 환영했다. 이관술은 경성에 나가 있는 울산 출신 인사 중 가장 고위급 인물이었다. 1943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입암마을에서 요양하다 탈출한 뒤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상전벽해로 상황이 바뀌었다. 

 

▲ 경남지역 인민위원회 통치권(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조사 결과 보완)

 

▲ 인민위원회 통치행사지역(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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