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게임

오영애 울산환경과학교육연구소 대표 / 기사승인 : 2021-05-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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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1964년 <완구점여인>으로 등단, 소설가의 대모라고 불리는 오정희의 단편소설집이다. 1996년 오영수문학상 수상작인 <구부러진 길 저쪽>, 197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저녁의 게임>, <중국인 거리>, <동경> 등 11편의 중단편이 실려있다. 


<중국인 거리>는 글을 쓰고 있거나, 쓰고 싶은 사람들이 소설의 문장과 구성, 작가의 생각과 표현의 의도를 몸으로 익힐 수 있도록 체험하는 필사의 텍스트로 유명하다. 


“큰 덩치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일종의 적의로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언덕을 넘어 선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언덕은 섬처럼 멀리 외따로 있었으며 갑각류의 동물처럼 입을 다문 집들은 대개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다소 비장하게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중국인 거리> 87쪽)


낯선 곳에 도착한 소녀가 느끼는 중국인 거리의 모습이다. 혹시 지금 눈앞에 어떤 풍경이 보인다면 풍경에 나의 마음을 담아 한 번 써보고 싶지 않은가? 


오정희 작가는 여성의 몸, 삶, 인생을 깊고 예리하게 들여다본다. 그래서 여성 화자가 많이 등장하고, 전쟁과 산업화, 가부장적 억압을 몸으로 겪은 여성들의 내면에 새겨진 상처의 무늬를 보여준다. 사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얘기로 시작하지만 독자를 일상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 존재의 심연으로, 역사의 현장으로 이끈다. 그리고 마지막엔 문학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만든다. 


<구부러진 길 저편> 내용 중 어머니와 사생아 딸이 각각 자신의 공간에서 느끼는 소외의 감정은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내면 풍경을 닮은 것 같아서 인용해 본다.


“잇몸에 조그만 벌레들이 기어가는 것처럼 근지러웠다. 잇몸뿐이 아닌, 몸 안의 어디랄 것도 없이 깜짝 놀란 작은 벌레들이 핏줄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조바심 나고 근지러웠다. 뭔가 한없이 안타깝고 서러운 느낌들이 빈 부대처럼 텅 빈 몸을 채웠다. 입을 한껏 벌리고 입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엇이든 쉬지 않고 말하고 싶었다. 


인자는 전화기를 끌어당겨 번호판을 눌렀다. 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난가을 서울에 와서 처음 백화점 포장부에서 일을 할 때, 은영도 그랬었다. 대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창고에서 포장일을 하노라면 하루종일 거의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는 때가 많았다.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이면 아무런 목적 없이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노선을 바꿔가며 타고 다니거나 걸어 다녔다. 돌아와서는 죽은 듯 쓰러져서 잠이 들곤 했다. 어떤 목마름, 세상 속에 속해 있지 못하다는 외로움, 사람들과 몸 부딪치며 살아가는 일상적 삶에의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영애 울산환경과학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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