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는 친일파

정익화 울산생활과학고 교사 / 기사승인 : 2021-04-20 0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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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여행

퐁당퐁당 돌을 던져라 누나 몰래 돌을 던져라/ 냇물아 퍼져라 멀리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러 주어라


우리가 즐겨 부르던 ‘퐁당퐁당’이라는 예쁜 노래입니다. 이 밖에도 ‘고향의 봄’, ‘햇볕은 쨍쨍’,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봄처녀’, ‘사랑’ 등 숱하게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작곡한 난파 홍영후가 친일 행위를 한 음악가라는 사실이 먹먹하기만 합니다.


‘왜 그랬을까, 잘못 알려진 사실일까, 기껏 한두 곡 일본을 위한 노래를 만들었을 뿐인데, 일본의 위협에 못 이겨 친일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본명 홍영후보다 예명으로 잘 알려진 음악가 홍난파는 한국 근대음악사에서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 최초의 음악 잡지 발행, 최초의 관현악단 조직 등 탁월한 활동으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하는 <친일조사보고서> 명단에 올랐다가 유족이 명단에서 빼달라는 행정소송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는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을 비난하면서 홍난파의 음악이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과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면서 ‘단지 일제의 강요에 의해 몇 편의 군가를 작곡했다’고 그를 옹호했습니다. 


홍난파의 친일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수양동우회’ 사건입니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단체로 이광수,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등에 의해 결성된 단체입니다. 홍난파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시점은 대략 1937년 6월이고 ‘조선문예회’가 창립했던 시기는 5월입니다. 


조선문예회는 총독부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상황에서 총후보국(銃後報國)(전선에 대한 후방기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레코드, 연극, 영화, 건전가요 등을 통한 국민 교화를 목적으로 황민화 과정에서 설립된 관변단체입니다. 


홍난파는 총독부 학무국의 지시로 만들어진 조선문예회의 목적인 심전개발(心田開發)·정신작흥(精神作興) 운동이라는 미명 하의 ‘황민화’ 취지에 부응해 가입했으며, 이는 수양동우회 사건과 무관하게 친일로 돌아섰다고 생각됩니다. 


홍난파는 감옥에서 석방된 지 한 달 후인 9월 30일 부민관에서 매일신보 주최로 열린 애국가요대회에서 친일곡인 ‘정의의 개가’와 ‘공군의 노래’를 작곡하면서 본격 친일로 돌아섭니다. 사상전향서 제출 뒤에는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해 방송과 연주 활동을 통해서 군국가요를 창작 보급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1938년에는 ‘천황의 분부를 받들어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천하가 한 지붕이란 뜻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구호)로 아세아 공영권을 건설하여 일장기를 날리면서 자자손손 만대의 복 누릴 국토를 만들자’는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을 작곡했습니다.


각종 음악회에서 일본의 전쟁을 찬양하는 노래 연주를 지휘했고, 1940년에는 일본의 기원을 봉축하는 ‘순정의 꽃장사’를 작곡했으며 1941년에는 일본의 싱가폴 함락을 축하하는 행진가인 ‘이겼다, 일본’을 작곡하고 보급했습니다. 


일본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친일 활동을 했다고 항변하는 후손들의 강변이 씁쓸합니다. 목숨을 바치며 항일 운동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변명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공은 인정하고 잘못은 사과하는 태도가 더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조선음악 대부분이 극히 지완(遲緩)하여 해이하고 퇴영적이지만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동서양음악의 비교, 1936 홍난파) 홍난파는 조선음악이 서양음악보다 뒤떨어졌다는 인식으로, 서양을 맹목적으로 따라 하는 편중된 음악관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서양 기술을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시대사조이기도 했지만 친일 행위와 상관없이 일방적인 추종이 강한 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홍난파의 작품들에는 친일 성향을 떠나 서양음악의 요소가 너무 짙게 배어 있는데, 어느 정도 민요 등 전통음악과 접목해보려고 했던 김순남, 안기영 등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홍난파의 흉상은 경성중앙방송 관현악단을 조직한 활동 등으로 1968년에 남산 KBS 사옥 앞에 세워졌다가 1976년에 여의도로 이전할 때 현재의 KBS홀 자리 맞은편으로 같이 옮겨졌으나 2003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홍난파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자 KBS 측에서 자진 철수해 2004년부터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살던 집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원래 이 땅은 대한제국 시기 항일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영국인 베델(Ernest Bethell, 裵說, 1872~1909)의 집이었던 공간인데 베델의 집터에 세워진 서양식 벽돌집을 홍난파 가옥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야말로 항일의 터전을 친일파를 기리는 공간으로 격하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베델에 대한 설명은 없고 홍난파의 친일에 대한 설명도 전혀 없이 근대문화유산으로만 소개돼 안타깝습니다.

 

▲ 종로구 홍파동 살던 집에 옮겨 세운 홍난파 흉상. 원래 이 땅은 대한제국 시기 항일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영국인 베델의 집터였다.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88올림픽공원에 있는 홍난파 동상 앞에는 ‘음악계의 선구자’라는 홍난파의 업적과 함께 그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된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안내판에 홍난파의 업적만 쓰여 있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지적에 지난 2019년 9월 권선구가 친일 행적을 함께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동상은 크고 안내판 한구석에 친일 행적을 작게 써놓아 동상 자체만으로는 친일 행적을 알기 힘들고 그냥 위대한 음악가로만 인식됩니다. 

 

▲ 수원시 권선구 88올림픽공원에 있는 홍난파 동상

경기도의 한 절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친일 문학가로 확인된 이광수의 추모비가 있고, 단국대학교 죽전 캠퍼스에는 ‘난파음악관’이 있으며 ‘난파 홍영후 선생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화성시는 미당 문학관을 운영하는 전북 고창군을 비교하며 ‘고향의 봄 꽃동산 조성 사업’으로 생가 복원과 공원화 사업을 통한 관광 사업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음악적 성과와 더불어 친일 행적을 더하거나 빼지 말고 역사적 교훈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은데 수익 사업으로 활용하려는 발상이 안타깝습니다.


한편으로 국내 음악계 중 권위가 있다고 알려진 ‘난파음악상’을 거부하여 파문이 일어난 일이 있었습니다. 현대음악의 중요한 요소인 ‘불확실성’을 확립한 작곡가로 서울국제음악제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류재준 씨는 홍난파를 기리는 2013년 ‘난파음악상’ 46대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친일파 음악인 이름으로 받기 싫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1987년 독립기념관 입구 ‘광복의 동산’에 세워진 ‘홍난파 선생과 감나무’란 비석이 철거 요구에도 그대로 존치해, 201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 옆에 단죄문을 설치했습니다. 광복의 동산에는 유관순 열사의 감나무, 윤봉길 의사의 은행나무, 한용운 선생의 향나무 등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나무와 비석이 짝을 지어 방문객을 맞고 있는데 홍난파의 비석이 왜 들어갔는지 궁금합니다.


경기도는 친일 작곡가 이흥렬이 작곡한 ‘경기도가’를 폐지하고, 도민 참여로 새 경기도 노래를 만들어 지난 1월부터 부르고 있습니다.


정익화 울산생활과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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