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울산-울산365경> 토건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유쾌한 곳-새납마을

이민정 시민 / 기사승인 : 2022-04-25 00: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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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나간 4월 10일은 날씨가 무척 화창했다. 가는 곳마다 벚꽃이 우수수 떨어졌다. 꽃잎이 흩뿌려진 차도는 차바퀴에 으깨진 꽃잎이 아스팔트 모공 사이로 껴들었고, 보도 아래 노견에 소복이 쌓인 꽃잎들은 발을 헛디디게 했다. 사람들은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비슷한 장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었다. 벚꽃 흩날리는 계절은 일종의 관습이 된 듯하다. 경쟁하듯 심어대는 벚꽃 가로수가 만들어낸 풍경과 먼지처럼 날리는 꽃잎의 낭만은 이제 클리셰가 됐다.


동구 서부동과 남목2동 사이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가면 서부초등학교 앞 오거리에서 학교 앞으로 난 얕고 좁은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왕복 2차선의 이 도로명은 ‘새납길’이다. 대부분 초등학교들이 채도 높은 원색으로 알록달록하지만 이 학교는 다른 의미로 흥미롭다. 파스텔 색상을 섞어놓은 건물 뒤로 동산보다는 크고 산이라기에는 작은, 어쨌든 건물보다 더 높게 불쑥 오른 이등변삼각형 꼴이 좋은 느낌을 준다. 학교보다 더 강한 이미지인데 학교를 누르는 게 아니라 품고 있는 것 같다. 자연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정문 건너편에 어린이쉼터가 있다. 무슨무슨 쉼터라 붙은 것은 많이 봤지만 어린이쉼터는 처음 본 것 같다. 그 뒤로 산을 옹벽처럼 떠받치고 있는 굉장히 큰 바위덩어리가 있는데 쪼개질 일이 없을 듯 견고해 보였다.


학교를 끼고 왼쪽으로 굽은 도로를 가면 학교 울타리가 끝날 무렵 ‘판자촌은 여기부터입니다’를 보여주듯 허름한 집들이 나온다. 아주 어릴 때 반 아이가 계속 결석해서 선생님과 그 아이 집에 간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인 것 같다. 학교와 멀리 떨어진 아파트단지 뒷산으로 들어가서 움막 같은 집을 보고는 무작정 눈물을 터뜨렸다. 아직도 생생한 장면은, 합판으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그 집 내부는 신문지로 발라놨는데, 빛이 누렇게 바랜 신문지로 투과돼 집안은 컴컴한 누런빛이었다. 그 집들을 보는 순간 어릴 적 그 기억이 소환됐다.

 

▲ 새납마을 진입로에 있는 서부초등학교..©이민정 시민기자

 

▲ 서부초등학교 맞은편의 어린이 쉼터. 그 뒤로 거대암벽이 있다.©이민정 시민기자

 

▲ 새납마을 입구의 오래된 집.©이민정 시민기자

 

▲ 건물 사이의 간격이 5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그 너머로 주민이 보인다.©이민정 시민기자

 

▲ 동네에 백구가 많은데, 사람을 좋아한다. 성경식 작가를 탐색(?)하는 백구. 개 주인은 괜히 안절부절이다.©이민정 시민기자

 

▲ 사람이 떠난 지 아주 오래되진 않은 집 같다. 제주도처럼 지붕이 무척 낮다.©이민정 시민기자

 

▲ 파란 대문 집.©이민정 시민기자

 

▲ 동네 어르신이 마을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신다.©이민정 시민기자

 

▲ 모든 게 낡았지만 전봇대는 새것이다.©이민정 시민기자

2013년이었던가, 고등학교 때 배구 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다가 서울의 한 대학에 스카우트돼가자마자 어깨를 다쳐 학교에서 퇴출된 학생이 강의하고 있던 학교에 입학했다. 신입생들보다 두어 살이 많았는데, 선수 시절 세터를 맡아 리더십이 뛰어났던 그 학생은 우리 학교에서도 교수나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학회장으로 선출된 봄에 갑자기 학교를 그만뒀다. 부모 없이 조부모와 함께 사는데, 방학 내내 벌었던 학비를 할머니 병원비로 쓰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학비를 대신 내주고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게 해줬다. 그해 겨울, 이 녀석이 심하게 아파 응급실에 갔다가 보호자가 없어 입원을 못 하고 있었다. 경산까지 가서 내가 보호자로 입원시킨 뒤 다른 학생과 그 아이 집에 병원에서 쓸 물품들을 가지러 갔다가 무릎에 힘이 빠졌다. 어르신들과 학생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 아이가 사는 집은 온기 없이, 축사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담하다. 집으로 되돌아오면서 제법 많이 울었다.


가파른 곳의 비루한 느낌이 이유 모를 불안감이나 슬픔 같은 것이 아닌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하는 단순한 놀라움이었다. 토건 세력들이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집들은 가파르게 경사진 곳으로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지도상으로 열 가구가 있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집 너머 나무 사이로 현대식 스포츠클럽 건물이 보인다.


도롯가의 첫째 집에는 버릴 만한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시멘트로 대충 만든 계단은 그날 아침에도 비질을 한 것처럼 깔끔했고, 낡은 여러 개의 화분은 질서를 갖추고 푸른빛을 이고 앉아 계단에 운치를 더했다. 성경식 작가에게 이게 다냐 물으니 이제 시작이란다.


제법 경사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오르막길 왼쪽은 산이고 오른쪽의 키 낮은 시멘트옹벽에는 색이 벗겨진 벽화들이 가득하다. 마을 안쪽 끝까지 벽화는 계속 이어진다. 삼거리 초입 오른쪽에 열세 가구가 있고, 녹슨 운동기구가 가득한 왼편으로 새납경로당과 주택 10여 채가 있다. 이 주위로 텃밭이 제법 크게 자리를 차지한다.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면 성불사약수암이라는 작은 암자까지 주택이 사십여 채가 있는데, 빈집인가 하면 인기척이 있었다. 아무리 허름해도 확실히 빈집이다 장담하기 어려웠다. 삼거리 초입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 왼쪽으로 난 등산로로 가면 열세 채의 건물이 있다. 이쪽은 주택보다 공장이나 사무실로 보였다.


마을 안쪽으로 가다 보면 새납마을에 대한 소개 간판이 있다. 1972년 3월 현대중공업이 건설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숙소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염포산 중턱에 판잣집을 지으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새납’은 태평소, 날라리를 일컫는 이북(以北) 말로, 나팔 모양의 전통 관악기를 말한다. 초창기 정착민들이 마을 모양새가 새납 같다고 새납마을이라 이름 붙였다 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울산시가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지원하고, 2019년 마을공동체에서 벽화 그리기를 시작하면서 지금 모양새를 갖췄다. 1990년대 이전에는 수십 년 전 어린 내가 놀라 울고 9년 전 중년의 내가 기가 막혀 울었던 모양새였을 것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런 안내판을 만들 때 제발 문법과 맞춤법 좀 맞추자.

 

▲ 지붕색이 모두 같은 가운데 마을회관이 보인다. ©성경식

 

▲ 폐지가 잔뜩 담긴 전동수레.©성경식

 

▲ 줄기에 날카로운 가시가 아름다운 꽃망울을 머금다.©성경식

 

▲ 마당에 널린 빨래는 언제 봐도 정겨운 향수가 인다.©성경식

 

▲ 풍선 매단 오토바이.©성경식

 

이 동네는 방문객에 익숙한 듯 보였다. 벽화마을로 유명세를 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기 때문이고, 비루함에 아름다움을 얹을 계기가 됐을 것이다. 촬영을 나가면 대체로 내가 말을 거는데, 이 마을에서는 먼저 말을 걸어왔다. 두 부류다. 뭐 하는 사람이냐, 로 시작해서 이런저런 잡담하는 하나, 마을의 부동산 소유자거나 자가용을 타고 와서 텃밭을 가꾸는 이들의 경계심 하나. 의도를 갖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모자라 보이는 것이다. 사기를 칠 때는 허세가 먹히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을 땐 이것만 한 상책이 없다. 다행히 내 첫인상은 대체로 허술해 보이고 ‘없어 보이는’ 편인데다 뚱뚱해지고 난 이후로는 경계심이나 긴장을 더 잘 늦추는 경향이 있다. “아, 저희는 사진 배우는 학생들인데요, 여기가 사진 찍기 좋다고 해서 왔어요.”하면 지금까진 잘 ‘먹혔다’. 나이 먹어서 그런 거 배워두면 좋지, 나도 했는데 하다가 그만뒀어, 여긴 찍을 데가 많아서 좋지, 등등 격려를 받았다. 때에 따라 ‘울산저널’에서 나왔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 어르신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오랜만에 인물사진을 찍었다. 어떤 어른은 저 위로 가면 분재하는 집이 있는데, 꼭 가서 올라가 보라며 안내해줬다. 이 마을은 다 쓴 연탄도 예쁘게 쌓아 놨다. 폐자재들도 가지런히 정리해뒀고, 마구 버린 쓰레기가 없었다. 폐지를 잔뜩 담은 전동수레도 소품처럼 위치했고, 풍선 벽화 아래 오토바이는 설치미술 같았다. 깨진 욕조는 대형 화분으로 활용됐고, 비둘기호 열차가 그려진 벽화는 이 마을 시간을 은유하는 듯했다.


이 동네에서 눈에 띄게 ‘새것’인 것이 세 가지 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연파랑으로 통일된 지붕이 판자촌이란 서글픔을 지웠다. 현관문은 대체로 새것으로 교체했고, 전깃줄로 어지러운 전봇대는 깔끔했다. 성 작가에 따르면, 처음 마을이 형성됐던 당시 전기가 종종 끊어져 마을에서 발전기를 돌리기도 했단다.

 

▲ 재활용품 수거장인 것 같은데 나름대로 정돈이 느껴진다.©손방수

 

▲ 화분으로 사용되는 욕조.©손방수

 

▲ 비둘기호 열차가 그려진 벽화.©손방수

 

▲ 새납마을의 골목길.©손방수

 

▲ 다 쓴 연탄이 가구처럼 쌓여 있는 판잣집.©손방수

 

▲ 동네 어르신의 망중한.©손방수

 

▲ 새납마을 유래를 알려주는 설명판.©손방수

또 눈에 띄는 점은 대문을 파란색으로 칠한 집이 많다는 것이다. 유난히 새파란 대문이 하나 보였는데, 카메라에 담으면서 김기덕 감독의 1998년 작품 <파란 대문>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졸업의 학벌이라 은수저, 금수저, 다이아몬드수저, 심지어 흙수저 영화인들에게 무시당하고, 해외에서 상 받으며 유명세 탔다가 ‘미투’ 운동으로 매장당하고, 러시아에서 재기하려 했더니 코로나에 걸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김기덕 감독을 나도 싫어했다. 같이 작품을 한 적은 없지만 할 뻔한 적은 있었다. 영화인들의 술안주로 그 감독이 종종 올라왔는데, 언제나 그의 부도덕한 성적 탐닉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작품 중 <섬>(2000)과 <나쁜 남자>(2002)에서 열등의식에 따른 여성 비하에 크게 실망하며 역겨움을 느낀 적 있다. 자칭 페미니스트라던 그가 그런 문제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더니 그로 인해 매장돼버린 것은 ‘인생무상’적 아이러니다.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1988)를 읽고 좋아했던 이외수 작가의 <들개>(1989) 이후로 더는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거기에도 김기덕의 여성에 대한 열등의식과 그에 따른 여성폄훼 정서가 있다. 종종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알고 보니 그 둘이 절친한 사이라더라, 다. 길게 정리하는 이 문장들이 이미지로는 찰나라는 점이 언제나 흥미롭다.


새납마을의 근원이 어디에 있든 지금은 흥미로운 장소다. 이곳 주민들은 살기 힘든 곳이란 말을 하지만 거기에는 한숨이나 한탄보다 유쾌한 현실 인식이 있다. 그들의 삶을 위해선 건드려야 할 부분이 많지만 영화인으로서 욕심은 그대로 보존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제대로 개선은 해주되 토건 세력의 이기적 진입은 막았으면 한다.


이민정 시민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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