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 기사승인 : 2021-04-12 00:00:41
  • -
  • +
  • 인쇄
기획

기획 연재에 들어가며

다가오는 4월 26일은 1930~40년대 국내 항일 독립운동에서 손에 꼽히는 독립운동가 이관술이 태어난 지 아흔아홉 해가 되는 날이다.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후반기 강압 통치가 극에 달할 때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며 항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해방 직후 첫 정치 여론조사에서 ‘가장 역량이 뛰어나고 양심적인 정치가’를 뽑을 때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다섯 손가락에 들 만큼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이관술이란 이름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어였다. 해방 후 1년도 되지 않은 1946년 5월 미군정하에서 조작된 정판사위폐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수감됐기 때문이다. 이관술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후퇴하던 국군이 대전 형무소에 갇혀있는 사상범과 인근 보도연맹 민간인을 집단학살할 때 첫 번째 과녁이 돼 세상을 떠났다.


이런 비극을 우리 현대사 속 독립운동가가 겪은 수많은 아픔 중 하나로 넘기기엔 상흔이 깊다. 더구나 후손들이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조심스럽게 세웠던 독립운동기념비마저 광기 어린 이념 갈등으로 뽑혀 땅속에 묻힌 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이관술 1902~1950> 이란 제목의 평전이 발간된 후 지난 15년간 이관술을 알게 된 후인들이 하나둘 모여 여러 노력을 하고 있지만 온전한 명예회복은 아직 멀기만 하다. 


내년이면 이관술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된다. 필자는 같은 울산사람으로서 비명에 세상과 작별한 뒤 70년을 넘은 과거 그의 삶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처음 알게 된 독자들을 배려하며 최대한 진중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풀어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미 이관술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읽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진심을 담아 전달하고자 한다.
 

▲ 이관술, 일제강점기 감시대상 인물 신상 카드, 1933년, 서대문형무소

울릉도에서 태어나 입암마을로

울주군 범서읍 입암마을은 우뚝 서 있는 선바위 옆으로 태화강 물줄기가 휘돌아 흐르는 비옥한 땅이다. 곳곳에 줄기와 가지가 검은빛을 띠는 곰솔이 밭을 이루던 땅에 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로 짐작된다. 그리고 18세기 중반부터 학성이씨 집성촌이 만들어졌다. 학성이씨는 충숙공 이예가 시조로 울산이 본토이고, 농소파 10세손 송옹 이원담(1683~1762)이 입암마을 입향조가 된다. 이원담은 구강서원 원장을 지낸 지역 문사다. 선바위 뒤편에 있는 용암정이 학성이씨 문중 소유로 이원담을 추모하는 공간이자 마을 서당으로 사용됐다. 

 

▲ 선바위와 입암마을 앞 태화강

이관술은 농소파 18세손이니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제다. 할아버지 이석도와 아버지 이종락이 이주해 살던 울릉동에서 1902년 4월에 태어났다. 아명은 나무와 바다를 뜻하는 수해(樹海)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호적에 관술(觀述)로 이름을 올렸다.


입암으로 돌아온 때는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했던 1905년 무렵으로 짐작된다. 돌아와 거주한 집은 입암리 237번지에 위치한 기와집이었다. 울릉도에 떠나 있었지만 집안에서 이어온 밭과 임야가 적지 않아 가난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척박했던 섬의 삶보다 넉넉한 육지 생활이 반가웠을 수 있다. 


이관술은 육지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어머니와 사별하게 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입신학당(입신학교)을 다녔다. 수업이 없을 때는 또래들과 어울려 선바위 꼭대기까지 올라 강으로 뛰어들 만큼 담력도 커져갔다.

▲ 선바위 뒤편 언덕에 자리한 용암정

배움의 길을 좇아 동경 유학까지 . 


이관술은 또래들보다 글을 깨우치는 속도가 빨랐다고 한다. 할아버지 이석도가 한학에 뛰어났던 것도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이관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친척들이 말하길 입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배움의 깊이가 남달랐다고 한다. 


입신학교는 자세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종전까지는 이관술이 근대교육 대신 마을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깨우쳤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울산교육청이 2019년부터 울산교육 독립운동 TF팀을 꾸려 연구조사를 해오다 최근 이관술의 공립학교 졸업대장을 발견했다. 바로 울산간이농업학교 4회 졸업생 명부 속에 아명 이수해로 적힌 기록을 찾은 것이다. 거기에 보면 이전 학력 칸에 ‘입신학교’가 분명하게 적혀 있다. 


입신학교에 대한 자료는 부족하지만 1910년 11월 9일 경남일보 신문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직원 6명에 학생 수는 45명으로 나온다. 아마 그 속에 이관술도 포함돼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교 위치는 용암정 부근을 마을 사람들이 ‘강당’으로 불렀던 것에서 대략 그 근처로 가늠할 수 있다.
입신학교는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 사립학교규칙이 제정되면서 전국 2000여 개 사립학교가 잇달아 폐교할 때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당국은 사립학교가 공립학교를 대신해 민족계몽에 힘쓰는 근대교육을 펼치자 통제에 들어갔다. 사립학교가 문을 닫자 학업을 잇기 위해 공립보통학교에 재입학한 학생들이 있었다. 울산동헌 객사에 세웠던 ‘울산공립보통학교 졸업대장’에서도 입신학교 출신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관술은 보통학교 재입학 대신 2년제로 중등교육을 했던 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했다. 하지만 상급학교인 고등보통학교 입학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집안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아버지 이종락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종락은 진학보다 결혼을 서둘렀다. 그래서 1921년 경주 외동에서 태어난 박가야와 부부의 연을 맺고 난 뒤에 당시 경성부 종로 수성동에 있었던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 출처: 울산교육청, 울산간이농업학교 4회 졸업대장

중동고보 재학시절 동급생들보다 서너 살 많은 나이 차도 있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기에 상위권 성적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그 배움을 계속 이어갈 마음을 품고 전문학교까지 준비했다. 1925년 3월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최고의 인재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지원해 합격한 것이다. 조선인 학생이 입학하려면 동경제국대 못지않게 어렵다는 학교였다. 전신인 동경사범학교(1872)부터 따지면 공립 전문학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 


그런데 최종 합격이 발표될 때까지 이관술은 집안에 비밀에 부쳤다. 이유는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 입학시험조차 치지 못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합격 소식을 듣고도 이종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축하보다는 상의 없이 시험을 쳤다는 것에 큰 성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이관술의 뜻이 관철된다. 주변에서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인사가 이어졌고, 좋은 학교를 포기하면 안 된다고 이종락을 말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안 어른들과 학성이씨 문중에서 유학자금을 거두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자 이종락도 마냥 반대만 할 수 없었다. 식민지 청년 이관술이 걷고자 했던 배움의 길은 동경 유학으로 매듭지어진다. 

 

 

▲ 범서 입암마을 이관술 생가, 지금은 외지인이 구입해 살고 있어 집에 출입이 안 된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