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晩醒) 김지환과 석남(石南) 송석하의 자취를 좇다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 기사승인 : 2021-12-06 0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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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 100리 길 탐사(8)

울산 최초 면지 <헌남> 


헌남계(巘南契) 계장 김지환 등이 주도해 1975년에 간행한 <헌남>

<헌남>은 상북면의 연혁을 위시해 전근대의 유사를 문면(文面)으로 간추리고, 현재의 발전상을 분야별로 집약해 한 권의 향토지를 간행하여 널리 소개하고, 애향심의 발휘와 협동 단결하는 데 일조가 되며 후일의 발전에 보태어 도움이 되기 위해 발간했다.


박재완이 서문에 쓴 ‘김지환 님이 본지 발행을 제안하고 그 편찬에도 수고가 많았다’는 기록과 함께 김지환 본인도 편집 후기에서 ‘헌남계의 뜻을 받들어 감히 집필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따라서 그는 ‘서문’, ‘발간에 기(寄)함’, 그리고 ‘등산 안내’를 제외한 분야를 모두 집필한 것을 알 수 있다. ‘취지’는 헌남계가 집필했다고 기록돼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가 집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간 연도는 1975년이다. 그러나 발간한 달[月]에 대해서는 ‘편집 후기’에는 음력 3월, ‘취지’에는 4월, ‘발간에 기함’에는 7월, ‘서문’에는 7월 24일로 각각 다르게 기록돼 있다.
 

▲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만정헌에서 탐사팀. 이곳은 김지환 전 상북면장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울산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 문화재다. 약 500년 전에 처음 지어졌고 300년 전쯤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됐다. 사랑채의 오른쪽 부분이 화재로 그을린 흔적이 있고, 느티나무로 만든 다른 세 개의 기둥과는 달리 화마가 휩쓸고 간 맨 오른쪽 기둥을 소나무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


당시 상북면에 갓 편입된 소호리를 포함해 20개 자연 마을 대상

<헌남>의 수록 대상 지역은 상북면 산전리의 산전과 도동 등 20개 자연 마을이다. 이 중 소호리는 헌남계의 창립총회일로부터 불과 2개월 15일 전인 1973년 7월 두서면에서 상북면에 편입돼 다행히도 <헌남>에 등재됐고, 아마도 조사 과정에서 가장 힘든 지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상북면 길천리 충효사 숭의당 현판. 김지환 전 면장이 현판과 상량문, 승의당기를 모두 짓고 썼다. 충효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학산 박언복과 그의 아들 청수헌 박인립을 모신 사당이다.


약 130쪽에 불과해도 자전거와 손수레까지 등재한 <헌남>

등재한 항목은 상북면의 연혁을 시작으로 지세와 산세를 당연히 앞쪽에 배치했다. 통계 부분은 세대와 인구는 물론이고, 경지와 임야의 면적, 가축 현황, 씨족 분포, 교육 정도 등을 마을별로 도표로 작성했다. 특이한 것은 상북면에 등록된 10곳의 광구(鑛區)가 구체적으로 수록돼 있다는 점이다. 향교, 승지(勝地), 종교, 사찰, 사려재정(祠閭齋亭) 등은 물론이고, 풍속, 전설, 선행 등도 기록했다. 또한 언양 3.1 독립운동과 간략하지만 지명과 방언에 대해서도 기록돼 있다. 그중에서 주목할 점은 이규진이 가지산 등 5곳의 산에 대한 각각의 설명과 등산 지도를 상세하게 기록했다는 것이다.

 

▲ 상북면 거리 하동마을에 있는 양정학원 유허비. 이 비문도 김지환 전 상북면장이 짓고 썼다. 양정학원은 1920년 천도교 회관에 세운 사설학습강습소였다.


<상북면지>(2002)에도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헌남>

<헌남>의 존재는 1986년 <한국구비문학대계>에 기록돼 있다. 상북면의 설화 조사에서 당시 제보자였던 김지환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중에 “김지환은 1975년에 상북면 향토지인 <헌남>지(誌)를 프린트본으로 편찬 간행하기도 했다”고 했다. 또 2001년에 간행한 <언양읍지>의 참고문헌에도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울주군에서 발행했던 읍면지들 중 오직 <상북면지>에만 참고문헌이 기록돼 있지 않고, 연혁 편에 스스로 최초의 <상북면지>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발간 직전까지 <헌남>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면지 구색 갖추고, 울산 1970년대 살필 수 있는 귀한 향토지 <헌남>

1974년을 기준으로 당시로서 획기적으로 30여 항목에 대해 글과 도표로 자세하게 기록한 점은 면지로서 형식과 내용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된다. 특히 이천리 요지군(窯址群) 등 <헌남> 발간 후에 탐구해야 할 자료들까지 제시하고, 집필 후기까지 기록함으로써 최초의 면지로서 손색이 없다. 


<헌남>은 1960년대의 <경상남도 여지집성(與誌集成)>(1963)과 1980년대 <내 고장의 전통>(1982), <내 고장의 정기>(1983)의 중간 시기인 1970년대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울산 향토지로 평가된다. 이 향토지는 울산뿐만 아니라 상북면 인근 밀양시와 청도군의 1970년대 상반기 상황까지 미뤄 짐작해 볼 수 있는 값진 사료다.
 

▲ 김지환이 짓고 쓴 고헌사창건기실비.


<헌남> 발간했던 헌남계 37년 만에 막 내리고 최근 다시 발족

<헌남> 발행처는 헌남계로 1973년 9월 석남여관 특별실에서 향토(상북면)의 발전과 미풍의 함양에 일조(一助)가 되기를 목적으로 창립했다. 이 단체는 상북면을 중심으로 언양 3.1 운동 유공자 추모 사업 등 각종 문화 사업을 진행해 큰 성과를 거뒀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헌남계가 <헌남>을 간행한 후에도 상북면 향토지를 발간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한 점이다. 그러나 헌남계의 이 사업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2012년 4월 19일, 81차 계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최근 다행히도 재창립됐다.

한국민속학 개척자 송석하

상북면 양등리에서 태어나 언양공립보통학교 거쳐 울산공립보통학교 졸업

송석하 선생은 1904년 10월에 울주군 상북면 양등리에서 태어나 광복 후 3년 후인 1948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12년에 언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현재의 언양초등학교다. 이듬해인 1913년에 중구 반구동으로 이사했다. 그는 그해 4월에 울산공립보통학교 전학해 1916년 이 학교를 졸업했다.

 

▲ 상북면 양등리에 있는 송석하의 아버지 송태관 재실 영모재.

부산공립상업학교 거쳐 동경상과대학 입학했으나 학업 포기

1917년 4월 부산공립상업학교 합격함으로써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울산을 떠나 생활하게 된다. 1920년 3월에 이 학교를 9회로 졸업했는데, 함께 졸업한 동창생은 모두 33명이었다. 


그 후 일본에 있던 동경상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1923년 9월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관동대지진의 충격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5년 봄에 경북 경주 백률사(栢栗寺)에서 심신의 상처를 달래며 기거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관동대지진 때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충격을 달래고, 학업을 포기한 자신의 앞길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정인섭 등과 함께 조선민속학회의 창립과 학회지 <조선민속> 창간

그의 나이 29세인 1932년 4월에 그와 정인섭, 손진태, 그리고 일본인 아키바 다카시, 이마무라 도모 등이 발기해 조선의 민속을 조사, 연구하기 위한 조선민속학회를 창립했다. 그의 민속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듬해 학회지 <조선민속>까지 창간했지만 1934년 2호, 1940년 3호 발간 후 종간됐다.
 

▲ 1997년 울산광역시 출범을 기념해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석남 송석하전 포스터.

 

▲ 송석하가 창립해 회장으로 추대된 조선산악회 활동.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송석하다.


최현배 등과 진단학회 창립, 위원장 추대

1934년에 조선과 그 인근 지역의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한 진단학회를 창립해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그는 <진단학보> 제1호와 제2호에 논문을 각각 1편씩 발표했다. 이때부터 <조선민속> 3호가 간행된 1940년까지 해마다 약 10편의 글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조선산악회 창립, 한라산 등 대대적인 학술조사와 전시회 개최

광복이 되고 한 달 후인 1945년 9월 조선산악회를 창립해 회장으로 추대됐다. 한라산, 오대산, 태백산 등으로 학술조사대를 파견했다. 특히 울릉도, 독도에 파견할 때는 인원이 무려 65명이었다. 학술반을 사회과학 A.B반, 동물반, 식물반, 농림반, 지질.지리.광물반으로 나눴다. 편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의무반, 전기.통신반, 사진.보도반까지 갖춘 요즘의 어느 조사단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현지조사단이었다.

 

▲ 진단학회 회원들의 글씨. 송석하는 최현배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국립민족박물관 설립과 관장 취임

1945년 국립민족박물관을 설립해 관장으로 취임했다. 이 박물관이 그가 평생 전국을 쫓아다니며 수집한 민속자료와 독일제 카메라로 찍어 둔 사진자료가 모여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의 모태가 됐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친일 행적 없는 한국민속학의 개척자

이렇게 한국민속학에 필요한 모든 구색을 갖춰 놓은 그를 한국민속학의 개척자라고 평가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런데 송석하 선생의 친일 행적이 있다며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어 울산 북구문화원에서 민족문제연구소에 질의한 결과 그런 사실이 없다는 공문을 정식으로 받았다. 


글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사진 김정수 사진작가/ 사진글 조은미 시민기자

※ 이 글은 울산민관협치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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