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 차별, 처벌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 기사승인 : 2021-12-07 00: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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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이 무산됐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30일간의 발걸음 72만 보와 10만 국민 청원을 국회는 ‘심사기한 연장’으로 간단히 처리해버렸다.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집단과 차별의 사유를 “사회적 합의”로 정할 수 있는 것일까? 


며칠 전, “나쁜 평등법” 슬로건을 보았다. 차별금지법 반대 슬로건이라 생각도 못 했는데, 슬로건 아래 ‘남자가 여자 목욕탕에?,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라는 문장을 보자마자 “나쁜 평등”을 외치는 주체가 누군지, 무엇이 “나쁜 평등”이라는 건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차별의 해로움은 누구나 알기에 차별금지를 반대한다는 말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평등의 가치는 존중하되 문제의 소지가 있는 평등이 있는 것처럼 레토릭을 만든 것은 아닐까? 아니면 평등 자체를 나쁘다고 호도해 자유의 가치, 표현의 자유, 즉 차별할 자유를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혼자서 이런저런 이유를 짐작해 보다가 너무나 명약관화한 주제에 합의 따위를 갖다 붙이는 현실이 답답해져 생각을 멈췄다. 


학창 시절 사회 시간에 배운 천부인권, 동학의 인내천, 천주교의 박애 등만 보더라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명제는 정언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사실 특정 집단의 차별금지법 반대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니 진지한 대화는 무용할 것이라 여기곤 했다. 그리고 차이가 차별이 되는 현실에서 (비겁하지만) 차이를 부각하는 정체성의 정치가 효과적일까 회의적일 때도 많았다.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태도를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는 걸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는 것, 예를 들어 여전히 남녀의 신체적, 심리적 차이를 이유로 여성은 돌봄노동에 최적화돼 있으므로 고용에서의 차별과 배제를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며 차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폭력의 역사를 목도한 바, 개인의 차이를 부각하면 언제든 우생학의 불씨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다. 장애를 가진 몸과 장애를 갖지 않은 몸의 우열을 생각해보면서 사회가 정의하는 건강과 장애의 기준은 무엇인지, 은연중에 우리는 사람을 쓸모 여부로 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깊은 고민에 빠질 때면 손쉽게 차이를 무시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럼에도 개인과 집단 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의 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차이, 차별, 처벌>은 사회의 역할, 즉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다. 이 논의가 여전히 필요한 작금의 현실이 개탄스럽기만 할 따름이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은 거스를 수 없는 미래임이 분명하다.


2019년 1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울산저널에 페미니스트 교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서평을 이어왔다. 3년간 읽고 썼던 글들은 여성에 대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글이 아닌 혐오와 차별, 폭력에 대한 글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리고 3년의 시간 동안 사회는 조금씩 변화했고, 그 변화의 물결에 조금이나마 동참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동안 부족하지만 일개 페미니스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준 울산저널 독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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