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조작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주범이란 누명을 쓴 이관술

배문석 / 기사승인 : 2021-11-08 0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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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4)

미소공위와 미군정의 좌익 약화, 평정 기도

미군정이 한반도에서 설정한 목표는 확고했다. 친미 정권을 세우기 위해 좌익을 공격하고 우익을 앞장세우는 것이다. 남북한 강제 분단을 넘어 단일한 친미 정권을 세울 수 없다면, 남한에 한정하더라도 관철할 목표였다. 


이를 위해 1945년 말부터 시작해 해를 넘겨 번져갔던 ‘신탁통치 찬반 분열’에서 실제 미국이 노렸던 장기간 신탁통치 입장을 감추고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을 공격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이승만의 독촉중앙회의, 친일파가 대거 포진한 한국민주당도 모두 미군정이 그려놓은 밑그림의 방향에서 조정대상이 됐다. 


1946년 2월 23일 미군정 법령 제55호 ‘정당등록법’을 강행하고, 미소공동위원회 진행 기간 우익 진영을 앞세워 각 지역 인민위원회를 공격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친일 또는 부역자로 채워진 미군정 경찰 관료들은 충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 어떤 경우는 미군정에 파견된 미국 관료들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우익 단체들의 뒷배가 됐다.

이른바 ‘정판사’에서 지폐를 위조했다는 미군정 발표

1946년 5월 하순에 벌어진 이른바 ‘정판사 위폐사건’이라는 조작사건은 미군정이 벌인 공격의 정점이 됐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시작으로 조선공산당에 대한 물리적 탄압을 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균열을 내고, 대중의 지지를 지우기 위해 매우 악랄한 조작사건을 기획한 것이다. 


미군정은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며칠 뒤 잇단 검거로 소문이 나기 시작한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공식 발표했다. 바로 1946년 5월 15일이다. 미군정 공보과를 통해 수사를 진행한 제1관구경찰서의 진상보고를 언론에 배포했다. 


“삼백만 원 이상의 위조지폐로써 현 조선일대를 교란하던 지폐위조단 일당이 일망타진”됐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폐위조단에는 십육 명의 인물이 관련되었는데 조선공산당 간부 2명, 조선장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 십사 명”이라고 밝혔다. 


또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 소재지 근택빌딩은 조선공산당 본부”라고 위폐 제작 장소를 특정했다. 아직 체포되지 않은 사람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 40세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45세”라고 이름을 밝혔다. 


미군정 경찰이 지폐 위조과정에 참여했다고 주장한 정판사 관련자는 “사장 박낙종(47), 서무과장 송언필(46), 기술과장 김창선(36), 인쇄과장 신광범(41), 평판기술공 정명환(30), 김우용(26), 이정환(18), 김영관(25), 홍계훈(31) 염공 이한녕(39), 공장장 안순규(50), 창고계주임 박상근(43), 재무과장 이정상(46), 평판수술공 김우종(26), 김영룡(25), 김상선(32)”이다. 이들이 훔친 조선은행권 평판을 사용해 위조지폐를 인쇄했는데 ‘용지는 일본제품이었고, 최초 출판 전에 인천부두에서 훔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1945년 9월 일제강점기 백 원 지폐를 인쇄하는 평판을 조선은행에서 조선정판사로 이전했는데 행방불명된 9개 평판을 경찰이 찾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조사해보니 근택빌딩 지하실에서 지폐인쇄 염료와 잉크 등 재료를 발견해 전모를 밝혔다고 했다.

첫 보도 <한성일보> 그리고 조작에 불을 지피는 우익언론

이른바 “정판사위폐사건”을 가장 빠르게 보도한 신문을 <한성일보>였다. 미군정 공식발표보다 일주일이 앞섰고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비교해도 2일이나 빨랐다. 이 신문은 1946년 2월에 창간한 타블로이드 신문으로 ‘동아’ ‘조선’과 함께 대표적인 우익 일간지에 포함된다. 창간호부터 ‘축 한성일보 창간 이승만’이란 휘호와 축사를 실었고, 미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의 축사가 더해졌다. <한성일보>에 이어 <동아일보> 역시 미군정 발표 보도를 시작으로 연일 머리기사로 실었다. 특히 아직 체포되지 않은 이관술과 권오직을 배후 인물로 단정하고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 1946년 5월 9일 정판사 위폐 조작사건을 첫 보도한 <한성신문>

 

▲ 1946년 5월 16일 <한성일보> “근택빌딩 위조지폐단의 전모”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체포돼 유죄를 선고받고 공산당 서울지부 사무실 등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5월 18일 미군 헌병이 조선정판사가 있던 근택빌딩을 포위한 뒤 건물 내부에 있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증서, 인장, 문서 등을 압수한 뒤 건물을 폐쇄한다. 5월 19일에는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발행도 중지시켰다. 5월 23일부터 서울지방법원 검사국이 조재천과 조홍섭 검사를 제1관구경찰서로 보내 사건을 지휘했다. 

 

▲ 조선공산당 당사가 있었던 근택빌딩, 이곳에서 기관지 <해방일보>를 인쇄했다.

 


이 사건에 대해 우익신문들이 조선공산당과 이관술 등 관련자를 ‘마수’라는 표현을 쓰며 ‘위조지폐범’ ‘희대의 죄악’으로 확정지었다. 반대로 <현대일보> 등의 신문은 ‘위폐사건’이 아니라 ‘조선정판사 사건’이라고 불렀다.

 

▲ 1946년 5월 17일 <현대일보> 이관술, 권오직 “소위 위조지폐사건에 관한 공개성명”


우익언론은 ‘모스크바삼상회의’ 오보와 ‘박헌영 외신기자 답변 왜곡보도’에 이어 정판사 사건을 통해 조선공산당에 대한 맹공을 펼쳤다. 특히 첫날 미군정 발표 때 ‘300만 원’이었던 금액이 뒤로 갈수록 900만 원, 1200만 원으로 늘어날 때마다 릴레이하듯 보도했다. 이는 미군정이 가장 원하는 그림이었고, 조선공산당을 가장 경계해온 한민당 등 우익세력은 이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성명, 집회, 거리연설, 전단지 등을 이용해 비난하는 선전을 하고 일부는 좌익계열 신문사를 습격하는 등 직접 공격도 벌였다.


조선공산당 성명과 이관술, 권오직 공식 입장 발표
 

▲ 1946년 5월 17일 <현대일보> 이관술, 권오직 “소위 위조지폐사건에 관한 공개성명”

조선공산당은 공식발표가 있은 직후 바로 부인하고 반박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입장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성명으로 발표했다. 성명은 경찰이 배후라고 지목한 ‘이관술 권오직 양인이 관계되었다고 (경찰이) 발표하였는데 이상 양인은 이 사건에 전연 관계없음을 단호하게 성명“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원과 간부들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고 발표한 것은 모략과 중상이라고 단언했다. 


아울러 박헌영은 미군정청에, 이주하는 제1관구경찰청을 방문해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도주 상태라 ‘체포장’이 발부됐다는 이관술과 권오직은 따로 직접 이름을 걸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제목은 ‘소위 위조지폐사건에 관한 공개 성명’이다. 


먼저 미군정 경찰의 발표를 하나씩 허위 날조라고 반박했다. ① 이관술, 권오직 두 사람은 전혀 범행을 한 적이 없다. ② 박종락 이하 대부분의 동지는 평소에 조선의 경제부흥을 위해 헌신적 사업을 해온 이들이다. ③ 근택빌딩 지하실에서 300만 원 대부분을 인쇄했다고 하는데, 조선정판사를 관리한 이후 지하실에는 단 한 차례도 인쇄기를 설치한 일이 없다. ④ 조선은행권 평판을 이관 중에 ‘행방불명’ 분실됐고, 경찰이 9개 평판을 발견했다 했으나 이 평판은 조선정판사에서 발견된 일이 절대 없다. 


아울러 경찰이 사건을 조작하는 이유에 대한 추정도 밝혀뒀다. “그러면 이러한 허위의 사건이 왜 발표되었는가. 이것은 조선공산당의 위신을 격하시키기 위하여 어떤 정치적 모략배의 책동에 의하여 발표되어진 것이다. 미소공위의 휴회를 계기로 하여 우익반동파는 백주에 테퍼단을 조직하여 공공연한 피격을 자행하고 가두에서는 공공연한 살인과 내란을 선동하고 언론자유를 악용하며 테러행동을 찬양 선전하는 등 실로 무질서혼란이 연발하며 서울의 동정은 참으로 소연한 바 있다”면서 이런 “허구 위조지폐 사건도 공격과 중상의 일부분으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 1946년 5월 20일 <동아일보> 근택빌딩 폐쇄, 해방일보 폐간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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