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포석보(柳浦石堡)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 / 기사승인 : 2019-01-23 19: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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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행

▲ 북구 정자동 바닷가에 있는 유포석보 ⓒ문화재청

 

북구 정자동 바닷가에 있는 유포석보는 중구 병영동에 있었던 경상도좌병영의 보조적 군사시설이었다. 이곳에서는 적의 침략이 있을 경우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하여 사령부인 경상좌병영에 보고하고 인근 주민을 대피시키며, 동시에 전투를 하는 소규모 성(城)이다. 현대 군사적 개념으로 하면 보(堡)는 중대, 그보다 상급 부대인 진(鎭)은 대대에 해당한다. 또한 보 주변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유사시 신호나 대포 소리를 통하여 주변의 주민과 인근 지역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 초까지만해도 울산에는 수영과 병영이 설치되었지만 경주에는 영천과 밀양 등지를 관할할 뿐 바닷가를 지키는 진(鎭)이 설치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지금 울산시 동구 주전동에서 감포까지 바닷가를 지키기 위해 유포석보가 설치되었다.


첫 번째 유포석보는 왜구를 막기 위해 1450년(문종 즉위년) 지금 자리에서 5리 떨어진 곳에 목책성(木柵城)으로 설치되었다. 울산에서 파견된 20명의 군인과 경주에서 내려온 30명을 2교대로 나누고, 도절제사의 군관 가운데 무략(武略)이 있는 자가 지휘를 맡도록 하였다.


그 후 세조 때 목책성으로부터 5리 떨어진 곳인 지금의 자리에 돌로 된 석보를 축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석보의 축조사업에는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므로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풍년을 기다리면서 더디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1459년(세조 5) 여러 고을 사람들을 부역으로 징발하여 지금 자리에 석성(石城)으로 완공하였다. 석보의 전체 둘레는 755m정도이며, 구릉 기슭의 낮은 평지와 계곡을 성안으로 삼고 그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현재 가장 잘 남아 있는 동문(東門) 근처 성벽의 높이는 220cm정도이다.


한명회의 건의로 유포와 경계지역인 경주지역에도 당번 군사 20명을 뽑고, 무예가 뛰어난 4품 이상의 무관을 배치하였다. 이곳은 왜구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기 때문에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의 지휘 아래 울산과 경주의 병사 300명이 3번 교대로 주둔했다.그런데 울산에는 경상좌병영과 경상좌수영이 있는 데다 조선 성종 때가 되면 울산읍성까지 축조되어 튼튼한 국방을 갖추게 된다. 이렇게 울산지방의 방어 시설이 탄탄하게 정비되면서 상대적으로 유포석보의 중요성은 점점 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그 후 일제강점기 말 정자항에 방파제를 쌓을 때 이곳 석보의 돌을 뽑아가는 바람에 지금은 원형이 거의 파괴되고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역사적, 학술적인 보존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유포석보 북쪽 성벽 국도변쪽에는 ‘박제상발선처(朴堤上發船處)’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89년 석굴암연구회에서 신라 박제상이 왜의 사신으로 갈 때 배를 타고 출발한 곳을 이곳 정자항으로 보고 세운 것이다. 기록에 보면 박세상이 출발한 곳은 율포로 되어 있다. 석굴암연구회에서는 율포를 이곳 정자항으로 보고 있지만, 다른 곳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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