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말할 시간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 기사승인 : 2021-02-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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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비밀[秘密] [비ː-] 1. 남에게 알리지 않고 숨기는 일 2. 남에게 무언가를 알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태도가 있다 –Daum사전

비밀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남에게 알리지 않거나 알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주체의 의지가 비밀을 만드는 걸까? 만약 남에게 알리고 싶으나 알려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주체의 의지와 무관한 비밀도 있는 걸까?


“~을 말하기”의 일차적 목적은 “~을 알리기”에 있기에 비밀이란 단어는 그 자체에 “말하기”의 수동성과 불가능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즉, 비밀은 (타인에 의해) 폭로되거나 알려질 수는 있으나, (주체가) 비밀을 말하는 순간 비밀은 알려지게 되고 비로소 비밀은 비밀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밀을 말하기 위해서는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와 결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떤 경우에 비밀을 말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될까? 더 이상 남에게 숨길 필요성이 사라졌다면 더 이상 비밀의 성립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므로 “비밀을 말하기”가 아니라 “그냥 말하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을 말하기”는 주체가 말한 후에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숨기길 요구받는 것이기에 비밀을 말하려고 할 때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비밀인데 어떻게 말할 수 있지?”와 같이 비밀의 진위여부 혹은 “비밀을 말하는 데는 무슨 목적이 있겠지”라며 불순한 의도가 내포된 것은 아닌지 의심받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가 비밀을 말하겠다는 능동적 의지는 단순히 어떠한 일을 알리는 것을 넘어서 어떤 형태로든 현 상태의 변화를 원할 때 생길 수밖에 없다.


<비밀을 말할 시간>은 “이 나라에서 여자로 살면서 성추행 안 당해 본 게 더 신기”하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성폭력에 대해 말하기를 고민하는 평범한 여학생에 관한 이야기다. ‘내 얘기인가?’ 여성 독자라면 나와 같은 한 줄 감상평을 남겼으리라. 이렇듯 여성들에게 성희롱 성폭력 피해는 보편 경험이다. 더불어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없는, 말하기 힘든 비밀에 부치는 것도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절반이 보편적으로 겪는 경험을 비밀로 만들어 버리는 건 무엇일까? 나도 알고 너도 아는데, 나도 겪고 너도 겪는데, 남에게 알리지 않도록 조심하게 만드는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나도 알고 너도 안다. 피해자를 탓하는 문화, 여성의 성(性)에 부여되는 순결, 모체, 신비로움과 같은 의미들, 진위를 의심하는 질문들이 피해 경험을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성폭력 피해는 고통스럽다. 게다가 피해에 비밀 외에 마땅히 붙일 이름이 없다면 온전히 당사자만이 짊어진 고통이 된다. 나는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도록, 성폭력에 비밀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사회가 되길 진정으로 원한다. 성폭력은 비밀이 아니라 범죄일 뿐이다.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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