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모래골, 살아온 사람들 흔적이나마 남겨야지

이동고 / 기사승인 : 2019-12-18 22: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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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인 모래골은 박재동 화백에게 사람에 대한 믿음과 온기, 그리고 사랑 등 자신이 살아가는 뒷심이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 흔적들 일부라도 보존해 후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이뤄졌으면 한다. ⓒ이동고 기자

 

[울산저널]이동고 기자=  박재동 화백의 고향 마을은 모래골이다. 그의 어린 기억들은 모래골(서사마을) 곳곳에 붙잡혀 있다. 사람에 대한 따뜻하고 살가운 감성이 자란 고향 마을이 곧 사라질 운명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는 서사마을을 기록한 책을 한 권 내었고 다음 작업으로 고향 마을에 남은 집 몇 채와 유물을 보관할 기념관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는 마을에서 나온 오래된 물건을 현재 컨테이너에 체계적으로 수집해 두고 있다. 고향 마을 터는 아파트단지에 다 내줬지만 지금도 남아있는 고향의 흔적을 이곳에 살게 될 아이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소박한 마음이다.

1. 서사마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그동안 해온 일은 ?


원래 동네 주민이더라도 보상을 받고 나면 마음이 확 돌아선다. 그런 거 기록을 남겨서 뭐하는가 하고. 그래도 서사마을 사람들은 고향 마을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기록을 남기는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사라질 마을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책은 냈는데 그것도 LH가 의무적으로 내야 할 영역이니 어쩔 수 없이 한 측면이 크다. 그래도 내 고향이니 집집마다 그림도 많이 넣어 정성스럽게 만든 것이지 이 책만으로도 아쉬움은 많이 남는다. 마을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에 대한 육성녹음이나 원래 마을 모양에 대한 미니어처 정도는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2. 모래골 고향마은 어떤 곳인가?


울산 북정동, 그곳이 외가집이었고 모래골 바로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금도 서사마을 즉 모래골이지만 예전에는 더 모래가 풍부한 마을이었다. 동요의 가사처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딱 맞는 금모래가 많은 마을이었다. 그 많던 모래가 없어진 것은 아래뿐만 아니라 위쪽에도 많이 긁어가 건축자재로 많이 썼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하지만 당시 나무를 땔감으도 많이 써 헐벗은 산이라 계속 모래가 내려왔는데 연탄이나 가스를 쓰게 되자 산에 나무나 풀이 자라 안정화되니 잘된 것이다. 여자들이 이 마을에 시집올 때는 그 마을에 ‘물긷기’가 어떤가가 중요한 문제였는데 맑은 물이 풍부하니 그런대로 시집오기에 인기 좋은 마을이었다.

3. 고향 마을에서 자라난 이야기를 하자면?


그 당시는 땅이 없으면 머슴이 되는 것이고 머슴도 안 되면 산적이 되는 시절이라 우리 할아버지는 머슴이었다. 일용직을 주로 하다가 만주로 가면 좋다길래 갔다가는 금세 돌아와 일본 도쿄 항만에 가서 일명 가데기, 즉 짐을 나르는 하역 일을 했다. 너무 일을 많이 해 어깨가 돌아길 지경이었는데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조선 사람이면 무조건 죽이는 거야. 그래도 하숙집 주인이 잘 봤는지 숨겨줘 화는 피했는데 일을 계속해 돈을 모아 고향 마을로 와서 땅을 조금 샀다. 신흥 청년부자 격이 돼 부자집 딸하고 결혼할 수 있었다. 할머니와 문화적 차이로 힘들기는 했지만, 우리 할머니도 여기 시집와서 살고 나도 이곳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다. 모래골 여기서 어려서 다 자란 거다.
추운 겨울 지나면 진달래가 봉긋봉긋 피고 다음에 찔레순이 올라오면 그 껍질을 벗겨 먹고 했다. 동요에 나오는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가사와 꼭 같은 마을이었다. 아이들은 쇠꼴 먹이러 다니고 어른들은 농사짓기 바쁘고 진달래를 한 아름 따다가 집 화병에 꽂아두고 여름에는 물장구치고 놀고 가을이면 다슬기나 고동을 잡고 미꾸라지도 잡아먹었다. 소먹이고 보리밭이 물결치고.
우리 세대는 행운의 세대다. 내가 1952년생이니까 휴전 전에 태어났지만 강원도는 몰라도 우리 동네는 전쟁이 끝난 것이었다고 봐도 된다. 아버지 세대는 모아두면 반은 그 당시 죽었지만 우리 세대는 복 받은 세대인 거다. 우리 세대부터는 굶어 죽지는 않았다. 그냥 좀 가난했지만.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받았고 당시 국민소득이 전 세계에서 꼴찌수준이었지만.
당시는 껌을 하나 구하려면 몇 달 걸렸다. 껌 하나를 이삼일 씹고 길게는 일주일을 씹었던 세대다. 눈깔사탕 사 먹는 것도 일 년에 하나 정도 먹을 정도였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방아도 하고 그래서 굶지는 않았다.  

 

▲ 박 화백 기억 속에 있늠 마을의 중심이었던 빨래터와 연자방아 쉼터, 저기 뒤편이 박 화백의 집이다.  박재동 그림


4. 박 화백에게 고향 마을은 어떤 의미인가?


고향 마을이 주는 아름다움과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는 그 푸근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사람의 뒷심이라는 것이 고향에서 이뤄진다. 30대까지는 촌놈의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잘 믿고 깊이 사귀고 그런 심성을 만들어 준 거다. 40대 정도가 되니 도시 사람이 다 돼서 잔머리 엄청 굴리면서 살았지만 아직도 내 속에는 촌놈 기질이 있다. 촌놈들은 아직 땅으로부터 받은 뭔가가 있다.
그래도 다행히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서 예전 그대로 모습으로 남은 것이 내겐 너무 복된 거다. 고향에 오면 옛날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바뀐 데가 있을 뿐 그 당시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물론 사는 사람들은 너무 어려웠다. 집이 무너지는데도 손을 못 대게 했으니, 말도 안 되게 너무 엄격하게 적용했다.  

 

▲ 모래가 많아 물도 맑았던 개울에는 빠가사리, 지름쟁이도 많았다.  박재동 그림


5. 보금자리 지정 이후 무슨 일을 했고 앞으로 계획은?
고향 마을이 보금자리 주택지구로 지정돼 아파트단지가 된다는 계획을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갑자기 확 터트렸다. 그러니 주민들이 열 받은 거다. 당시 김봉재하고 폐교가 된 들꽃학습원이라도 지키자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지역 언론에, 그리고 당시 한겨레에 내 그림칼럼이 있었는데 여러 번 쓰면서 언론에 떠들어댔다. 당시 서사초등학교는 언덕으로 노른자위 땅이었으니 평편하게 밀고 다운타운을 조성하려고 했는데 LH가 변경을 했다. 언론이 무섭긴 한가 보더라. 너무 기뻤다.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어린이와 같이하는 만화 그리기 대회’를 김봉재 씨가 열었는데 그 행사가 벌써 10년이 됐다. 그 후 MB 정권이 4대강에 모든 예산을 쏟아부으니 보상도 안 되고 사업진척이 안 되다가 작년부터 보상을 하면서 급물살을 탄 거다. 정신 못 차리면 고향에 남은 모습들이 금세 다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 지금 마을에 있는 집들 한 네 채라도 공원에 옮겨 교육체험장으로 쓰자는 계획으로 움직이고 있다. 마을에서 사랑방으로 이용하던 집이나 청년이 학도병으로 끌려간 집, 스토리가 있는 집을 옮겨 후세대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거다. 공원을 만든다고 하니 그런 집을 옮겨 마을 역사를 간접 체험하는 장소로 쓰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LH는 선례도 없다고 난색을 표명하고 해당 도시주택과 담당을 만났는데 문화체육과를 가보라고 해서 접촉하려고 하고 있다. 지금은 특정 한옥만 보전하지만 전통 민가도 문화재청의 시각으로 보면 ‘미래문화재’로 볼 수 있기에 이전과 지정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LH가 예산이 없는 것은 아니니 반드시 지켜내고 싶다.

▲ 박화백이 구상하는 마을 집 몇 채를 이용한 서사마을 기념관 및 생활체험관, 새로이 들어설 아파트에 살 아이들이 자신의 고향마을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박재동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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