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날

김윤경 글 쓰는 엄마 / 기사승인 : 2021-05-24 00: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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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일기

9살, 6살도 달력에 빨간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맨날 부처님이 오셨으면 좋겠단다. 부처님 오신 날 오랜만에 마음먹고 외출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양에게 당근 먹이를 줄 수 있는 목장이었다. 특히 작은애가 무척 좋아했다. 큰애는 높은 그네를 타고 아이스크림 먹는 재미가 컸고 작은애는 땀을 흘려가며 먹이 주기를 계속했다. 당근 먹이 리필을 두 번 하고 나서 더 이상 사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작은애가 자기는 당근 사냥꾼이라며 바닥에 떨어진 당근을 바구니에 주워 담는다. 작은애가 집게로 당근을 주다가 떨어뜨리더니 나중엔 짧은 당근도 능숙하게 양에게 쏙쏙 먹여줬다. 그러다 양이 정면에서 매애~ 소리 내자 작은애가 깜짝 놀라 후다닥 뒷걸음질치는 모습이 귀엽다.


큰애는 이른 땀띠가 난 터라 더위에 지쳐갔다. 내 옆에서 빨리 집에 가자고 조르기 시작한다. 동생이 더 놀고 싶어 하니까 기다려주자고 했더니 자기 어렸을 때는 놀다가도 동생이 울면 집에 갔다면서 기억을 끄집어낸다. 반박 불가다. 동생이 더 놀고 싶어 해도 무조건 집에 가기로 시간을 정했다. 약속된 시간이 됐으나 역시나 작은애는 집에 가기를 거부한다. 아마 풀어준다면 작은애는 너끈히 한 시간은 더 당근 사냥꾼으로 소임을 다했을 거다. 이미 남편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뜨겁게 달궈진 차에 타는 것도 애들에겐 곤욕이다. 기분 좋게 나왔다가 짜증 내며 돌아간다.


집에 돌아와 남편이 애들 머리 감기는 동안 나는 밥상을 차린다. 먹고 나서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혀가 꼬인다. 졸음이 쏟아진다. 남편도 맞은편에 이미 누웠다. 애들은 쌩쌩한데 어른 둘은 휴식이 간절하다. 다행히 애들이 “엄마 잠 와?” 나를 살피며 불쌍히 여긴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침대에 가서 누웠다. 내가 누우면 남편이 쉴 수가 없다는 공식을 알기에 눈치가 보였다. 잠결에 남편이 애들한테 유튜브 보여주는 소리가 들린다. 두 시간을 자고 이제 일어나야지 싶은데 눈꺼풀이 무겁다. 남편이 문을 열고 몇 초간 말없이 나를 응시한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비언어적 메시지다. 나는 잠깐 나갔다 오라고 남편에게 자유시간을 하사하며 일어나자마자 애들과 레고 놀이를 했다. 8시에 재우려고 했는데 실패다. 느긋하게 저녁 먹기로 마음을 비운다.


작은애가 언니를 예쁘게 그려서 감동시키고 싶다고 지우개를 박박 써가며 그린다. 은근 작은애가 완벽주의자다. 마음처럼 그려지지 않자 짜증을 내다가 언니와 싸움이 붙었다. 더운데 동생이 더 놀아서 땀띠가 심해졌다며 큰애도 동생에게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남편이 바람 쐬고 돌아왔는데도 애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자 낙심한다.


늦은 저녁을 먹는 중에 큰애가 묻는다. “엄마, 내가 말해도 안 혼낼 거야?” 뭔가 있다는 거다. 이때 온화한 표정 관리가 중요하다. “진짜 안 혼낼 거지?” 확인을 거듭 받고 나서 큰애가 실토한다. “사실은 화난다고 내가 주판을 던져서 깨졌어. 그래서 목공 풀이랑 테이프로 다시 붙였어.” “그랬구나, 앞으로 화나면 어떻게 하고 싶어?” 물었다. “인형을 던지는 게 낫겠어.” “그래, 그게 낫겠네.” “근데 엄마, 나 또 있는데 안 혼낼 거야?” 이번엔 뭐지, 다시 한껏 온화한 표정을 지어본다. “내가 지우개 가루를 털다가 밥에 들어가서 손으로 빼고 먹었어.” 이건 무슨 ‘그랬구나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빠르게 나 스스로를 다독인다.


작은애는 한번 짜증을 내면 길게 낸다. 화를 자초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작은애가 홧김에 밥 안 먹을 거라 해서 먹지 마라 했더니 더 운다. 그래 놓고 진정되면 슈렉에 장화 신은 고양이 표정으로 “엄마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는 꼭 한다. 안 먹는다 해놓고 밥은 또 어찌나 복스럽게 먹는지 모른다. 어째저째 애들을 재웠다. 당근 사냥꾼은 금방 곯아떨어졌다.


달력에 빨간 날은 가족주기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사춘기가 오면 빨간 날에 애들과 같이 외출하기가 어려울 거라 예상한다. 친구만 찾고 자기 방에서 안 나올 텐데 그날에 떠올릴 추억을 애들이 어릴 때 많이 저장해 놓고 싶다.


김윤경 글 쓰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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